책 읽는 남자- 남진우
책 읽는 남자
-남진우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잘 가꿔진 책
페이지를 넘기면 잎사귀들이 푸르게 반짝이며
제 속에 숨어 있는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피도 흘리지 않고서 책들은 고요히 쓰러진다
아니면 한 장씩 찢어 입에 넣고 오래 우물거린다
이 나무의 성분을 나는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글자들의 푸른 잎맥을 따라가다가
간혹 벌레가 파먹는 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비록 이 나무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원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책이 덩굴을 내밀어 내 몸을 휘감아오른다
무수한 문장들이 내 몸에 알 수 없는 무늬를 새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베어내도
무성하게 자라오르는 책나무
책나무 속에 들어가 눕는다
내 속에 뿌리 뻗은 나무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
책 읽는 남자, 남자여야 하나? 그냥 '책 읽는 사람'이어도 좋았을 걸.
시는 책을 한 그루 나무에 비유했지만, 시를 읽고 난 오히려 나무를 책 한 권으로 생각해본다.
나무 밑에 앉아 혹은 누워 책의 한 단어 한 단어를 읽듯이 나뭇잎 하나 하나의 색과 모양과 잎맥을 살피고, 책의 문장을 읽듯이 나무가 가지 뻗는 맥락을 살피고,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듯 나무의 둥치니 우듬지니 여기 저기를 바라보며 그 나무를 마음 안에 들이는 것.
시인은 아주 맘에 드는 좋은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아니 책을 무지 좋아하는 사람.
지금같은 한 여름,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바람 솔솔 맞으며 책읽기에 몰두한 한 사람이 보이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