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시가 있는 아침

바다가는길 2017. 5. 18. 17:35


제시편 203
-고은(1933~)

저 봐 봄이 온몸으로 오르고 올라
헛디디며 미끄러지며
숨막히며
오르고 올라
저 정상 밑 벼랑에
기어이 몇 송이 에델바이스를 피어놓았다
  
지상에서는 아기가
섬마섬마로
섰다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섰다
  
내가 팔짱 끼고도 충분한 하루였다






풀잎  
-박성룡(1934~2002)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주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소반다듬이
-송수권(1940~2016)  

왜 이리 좋으냐  
소반다듬이, 우리 탯말  
개다리 모자 하나를 덧씌우니  
개다리소반상이라는 눈물 나는 말  
쥐눈콩을 널어놓고 썩은 콩 무른 콩을 골라내던  
어머니 손  
그 쥐눈콩 콩나물국이 되면 술이 깬 아침은  
어, 참 시원타는 말  
아리고 쓰린 가슴 속창까지 뒤집어  
흔드는 말  


시인이 된 지금도 쥐눈콩처럼 쥐눈을 뜨고  
소반상 위에서 밤새워 쓴 시를 다듬이질하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우리말  
오리 망아지 토끼 하니까 되똥거리고 깡총거리며  
잘도 뛰는 우리말  
(…)





간단한 부탁
-정현종(1939~)


지구의 한쪽에서
그에 대한 어떤 수식어도 즉시 미사일로 파괴되고
그 어떤 형용사도 즉시 피투성이가 되며
그 어떤 동사도 즉시 참혹하게 정지하는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저녁 먹고
빈들빈들
남녀 두 사람이
동네 상가 꽃집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의 감동이여!
전쟁을 계획하고
비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이여
저 사람들의 빈들거리는 산보를
방해하지 말아다오.
저 저녁 산보가
내일도 모래도 계속 되도록
내버려둬 다오.
꽃집의 유리창을 깨지 말아다오.
 






한양호일 (漢陽好日)
- 서정주 (1915~2000)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芍藥)꽃을 한 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연계(軟鷄)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白紙)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엄마 걱정
-기형도(1960~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좋은 언어                            
-신동엽(1930~69)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아가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고 기다려보세요.
(…)
허잘것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죽란시사첩 서(竹欄詩社帖 序)
- 정약용(1762∼1836)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출처: 중앙일보]


어여쁜 시들...

시간이 기억을 지울텐데 읽고 그냥 놓쳐버리기 아까우니 몇 편 모아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