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가 몰리고 있다는 거제도 공곶이를 갈까 말까 망설였다. 평생 육신의 노동으로 섬 하나를 '수선화 꽃밭'으로 만든 강명식(84)·지상악(80) 부부 스토리는 TV나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너무 많이 다뤄 자칫 다 아는 얘기가 될 게 뻔했다.
그런 부담이 있었지만 한번 눈으로 확인하고는 싶었다. 매스컴이 연출하거나 미화한 모습이 아닌 실제 모습을…. 무엇보다 '성완종 리스트' 뉴스에 종일 빠져 있는 독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필요할 것 같았다. 서울서 6시간을 운전해 갔다. 거제시 일운면의 예구(曳龜) 해변에 차를 세워놓고 급경사 길을 15분쯤 거북이처럼 기어올라 가니 '공곶이' 입구 간판이 보였다. 입장료는 없었다.
붉은 꽃들은 이미 지고 짙은 그림자만 남은 동백나무 터널〈사진〉이 나왔다. 산 아래로 뻗은 터널에는 돌계단 333개가 철로 침목처럼 깔려 있었다. 주인 강명식씨는 분재(盆栽) 일을 하다가 나타났다. 낡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노란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작은 키에 허리는 ㄱ 자로 굽어 있었다.
그는 "내 손에 흙이 묻어서…"라며 손을 내밀다 말고 수돗가로 갔다.
―여든 중반이 된 연세인데 노동에서 벗어나 쉬셔야지요.
"내가 손을 놓고 있으면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요. 힘이 닿는 데까지 일해야지요."
―큰아드님이 여기에 살려고 최근에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아들이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 20년쯤 살다가 여기로 들어왔어요. 아들은 아직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아요. 내가 하지 않으면 일이 첩첩이 밀리게 돼요. 어느 계절이든 한가한 적이 없어요. 겨울이 한가할 것 같지만 그때는 봄맞이 준비를 해야 하지요."
―평생 일을 해왔는데 일을 벗어나지 못하니, 이제 신물이 나진 않습니까?
"궂은 날에 바깥일을 못 하고 집 안에 있으면 오후에는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셔요. 설날과 추석에만 쉬는데, 그런 명절 때 종일 놀게 되면 거의 발광이야."
―섬 전체가 수선화로 덮일 때면 여러 감상이 떠오르겠군요.
"나 자신이 꽃을 너무 좋아해서 꽃을 기르게 된 것은 아니고, 먹고살려고 한 거요.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꽃 한 다발(10송이)에 1000원씩 팔지만, 주 수입원은 구근(뿌리)을 내다 파는 겁니다. 꽃을 일찍 따주면 구근이 튼튼해져요. 영양분을 꽃에 빼앗기지 않으니까 상품(上品)이 되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꽃을 보겠다고 몰려오니까 꽃이 절로 질 때까지 그냥 두게 된 거죠. 실컷 보고 가라고."
―입장료를 안 받으니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가시기만 하겠군요.
"내가 평생 만들어놓은 걸 좋다고 보니 흐뭇하죠. 가끔은 들어가서는 안 될 데를 들어가거나 성가시게 하는 이들이 있지만요."
―이런 경관이면 입장료를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이곳이 해상국립공원 지역이라 입장료를 받으려면 요구되는 규정과 시설을 갖춰야 해요. 우리 부부는 농사만 짓다 보니 그런 게 번거로웠어요. 여기서는 집을 새로 짓거나 증·개축이 어려워요. 산비탈 밭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힘에 부쳐 '모노레일'을 설치할 때도 허가를 안 해줘 애먹었어요. 정부 청사까지 찾아가 '어떻게 젊었을 때처럼 이 나이에 비탈길을 왔다 갔다 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항의해 이뤄낸 거요."
그는 경남 진주의 한 농촌 출신이었다. 군에서 5년 만에 제대해 집으로 돌아오니 바로 그날 부모님이 "거제도 처녀 중매가 들어왔으니 당장 다녀오라"고 했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았지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섬이라면 유배지로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 말씀이니 '이게 내가 가야 될 운명'이라고 여겼어요. 그렇게 한 번 다녀오고 한 달 뒤 결혼했어요. 1957년 2월이었지요."
―한 달 만에? 선보고는 신부 모습에 단단히 반했던 모양이군요.
"신부는 보지도 못했어요. 결혼식을 치른 뒤 지나가면서 본 정도지."
- 강명식씨는 “애초 공곶이로 온 것은 내 뜻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고 부자 되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부인과 함께. /거제도 공곶이=최보식 기자
"연출을 시켜서 그렇지. 실제로 누가 그렇게 간지럽게 사나.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이런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와 상관없다. 당신(하느님) 뜻대로 이뤄지소서' 하고 생각했어요."
―부인이 들으면 섭섭하겠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처가 사람들이 바람 쐬러 가자고 해요. 속으로 '별 풍속이 다 있다'며 따라나서 여기 산마루까지 올라온 거예요. 순간 눈앞에 푸른 바다가 확 펼쳐지며 훈풍(薰風)이 불어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다니. 그때 내가 반한 것은 이 아름다운 경관이었지.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왕이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해도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했을까. 여기서 농사지으며 살라고 나를 불렀나 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곧바로 정착했나요?
"땅이 있어야지요. 어떻게 땅을 마련할 수 있을까. 당시 춘궁기(春窮期)가 닥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인데, 머슴살이를 해봐야 입에 풀칠할 정도였지. 그래서 땅 살 돈을 모으려면 직장 생활을 해야겠다 싶어, 삼촌이 있던 대구에 가서 신문 인쇄 공장에서 일했어요. 하지만 월급 받아봐야 겨우 생활할 형편이었어요."
