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부들은 이러한 조선시대 양반문화(兩班文化)의 향훈(香薰)을 몸으로 체득하여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통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였는가,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가, 집안 관리와 하인관리는 어땠고, 옷은 어떤 옷을 입었는가, 어떤 목가구(木家具)를 들여놓았는가,
손님접대[接賓客] 등등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여자들이 바로 종부들이다. 그 집안의 품격과 번창은 종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던 것이다.
전국의 종갓집을 답사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종부는 안동 학봉종가(鶴峯宗家)의 조필남(趙畢男·1917~1993) 여사였다. 그녀가 세상을
떴을 때 안동은 물론이고, 대구시내 꽃가게의 조문용(弔問用) 하얀 국화가 동났을 정도였다. 그만큼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심을 얻었던 것이다.
조 여사는 1960년대 초반 보릿고개 무렵에 감자를 캘 때는 “감자를 다 캐지 마라, 절반은 남겨 두어라!”고 자제들에게 당부하곤 하였다.
자제들이 “엄마, 아직도 이렇게 감자가 많이 남아 있는데 다 캐야지, 왜 남기고 가요?” 하고 물으면, “저기 둘러 서 있는 애들도 캐야 할 것
아니냐!” 하고 나무랐다고 한다. 가난한 집의 배고픈 아이들이 종가의 감자 밭 주변에 빙 둘러서서 말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 여사는 또 추수 끝난 논에서도 절대로 이삭을 줍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다. 이삭은 동네사람들 몫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제삿날이 닥쳐
시장에 가서 제수용품(祭需用品)을 살 때도 법도가 있었다. 여러 가게 중 그 날에 가장 정갈해 보이는 가게를 한눈에 결정하였다. 이 집 저 집
가격을 흥정하고 다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 값을 다 주고 사서는, 다른 볼 일은 보지 않고 제수만 가지고 곧바로
종가로 돌아 왔다. 양반 집안은 각박하게 물건 값을 깎지 않는 법도가 있었다. 이처럼 양반의 품위는 종부들이 계승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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