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독도는 우리 땅

바다가는길 2008. 7. 26. 16:22

독도가 이슈가 되고있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이라고 물론 알고있지만, 누군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느냐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사실을 알고있진 못했다.

일본이 어떤 근거로 독도를 자기 영토로 주장하는지도 알지못했고.

마침 신문에서 잘 정리해 보여주니 이 기회에 제대로 알아두기 위해 스크랩.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25 03:43 / 수정 : 2008.07.25 05:16
    • 독도(獨島)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라는 행정구역을 지닌 대한민국 영토다. 동경 131°51′~131°52′, 북위 37°14′~37°15′에 위치한 독도는 크게 두 개의 섬과 주변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뤄져 있으며, 면적은 18만6121㎡다. 일본이 아무리 독도 영유권에 대한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해도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효적으로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 근거를 추적해본다.

      '울릉도 정상에서는 우산도가 보인다'
      독도가 한국 고유의 영토라는 최초의 기록은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복속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의 지증왕 13년(서기 512년)조에 나타난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여기서 '우산국'이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만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개의 섬이 울진현의 정동(正東) 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불렀다(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稱于山國)'고 기록하고 있다. '무릉'은 울릉도, '우산'은 독도의 옛 이름이다.

  •  

    이와 같은 '두 섬'의 기록은 '고려사'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성종실록' '숙종실록' 같은 수많은 역사적 자료들에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발견된 자료로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 '서계잡록'이 주목된다. 여기서 박세당은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이거나 울릉도와 인접한 섬인 죽도·관음도라고 주장했던 일본측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죽도와 관음도는 날씨가 흐리거나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섬들이다.

    '일본 땅 아니므로 면허가 필요'
    일본은 1618년 요나고(米子) 주민이 돗토리(鳥取) 번주로부터 울릉도 도해(渡海) 면허를 받은 뒤로 일본인이 독도를 정박장으로 삼아 17세기 중엽까지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고유 영토론'을 펼친다. 그러나 '도해 면허'란 외국에 나가 고기잡이를 할 때 발급했던 것이므로 오히려 울릉도·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1667년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는 일본에서 독도를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인데, 여기서 울릉도·독도는 고려(조선)의 영토이며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오키시마(隱岐島)를 한계로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1696년(숙종 22년) 울릉도와 독도 부근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던 안용복(安龍福)은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쫓아낸 뒤 이들을 추격해 일본 호키주(伯耆州) 태수, 대마도주와 담판을 짓고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이어 1699년 일본 막부의 최고책임자인 관백(關伯)이 대마도주를 통해 이를 재확인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이 같은 상황은 19세기 말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1870년의 일본측 보고서 '조선국 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는 '송도(松島·독도)는 죽도(竹島·울릉도)의 속도(屬島)'라고 썼다. 그당시 일본측의 '죽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1900년 대한제국 황제 "독도는 울도군 소속"
    개항 이후인 1882년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그동안의 공도(空島) 정책(먼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버리고 개척령을 반포해 강원·경상·충청 등에서 모집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울릉도의 본격적인 개척 이후 독도는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됐다. 이때 '독도'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904년 일본 군함의 일지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에 이 명칭이 나타난다. 울릉도 재개척 후 종래의 '우산도'를 '바위섬'이란 뜻의 '석도(石島)'라고 불렀는데 이를 훈독(訓讀)해서 '돌섬'이나 '독섬'으로 부르다가 '독도'로 변형된 것이다. 특히 울릉도 이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호남 지방 남해안 어민들의 사투리는 '돌'을 '독'이라고 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도군의 관할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울릉도 동쪽 2㎞쯤에 있는 섬), 석도(石島·독도)'라고 밝히고 중앙 관보에 수록했다. 일본측은 여기서 나오는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북동쪽의 관음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울릉도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아 사실상 붙어 있는 섬에 대해 굳이 '관할구역'을 정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 日, 슬그머니 '독도는 우리땅'
      일본은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로 전제하고 일본 영토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이전부터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이후 독도 편입을 중앙 관보에 게재하지 못하고 1905년 시마네(島根)현의 현보(縣報)에 몰래 고시했으며 관계국인 대한제국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것도 미심쩍은 일이었다.

      이 '독도 편입' 자체가 매우 불확실했던 탓에 일본 정부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계속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허종화 경상대 명예교수가 최근 입수한 1939년 일본 도쿄학습사(東京學習社)의 초·중등 역사교과서 '소학국사회도(小學國史繪圖)'는 러·일전쟁을 설명하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깔로 표시하고 독도를 '리앙쿠르 섬(죽도)'이라고 표기했다. 이 책의 초판은 1928년에 발간됐는데, 최소한 11년 동안 일본 정부가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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