그는 2년 만에 거제도로 돌아와 처가 소유 농막에서 살았다. 땅 한 평 없으니 생계 대책은 막연했다.
"당시 여기 공곶이에는 딱 한 집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집 화단에 활짝 핀 꽃이 보였어요. 순간 눈에 번쩍 불이 났지. 아, 저런 꽃을 키워 팔면 돈이 되겠다고. 그게 글라디올러스였어요."
―꽃이 돈으로 보였나요?
"자나깨나 먹고사는 걸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집주인에게 '씨앗을 얻을 수 없나?' 하고 물으니, '가을에 오면 주겠다'고 해요. 가을이 돼서 구근 두 개를 얻었는데, 구근에 혹처럼 새끼 구근이 30개나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이걸 심으면 1년 뒤에는 구근 30×30개(900개)를 얻고, 이렇게 늘어나면 구근을 팔아 땅을 사고도 남겠다는 계산이 나와요. 마음속으로 '구근 두 개를 얻어가지만 사실은 당신 땅 전체를 얻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집주인이 구근을 잘못 줬네요(웃음).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지. 하지만 심을 자리가 없었어요. 식량이 귀할 때라 처가에 대놓고 '땅 좀 빌리자'는 말이 안 나왔어요. 그러다가 마산에 있는 고아원의 뜰에 심고, 진영에 있는 공동묘지 빈터에도 심었어요. 사람들은 꽃을 구경하고 나는 구근을 수확한 거지요."
10년쯤 지나 공곶이의 집주인이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글라디올러스 구근을 다 팔아 그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그가 공곶이로 입성한 해는 1969년이었다. 결혼식 때 꾸었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여기 들어와서는 감귤 나무를 심었지. 군청에서 농촌 소득 증대 사업으로 권장했어요. 감귤 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들 대학 보낸다고 했을 때니까. 감귤 나무를 심기 위해 삽과 곡괭이로 박힌 돌멩이와 나무뿌리를 들어내고 구덩이를 팠어요. 산기슭을 계단식으로 개간한 거죠. 계단을 연결하면 4000m나 돼요. 동백꽃 터널의 돌계단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꽃 보러 오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돌계단마다 내 손가락의 피가 안 묻어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5년에 걸쳐 작업을 마치고 감귤 나무 2000주를 심었던 해, 하필 그해에 겨울 한파가 닥쳤다. 감귤 나무가 다 얼어 죽었다.
"한파를 탓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내 노력이 원통했어요. 음식을 삼킬 수 없었고 시름시름 앓아누웠어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애초 이리로 온 게 내 뜻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다. 부자 되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감귤 나무를 심어 돈 버는 것만 생각했다'며 반성했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나, 돌계단을 다 쌓고 보니 333개였어요. 이 숫자의 뜻이 뭘까. 아무리 궁리해도 지금까지 못 풀었어요."
―그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내 소명(召命)과 관련된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대화를 해보면 그는 신앙적인 사람이었다. 감귤 농사를 망치고 그렇게 털고 일어난 그는 1979년 어느 날 부산에서 볼일을 보고 버스 터미널로 가다가 종묘상 앞에 놓인 노란 꽃을 봤다. 수선화와의 만남이었다. 버스비를 빼면 딱 두 뿌리를 살 돈밖에 없었다.
"구입하면서도 '고작 두 뿌리를 심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고 한심스럽게 여겼는데, 귓전에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는 말이 들려왔어요. 집에 와서 심었지만 10년이 지나도 눈에 잘 띄지 않았어요. 수선화는 한 뿌리로 3개쯤 번식하니까. 아내는 '그까짓 것 반찬도 안 되고 돈도 안 된다'고 잔소리했어요. 그때마다 '언젠가 때가 올 것'이라고 했어요. 과연 30년쯤 지나니까 이 섬이 다 수선화 꽃밭이 됐어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공곶이 수선화'가 전해졌어요. 꽃이 한창일 때는 장승포까지 차가 밀리고 사람들이 몇 ㎞를 걸어와요."
이때 점심 준비를 하던 부인 지상악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꽃구경하러 온 아가씨들이 '지상천국이네, 할머니는 좋겠어요'라고 해요. 그러면 내가 '딱 하루만 우리 한번 바꿔 살아보자'고 답해줘요. 땡볕에 밭일을 해보면 어이쿠 할 거예요. 여기서는 눈만 뜨면 일이지요."
내가 갔을 때 이미 절정(絶頂)이 지났다. 좀 섭섭했지만. 수선화는 양지바른 곳에서는 2월부터 피고 4월 중순이면 대개 진다.
"TV 재방송을 보고는 가을에 와서 '왜 수선화가 없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제철이 있는 걸 모르고. 수선화 꽃이 지고 난 6월쯤에는 그 아래에 콩이나 작물을 심어요."
그가 집 담장 바깥으로 나오자, 꽃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TV에 나온 그 할아버지네" 하고 반색했다. 그가 장난꾸러기처럼 말했다. "TV에 나온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내 동생이라."
'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꽃이 지네, 사랑도 지네 (0) | 2015.05.05 |
---|---|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0) | 2015.04.26 |
김교신 "신앙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예배당" (0) | 2015.04.17 |
약상불귀(弱喪不歸) -정민의 세설신어 (0) | 2014.10.01 |
그림 작가 구경선-'신정선기자의 눈빛' (0) | 2014.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