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352
정현종 저 | 문학과지성사
꽃시간 1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내 심장들이여
날이 맑아
석양은 제 빛이고
하늘도 제 빛이고
구름도 제 빛인데
구름은 또 조개구름
어린 시절에 보던 그대로이니
내 심장들이여
석양-심장
하늘-심장
구름-심장이여
제 빛의 심장이여
맑은 날
날빛이 밝고 맑아
이마가 구름에 닿는다
바람결은 온 몸에
무한을 살랑댄다
기쁨은 공기 중에
희망은 날빛 속에
슬프다
이 시간이면
올 사람이 왔겠다 생각하니
슬프다.
갈 사람이 갔겠다 생각해도
슬플 것이다.
(왜 그런지)
그 모오든 완결이
슬프다.
고요여
동산 자락으로 난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건물 뒤편
나무들 사이에서 고요가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그 모든
기술 문명의 소리도 또
사람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드문
순간이어서 그런가)
불현듯 고요가
아 들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 쪽을 자꾸 보면서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이었다!
기쁨이 넘치는 것이었다!
현대 세계의 제일가는 비방(秘方)
고요여.
공중에 들어 올려진 손
괴테의 <친화력>을 읽고 나서
숙연한 감동 속에서
나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공중에 들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이미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제도와
도덕 위로
미끄러지는
마음의 자연은
(진지한 유희본능은)
숨어 있는 세상들을
새록새록 열어 보이고,
어떤 사람의 저
가차 없는 진정성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건 지구의 자전과 공전)
공중에 들어 올려진
손.
고요여 2
봄 산
어린 잎
만지고 또 만지며
오르다가
낙엽 위에 앉아
저쪽
산과
골짜기를
바라보노라니
순식간에
마음은
고요하여.
고요하고
고요하여.
(고요하면
살리라)
가없는
고요여. 마음의 생살이여.
무한 바깥
방 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 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아침
아침에는
운명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청계산 능선을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홀연히
눈앞이 빛 천지다!
진달래꽃 때문이다.
천지에 웃음이 가득,
이런 빛 녈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시야가 어디 있느냐.
(모든 종교들, 이념들, 철학들
그것들이 펼쳐 보인 시야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시야라면
우리는 한없이 꽃 피리니,
웃는 공기 웃는 물 웃는 시방(十方)과 더불어
꽃빛 빛꽃 피리니.
바람의 그림자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맛의 에너지
아침에
파란 햇사과를 먹고
그 풋 맛에 고만
정신이 아득하여
마음은 당장
춤춘다.
혀로 오는
풋풋함의
무한 에너지.
자연에 내장된
저 동력 자원들의
미로를
흘러,
돌고 돌아,
내 입속에 들어온
그 맛의
생동력.
빛의 파장으로
마음은 춤춘다
풋풋함이여.
산 예찬
멀리 보이는 산
노스탈지아.
그건
한 아름,
한 품!
그 산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높은 데로 높은 데로
솟아오르면
공기만이 에너지
웃음이 연료!
내려와서 그 산 바라보면
나는 이미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거인.
한 창공!
광휘의 속삭임
저녁 어스름 때
하루가 끝나가는 저
시간의 움직임의
광휘.
없는 게 없어서
쓸쓸함도 씨앗들도
따로따로 한 우주인,
(광휘 중의 광휘인)
그 움직임에
시가 끼어들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남몰래 이쪽 눈물로 적실 때
그 스며드는 것이 혹시 시일까.
(외로움과 눈물의 광휘여)
그동안의 발자국들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이 땅 속
저기 어디 시는 가슴을 묻을 수 있을까.
(그림자와 가슴의 광휘!)
그동안의 숨결들
고스란히 퍼지고 바람 부는 하늘가
저기 어디서 시는 숨 쉴 수 있을까.
(숨결과 바람의 광휘여)
시가 막 밀려오는데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 있는 무한--
아주 눈 속에 들어 있는 그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그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 속에서도
알은 부화한다는 것인지)
광휘!
가만히 입 안에서 되뇌어보면 온 옴이 환한 빛 속에 싸여지는 것 같아지는 단어.
그 빛이 속삭이는 소리...
시를 읽는 동안 마음이 잠깐 몸을 떠나 그 시 속에 가 있었다.
시인이시여,
푸르른 여명같고 빛의 무한같은 시가 밀려오거든
부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한 자음, 한 모음의 시어도 잃지말고 고스란히 살려내시길.
그 시를 기다리는 독자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