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바다가는길 2009. 12. 11. 23:58

공무도하

 공무도하김훈 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출판사 리뷰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_여옥의 노래

멀고 아득한 것들을 불러서 눈앞으로 끌어오는 목관악기 같은 언어를 나는 소망하였다. 써야 할 것과 쓸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겉돌고 헤매었다. 그 격절과 차단을 나는 쉽사리 건너갈 수 없었다. 이제, 말로써 호명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을 터이고, 나의 가용어(可用語) 사전은 날마다 얇아져간다.
(……)
제목으로 정한 공무도하(公無渡河)는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익사사건이다. 봉두난발의 백수광부는 걸어서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었고 나루터 사공의 아내 여옥(麗玉)이 그 미치광이의 죽음을 울면서 노래했다.
이제 옛노래의 선율은 들리지 않고 울음만이 전해오는데, 백수광부는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백수광부의 사체는 하류로 떠내려갔고, 그의 혼백은 기어이 강을 건너갔을 테지만,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그 옛노래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그 사내의 뒷모습을 떠오르게 했는데, 들리지 않는 옛노래의 선율이 나의 연필을 이끌어주기 바란다._‘연재를 시작하며’

5월 1일 첫 일일연재를 시작하며 작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또한,

“약육강식은 모든 먹이의 기본 질서이고 거대한 비극이고 운명이다. 약육강식의 운명이 있고, 거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있다. ‘공무도하가’는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는 노래이다.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라 밝혔었다.
“말로써 호명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을 터”이고, 그의 “가용어 사전은 날마다 얇아져간다”고 했지만, 그의 책상 위에 쌓인 지우갯가루는 매일같이 높아져갔고, 그렇게 5개월, “멀고 아득한 것들을 눈앞으로 불러왔던” 긴 노래는 끝이 났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김훈은 삼십 년 가까이, 작가이기 전에 기자였다. 2003년 1월 퇴직하며 마지막으로 기자생활을 한 한겨레신문에서, 작가는 사회부 기동취재팀 소속으로 종로경찰서를 출입하는 ‘종로2진’이었다. 기자는, 아침마다 ‘캡’에게 전화를 걸었다. “캡이세요? 김훈입니다. 지금 종로경찰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는데, 이를 기사로 써보겠습니다. 몇매를 보내면 될까요?” 그리고, 마감시간에 한 번도 늦는 법이 없이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기사를 팩스로 송고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 지체. 정신의 장애를 한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 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 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 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기자 김훈의 기사는 현장성이 살아 있고, 간결하고 함축적이었으며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호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옮겨놓았으나 그 관조적인 전달은 백마디 호소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5개월간의 긴 노래 『공무도하』는 작가로서보다 기자로서 더 많이 살아온 김훈이 기자의 눈으로 보고, 작가의 손끝으로 풀어낸 우리 삶의 이야기다. 그의 첫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과 단편들을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과거 안에서 현재를 이야기해왔다. 이제 그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많은 기사가 그래왔듯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나, 무심히 옮겨놓은 듯 보이는 그 배경과도 같은 풍경 안에서 새로운 인물들, 새로운 이야기―결국은 우리의 이야기인―가 태어난다. 

 

 

 

소설이 읽히지않는다.

맘 먹고 책을 들고 첫 페이지를 넘겨도 얼마 가지않아, 뭣하러 내가 이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한 시시콜콜한 문장들을 읽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하지, 하는 마음에 중도에 책을 던져버리는 일이 많았었다.

읽기를 마치지 못했어도 그 책에 대해 하나도 아쉽지않은 경우가 늘어갔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말고 던져버리던 와중에 모처럼 '공무도하'는 완독이 됐구나.

완독했다, 라기보다 완독이 됐다.

그만큼 술술 읽혔다는 얘기다.

뭐 재미있는 스토리도 아니고 그의 말처럼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사의 이야기일 뿐인데도...

