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휘의 속삭임

바다가는길 2009. 6. 7. 21:59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352
정현종 저 | 문학과지성사

 

 

 

 

 

꽃시간 1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내 심장들이여

 

 

날이 맑아

석양은 제 빛이고

하늘도 제 빛이고

구름도 제 빛인데

구름은 또 조개구름

어린 시절에 보던 그대로이니

내 심장들이여

석양-심장

하늘-심장

구름-심장이여

제 빛의 심장이여

 

 

 

 

 

 

 

 

맑은 날

 

 

날빛이 밝고 맑아

이마가 구름에 닿는다

 

바람결은 온 몸에

무한을 살랑댄다

 

기쁨은 공기 중에

희망은 날빛 속에

 

 

 

 

 

 

 

슬프다

 

 

이 시간이면

올 사람이 왔겠다 생각하니

슬프다.

갈 사람이 갔겠다 생각해도

슬플 것이다.

(왜 그런지)

그 모오든 완결이

슬프다.

 

 

 

 

 

 

 

고요여

 

 

동산 자락으로 난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건물 뒤편

나무들 사이에서 고요가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그 모든

기술 문명의 소리도 또

사람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드문

순간이어서 그런가)

불현듯 고요가

아 들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 쪽을 자꾸 보면서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이었다!

기쁨이 넘치는 것이었다!

현대 세계의 제일가는 비방(秘方)

고요여.

 

 

 

 

 

 

 

공중에 들어 올려진 손

 

 

괴테의 <친화력>을 읽고 나서

숙연한 감동 속에서

나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공중에 들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이미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제도와

도덕 위로

미끄러지는

마음의 자연은

(진지한 유희본능은)

숨어 있는 세상들을

새록새록 열어 보이고,

어떤 사람의 저

가차 없는 진정성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건 지구의 자전과 공전)

 

공중에 들어 올려진

손.

 

 

 

 

 

 

 

고요여 2

 

 

봄 산

어린 잎

만지고 또 만지며

오르다가

낙엽 위에 앉아

저쪽

산과

골짜기를

바라보노라니

순식간에

마음은

고요하여.

고요하고

고요하여.

(고요하면

살리라)

 

가없는

고요여. 마음의 생살이여.

 

 

 

 

 

 

 

 

무한 바깥

 

 

방 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 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아침

 

 

아침에는

운명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청계산 능선을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홀연히

눈앞이 빛 천지다!

진달래꽃 때문이다.

천지에 웃음이 가득,

이런 빛 녈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모든 종교들, 이념들, 철학들

그것들이 펼쳐 보인 시야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시야라면

우리는 한없이 꽃 피리니,

웃는 공기 웃는 물 웃는 시방(十方)과 더불어

꽃빛 빛꽃 피리니.

 

 

 

 

 

 

 

 

바람의 그림자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맛의 에너지

 

 

아침에

파란 햇사과를 먹고

그 풋 맛에 고만

정신이 아득하여

마음은 당장

춤춘다.

혀로 오는

풋풋함의

무한 에너지.

자연에 내장된

저 동력 자원들의

미로를

흘러,

돌고 돌아,

 내 입속에 들어온

그 맛의

생동력.

빛의 파장으로

마음은 춤춘다

풋풋함이여.

 

 

 

 

 

 

 

 산 예찬

 

 

멀리 보이는 산

노스탈지아.

그건

한 아름,

한 품!

 

그 산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높은 데로 높은 데로

솟아오르면

공기만이 에너지

웃음이 연료!

 

내려와서 그 산 바라보면

나는 이미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거인.

한 창공!

 

 

 

 

 

 

 

 

광휘의 속삭임

 

 

저녁 어스름 때

하루가 끝나가는 저

시간의 움직임의

광휘.

없는 게 없어서

쓸쓸함도 씨앗들도

따로따로 한 우주인,

(광휘 중의 광휘인)

그 움직임에

시가 끼어들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남몰래 이쪽 눈물로 적실 때

그 스며드는 것이 혹시 시일까.

(외로움과 눈물의 광휘여)

 

그동안의 발자국들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이 땅 속

저기 어디 시는 가슴을 묻을 수 있을까.

(그림자와 가슴의 광휘!)

 

그동안의 숨결들

고스란히 퍼지고 바람 부는 하늘가

저기 어디서 시는 숨 쉴 수 있을까.

(숨결과 바람의 광휘여)

 

 

 

 

 

 

 

 시가 막 밀려오는데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 있는 무한--

아주 눈 속에 들어 있는 그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그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 속에서도

알은 부화한다는 것인지)

 

 

 

 

 

 

 

 

광휘!

가만히 입 안에서 되뇌어보면 온 옴이 환한 빛 속에 싸여지는 것 같아지는 단어.

그 빛이 속삭이는 소리...

시를 읽는 동안 마음이 잠깐 몸을 떠나 그 시 속에 가 있었다.

 

시인이시여,

푸르른 여명같고 빛의 무한같은 시가 밀려오거든

부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한 자음, 한 모음의 시어도 잃지말고 고스란히 살려내시길.

그 시를 기다리는 독자를 위하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0) 2009.12.31
공무도하  (0) 2009.12.11
마음의 습관  (0) 2008.06.22
두두-오규원  (0) 2008.05.05
은둔  (0) 2008.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