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늘보의 특강-김추인 詩

바다가는길 2006. 6. 9. 17:13

늘보의 특강

               -김추인

 

 

저런, 휘휙 스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 시간의 회전판은 어지럽고

간단없는 생의 행군은 코뿔소처럼 달리며 꿈 꾸었겠다

나무늘보처럼

세상 모든 느림을 불러 아주 천천히

늘보처럼 나무에서 졸린 눈 뜨고 

늘보처럼 나뭇잎이나 질겅이고 

내가 밥숟갈을 떠 넣으며 그에게 두 번 눈 흘기고도 모기를 철썩 때려잡는 사이

화면 속 나무늘보는

아직도 이 쪽으로 고개가 돌아오는 중이다 

무심한 저 얼굴 한 송이 좀 봐

꽃송이 같지

늘보처럼 돌아보다

길도 잃고 시간표도 잊고

이제사 순금 꽃대를 뽑아 올리는

내 금화란도 좀 봐봐

늘보처럼 엉금엉금 사랑하다

가장 늦게 우리 돌아선다면 생강꽃 같은 이

별, 참 곱겠다

나무늘보처럼 그렇게

                                                              ―시집 ‘전갈의 땅’(천년의시작) 중에서

 

 

동아일보 '이 아침에 만나는 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