 

책을 다 읽고나서도 왜 책 제목이 공무도하일까 의아했었는데 인터넷서점에 들어가보니 리뷰에 이유가 잘 적혀있다.

 

사회부기자가 접하는 세상. 세상 보기.

병원에서 이 세상 모든 병들을 목격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사회부 기자란 이 사회의 모든 병증을 목격해야하는 자이구나.

그 부조리함들을 이런 저런 인물들을 통해 표출시키고, 처음에 무관한 듯 벌려져있던 그 인물들을, 또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결국 하나로 모으는 짜임새도 대단하다 싶었지만, 소설을 위해 얼마나 취재를 많이 했을지가 글들을 통해 눈에 보여 놀랍기도 했었다.

 

좋았던 건, 무엇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집단이나 대의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않았다는 것.

강을 건너지 못하고 '여기'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들 남겠지만 묵묵히 자신들만의 삶을 꾸려갈 것이라는 것.

 

모처럼 책장을 열고 일사천리로 읽어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책이다.

그의 글은 언제나 믿을 만 하다.

책 속의 타이웨이라는 사람의 글에 대한 묘사는 그가 이루고 싶은 경지일까?

이것이 소설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책이 무슨 책이야, 하고 찾아 읽어보고 싶게 하는 묘사였다.

부디 뜻을 이루시길...

 

 

 

 

 

그 이물감에 문정수는 길들여져 있었는데, 길들여진 이물감은 결국 이물감이었다. 이 터지고 무너지고 파묻히고 뒈지는 물난리의 진부함이 데스크들의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가. 그들의 비루하고 난폭한 말투는 세상을 들여다볼 뿐, 만질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는 자들이 겉도는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근거 없는 적개심이거나, 위악으로 연륜을 과장하려는 허세라는 것을 문정수는 모르지 않았다.

 

 

타이웨이 교수의 글은 중국대륙의 역사와 문명, 시간과 공간을 여행자의 사유와 정서 안에서 현재형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그의 여정은 발해의 길림성 유적지에서부터 저녁 무렵의 만리장성 성벽, 지평선을 건너가는 봉수대, 여러 왕조와 부족들의 폐허를 지나 둔황을 거쳐서 실크로드의 서쪽 끝으로 전개되었다.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공간들이 거기에 몸을 적시는 자의 마음을 통과해나오면서 글을 빚어내고 있었다. 폐허의 돌무더기 위에 빛이 내렸고 모든 시간과 공간이 현재의 빛을 받아 소생했는데, 그 빛의 발원지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이었다.

그의 글에서는 역사와 문명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서로 연대하고 있었다. 모래산을 옮겨가는 사막의 바람과 바람에 쓸리는 억새와 산협을 휘도는 강물과 고원에 피는 들꽃들이 모두 문명이라고 이름지워지는 자상의 삶 속에서 저마다 명징한 표정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글 속에서 문명과 자연은 배타적으로 구분되지 않았고, 그 두 개의 범주가 대척접에서 맞서있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사물을 무리하게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그릐 마음은 모든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과 친화할 수 있었고, 친화로써 비밀에 닿았고, 그 친화의 힘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그 통로를 따라 글은 전개되었는데, 그가 찾아낸 비밀은 단순하고 또 명료해서 비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체는 순했고, 정서의 골격을 이루는 사실의 바탕이 튼튼했고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의 시야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의문은 과장해서 극한으로 밀고가지 않았고 서둘러 의문에 답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하는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자의 투시력이 있었다.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아무것도 결론지으려 하지 않으면서 긍정이나 부정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라 보여주는 모든 폐허 속의 빛은 현재의 빛이었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초로의 여행자는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였고 내부자인 동시에 외부자였으며, 인간이 겪은 시간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 넌 어떠니?

-난 선배가 세상을 긍정하는 사람이 되길 바래.

