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남극에서 마라톤을..

바다가는길 2007. 12. 22. 21:25

 와, 사진 너무 시원해 눈이 확 트인다.

꿈을 이루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는 모양. 삶의 전범으로 삼을만 해 찜.

 

지난달 22~26일 열린‘남극 마라톤 대회’에서 고글과 방풍재킷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눈밭을 달리고 있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한국인 최고령 선수 이무웅씨. /이무웅씨 제공

 

[Why] 남극에서 5일간 마라톤… “내가 미쳤다고요?”
● 64세 이무웅씨 “더 늙기 전에 원없이 달리고 싶었다”

사하라·고비·아타카마 사막 마라톤 완주해야 참가 가능
칼바람 몰아쳐 힘들땐 “1400만원 내고 왜 하나” 생각도
‘오염 금지’… 대변은 비닐 이용해 해결후 가방에 담아와야
이석우 기자 yep249@chosun.com

 

 지난달 22일 새벽 2시30분 남극 아이초섬(Aitcho Island). 여느 대륙에서는 한밤이지만 남극에선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시각이다. 남극 대륙은 초여름에 접어들었지만 눈은 녹지 않았다. 기온은 영하 1~2도 정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남극 관광선 앤타크틱 드림호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상륙한 남자 12명이 눈밭에서 고글과 마스크, 방풍 재킷으로 무장하고 한 줄로 섰다. 새벽 3시, 출발 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남극에서 마라톤 대회가 시작됐다.

선수 12명 중 한국 선수가 5명. 이무웅(64), 김성관(60), 이동욱(49), 유지성(36), 안병식(34)씨가 참가했다. 나머지 선수들은 미국, 영국, 덴마크, 아르헨티나, 칠레, 일본에서 왔다. 이무웅씨는 한국 선수 중 최고령이다. 그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중장비 부품 제조회사 사장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그는 “눈밭에서 젊은 사람들과 한번 겨루고 싶어서 남극 대회에 참가했다”고 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레이싱더플레닛’은 매년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에서 7일간 250㎞ 정도를 달리는 어드벤처 레이스를 열고 있다.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남극 대회에는 3개 사막을 완주한 사람에게만 출전권을 준다.

이번 대회는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이 달리느냐’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1월22일에는 아이초섬에서 오전 3시부터 8시간, 23일 네코베이(Neko Bay)에서 3시간, 24일에는 포트록로이(Port Lock Roy)에서 2시간, 25일 쿠버빌섬(Cuverville Island)에서 2시간, 마지막 26일에는 훼일러스베이(Whaler’s Bay)에서 4시간을 달렸다.

한국 선수들은 11월18일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미국, 아르헨티나를 거쳐 54시간 동안 배를 타고 남극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대회 참가비(850만원), 항공료(350만원)를 비롯해 평균 1400만원을 썼다.

◆남극 칼바람을 뚫고 달리다

“첫날 레이스를 시작할 때는 바람도 불지 않고 날씨가 정말 좋았어요. ‘내가 드디어 남극에서 달린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도 됐지요. 이 정도 환경이면 젊은 사람들 몇 명을 제칠 수 있겠다는 욕심도 들었어요.”

이씨의 자신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남극 대륙이 마라톤 코스로 그다지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눈이 전혀 녹지 않아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8시간을 달린 첫날, 마지막 1시간을 남겨두고 블리자드(눈을 동반한 남극의 강풍)가 몰아쳤다. 그러자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까지 뚝 떨어졌다. 날씨가 맑았던 건 첫날 경기 초반뿐. 이후로는 남극의 칼바람이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대회 첫날부터 부상자가 나왔다. 일본 선수가 눈밭에 박힌 발이 제대로 빠지지 않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났다. 그는 얼마 달려 보지도 못하고 레이스를 포기했다.

대회 기간 중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추위보다 배고픔이었다. 그를 포함한 한국 선수 3명은 항공사의 배달 사고로 식량과 장비가 담긴 배낭을 남극에서 전달받지 못했다. 숙소는 남극 관광선. 기본적인 식사는 배에서 해결하지만 달리는 도중에는 초콜릿과 파워젤(에너지를 보충하는 당도가 높은 스포츠 식량) 등으로 각자 알아서 열량을 보충해야 했다.

“추운 곳에서 달리니 1시간만 지나면 배가 고파요. 그렇다고 이 나이에 구걸해 먹을 수도 없고…. 배에서 갖고 내린 빵 두 개를 물에 적셔 먹고 8시간을 뛰었어요. 나중엔 배가 고파 정신이 오락가락하더군요. 1400만원 내고 미련한 짓 한다는 생각도 들데요.”

마지막 레이스가 펼쳐졌던 26일이 선수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웠다. 4시간 내내 강풍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이씨는 “마지막 날은 체력이 고갈돼 내리막에서나 뛰었지 바람이 불 때는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밭에서 걷기만 했다”고 했다. 그는 모두 19시간 동안 95㎞를 걷거나 달렸다. 12명 중 8등이다.

◆발 밑 눈 구경만 실컷 했다

선수들은 주최 측이 정해준 2㎞ 안팎의 순환 코스를 돌았다. “며칠 동안 머리 처박고 발밑의 눈만 보면서 죽어라 ‘뺑뺑이’ 돈 셈이죠. ‘차라리 눈 내리는 날 한국에서 달리기나 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대회 기간 중 남극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철저하게 금지됐다. 용변도 규제가 있었다. 소변은 허용되지만 대변은 비닐을 이용해서 해결한 후 가방에 담아 와야 한다. 이씨도 첫날 경기 도중 눈밭에서 엉덩이를 까고 비닐에 용변을 해결했다.

◆올 한해 마라톤 23회 완주

왜 남극까지 날아가서 마라톤을 할까. 의학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달리기 중독자’에 가깝다. 이씨는 “한때 골프에 미쳐 있다가 1996년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소일거리 삼아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8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대회(10㎞ 구간)에 처음 참가한 이래 공식 대회만 110회 정도 참가했다. 올해 들어서는 11월까지 하프·풀코스 마라톤 15회, 100~200㎞ 울트라 마라톤 4회를 달렸다. 올해만 총 23회를 뛰었으니 2주에 한 번씩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셈이다.

사막에서도 달렸다. 2004년 사하라사막, 2005년 고비사막, 2006년 사하라사막, 아타카마사막에서 각각 250㎞를 완주했다.

◆더 늙기 전에 원 없이 달리고 싶다

그는 애초 지난 1월 남극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인터뷰도 하고 대문짝만한 기사도 실렸다. 하지만 기사가 나가고서 3일 뒤 주최 측으로부터 “배를 구하지 못해 남극 마라톤 대회를 연기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사기꾼이 된 것 같아 일 년 내내 찜찜했는데 인제야 약속을 지킨 것 같다”고 했다.

지난 6일 남극에서 돌아온 그는 다음 날 바로 문래동 공장으로 출근했다. 남극에서 달린 대가로 사진 몇 장과 손바닥만한 완주 메달 하나가 남았다. 그는 남극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64살 노인네 몸매치고는 참 쓸 만하지 않느냐”고 자랑했다. 남극에서 그 고생을 하며 실컷 달려놓고도 또 달리기 생각이다. 23일엔 서울 반포에서 열리는 32㎞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요즘은 ‘나이 생각해서 욕심부리지 마라’는 소리를 자주 들어요. 나도 얼마나 이렇게 더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사막이고, 남극이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달려보자, 하는 거죠. 나이가 들면 그런 욕심이 생기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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