-넌 그따위 소리 하지 마.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

 

이런 세상이라니. '이런'이라니. 그렇게 웃자라서 휘청거리는 말로 세상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인지를  되묻지 않았다.

 

 

 

시간이 빛과 색을 가장자리 산그늘 쪽으로 끌어당겼고, 빛이 저무는 시간과 합쳐지면서 푸른 저녁이 수면 위로 퍼졌고, 색들이 그 위에 실려 흘렀다. 산그늘에 덮여서 빛이 물러서는 가장자리 수면에서 색들은 잠들었고, 바람이 수면을 스칠 때 물의 주름 사이에서 튕기는 빛이 잠 든 색들을 흔들어 깨웠다. 어두운 수면에서 빛들은 무슨 색으로 잠드는 것인지, 바람에 흔들려 다시 깨어나는 색은 잠들기 전의 색이 아니었다.부서져서 흩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그것들은 빛 또는 색이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 그것들은 다시 부서지거나 새로 태어나서 말 너머에서 명멸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짧고 정처없었다.

 

 

피리의 음색과 그 선율의 진동은 아득히 먼 것들을 가까이 불러들이고 폐허 속에서 소멸된 것들을 흔들어 깨워서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 앞으로 바싹 끌어당겨놓는 것인데, 아마도 이 부름과 응답을 가능케 하는 것은 피리의 빈 관 속을 흘러나가는 살아 있는 인간의 날숨과 그 날숨을 분할해서 제편성하는 피리 구멍과 구멍 사이의 거리일 것이라고 그는 썼다. 변하지 않는 것은 피리의 빈 관 속을 흘러나가는 인간의 날숨과 피리 구멍을 열고 또 막는 인간의 손가락동작일 터인데, 이 생명현상 또한 육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선율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는 썼다. 그의 글 속에서는, 무기를 든 인간과 악기를 든 인간, 꿈꾸는 인간과 싸우는 인간, 세우는 인간과 부수는 인간, 쫓기는 인간과 짓밟히는 인간이 모두 저 자신의 자리에서 정당했다. 그것들은 모두 필연적인 존재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의 글 속에서 '인생'이라는 단어는 그 유한한 종말이나 생애의 신산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의 삶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운명적인 새로움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사람의 몸속에서 절여지면 이런 냄새가 날 것.........

 

 

죽음은 여기저기에 널려있었으나 개별적인 죽음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이 세상의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 중에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죽음은 저 자신의 죽음뿐일 테지만, 그 죽음조차도 전할 수 없고 옮길 수 없어서 이해받지 못할 죽음일 것이었다.

 

사체들은 무표정했고 그 무표정으로 죽음에 이른 경위를 절규하고 있었다. ..............변사사건은 그렇게 한 건씩 종결처리되었다. 접근되지 않는 죽음들이었다. 그 죽음들은 삶과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였다. 살던 것들이 죽어서 죽음을 이룬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죽어 있었던 것처럼 그것들은 삶과 무관해 보였고 살아 있는 자들이 다가가서 만질 수 없을 만큼 멀어서, 변사라기보다는 폐사에 가까웠다.

문정수는 그 많은 죽음들을 흘려보냈다. 흘려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망의 노을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사실성을 풀어헤쳐서, 거기에 스치고 스미는 것들을 무력하게 주저앉혔고, 멀고 텅 빈 저쪽으로 달아나는 것들을 더이상 추적할 수 없었는데

 

 

드러나기를 원치 않고 과장되기를 원치 않으며 다만 전달되기만을 바라는 선의...

 

 

젓가락으로 김치를 마주 잡고 찢어 먹는 하찮음이 쌓여서 생활을 이루는 것인가. 그 하찮음의 바탕 위에서만 생활은 영위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소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의의 들판으로 생활은 전개되는 것인가. 그 사소함이 견딜 수 없이 안쓰럽고 그 적의가 두려워서 나는 생활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렇게 쭈빗거리고 있는 것일까......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 없는 세상에 관하여......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버린 세상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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