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는 반 쯤 열린 문이다. 활짝 열린 문보다 반쯤 열린 문으로 볼 때 더 선명하고 강렬하다
하이쿠는 생략의 시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여백과 침묵으로 마음을 전한다.
하이쿠는 영원 속의 순간을 포착하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문학이다
꽃과 돌의 얼굴에서 심연을 보고 숨 한 번의 길이에 깨달음을 담는다.' -류시화
아름다운 일몰이나 사랑스러운 꽃을 볼 때 한순간 그 자리에서 멈춰 서게 된다. 이 마음 상태를 '아! 하는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숨을 들이쉬는 짧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대상이 그를 사로잡아 형태, 색깔, 그림자 등만을 자각한다. 거기 관찰자의 판단이나 느낌을 설명할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그런 순간을 만드는 것이 모든 하이쿠의 의도이다" -케네스 야스다 [일본의 하이쿠]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 일컬어지는 하이쿠는 5.7.5의 열일곱 자로 된 한 줄의 정형시이다.
450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애송되고 있고, 현대의 많은 시인들이 자국의 언어로 하이쿠를 짓고 있다.
짧기 때문에 함축적이며, 그래서 독자가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말의 홍수 시대에 자발적으로 말의 절제를 추구하는 문학, 생략과 여백으로 다가가려는 시도, 단 한 줄로 사람의 마음에 감동과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하이쿠의 세계..
오랜 집필과 자료 조사를 통해 완성한 이 책은 바쇼, 부손, 잇사, 시키 등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들을 비롯해 가장 널리 읽히고 문학적으로도 평가받는 작품들을 모두 담고 있다.
숨 한 번의 길이만큼의 시에 인생과 계절과 순간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비록 판형은 아담하지만, 설명을 보니 750여 페이지에 걸쳐 130여명의 시인의 1370여 편의 하이쿠가 실려있다고. 그리고 150여 쪽에 이르는 해설까지.
한 쪽 한 쪽 마다에 맨 위에 시 한 편, 그리고 아래로 그 시의 저자와 시가 탄생한 배경에 대한 설명, 또 그 자신의 감상, 그 하이쿠와 연관 된 다른 시들이 참으로 다정하게 모여있다.
하이쿠에 반해 원문을 읽고 싶어 일본어를 배웠달 만큼 하이쿠에 큰 애정을 지닌 저자답게 정말 한 눈에도 얼마나 정성을 기울인 책인지를 알 수있다.
하이쿠는 5.7.5의 정형시라는데 번역문으론 그 정형성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원어로 읽는다면 운율이나 댓구의 맛도 있었겠지? 그래서 저자가 그 갈증에 아예 일본어를 배웠을 테고...
바쇼가 하이쿠 최대의 거장이라지만 내겐 잇사의 시가 정감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어찌 그렇게 다양하고 끊임없는 불행이 골고루 닥칠 수 있는지 싶을 만큼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까지 연민의 정을 품는 마음과 불행 속에서도 잃지않은 유머감각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
짤막한 한 줄의 시이지만, 읽으면 하나의 풍경, 외적, 내적인 풍경이 선연히 떠오른다.
갈증 속에 혀 끝에 닿는 한 방울의 물 같고, 깊은 숲에서 들이쉬는 한 호흡의 공기같다.
두고 두고 몇 번이라도 천천히 읽으면 좋을 정말 잘 만든 책.
그냥 놓쳐버리기 아쉬운 몇 편 여기에 옮기자..
바쇼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가는 봄이여 새는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
한밤중 몰래 벌레는 달빛 아래 밤을 뚫는다
파초에는 태풍 불고 대야에 빗물 소리 듣는 밤이여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다 가을 저물녘
종소리 멎고 꽃향기 울려 퍼지는 저녁이어라
날 밝을 녘 흰 물고기의 흰 빛 한 치의 빛남
바다 저물어 야생 오리 우는 소리 어렴풋이 희다
방랑에 병 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51세로 죽기 사흘 전의 시
나비가 못되었구나 가을이 가는데 이 애벌레는
일찌기 명성을 얻고 많은 문하생을 거느려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서른일곱의 이른 나이에 돌연 에도 변두리 오두막에 은거한다. 2년 후 에도 대화재로 오두막이 불타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진정한 문학을 추구하겠다는 결의로 41세에 첫 방랑을 떠난다.
바쇼의 근본 이념, '와비' 와 '사비'. 둘 다 소박하고 차분한 멋, 물질적 빈한함과 적막함 속에서 정신적 충만을 발견하는 미의식.
바쇼의 또 다른 근본 이념은 '시오리'. 대상에 대한 섬세한 감정, 자연과 인간을 응시하는 눈.
잇사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번뇌의 세상 아무리 벚꽃이 피었다 한들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이슬이 지네 추한 이 세상에는 볼 일 없다고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도 빌고 발로도 빈다
사람이 물으면 이슬이라고 답하라 동의하는가
어린 은어는 서쪽으로 지는 꽃잎은 동쪽으로
돌아눕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 줘 귀뚜라미
구석의 거미 걱정 마 대청소는 안 할 테니까
눈 녹아 온 마을에 가득한 아이들
모 심는 여자 자식 우는 쪽으로 모가 굽는다
죽이지 마 죽이지 마 죽이지 마 아이들아 자식있는 벼룩이야
내 집의 벼룩 가엾어라 어느 새 수척해지네
이슬방울 함부로 밟지 말라 귀뚜라미여
나와, 반딧불이 방문을 잠글 거야 어서 나와, 반딧불이
그네를 타네 벚꽃 한 가지를 손에 쥐고서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직역-간단치 않게 인간으로 태어나 저무는 가을)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 버렸네
고요함이여 호수 밑바닥 구름의 봉우리
올빼미여 얼굴 좀 피게나 이건 봄비 아닌가
-'비둘기가 말하기를'.
집을 떠난 잇사는 줄곧 떠돌이생활을 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쉰 살에 고향에 돌아와 어린 여자와 첫 결혼을 했는데 어린 아내를 비둘기에 빗대고 스스로를 올빼미로 비유해 쓴 시.
나비 날아가네 마치 이 세상에 바랄 것 없다는 듯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종잡을 수 없음
(-직역 대야에서 대야로 옮겨 가는 종잡을 수 없는)
아름다워라 찢어진 문틈으로 보는 은하수
산 위의 달 꽃도둑에게도 빛을 내려 주시네
뛰는 솜씨가 서툰 요 벼룩 귀여움은 한 수 위
나의 가을 달은 흠 없는 달 그렇지만
"그의 시에는고통을 나누는 우주적 형제애, 인간이든 곤충이든 세계 속에 사는 유한한 생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있다"-옥타비오파스
"떠도는 생활 36년, 고통스러운 삶 속에 하루도 즐거움없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흰머리 날리는 늙은이가 되었다."-잇사의 일기
세살 때 생모가 죽자 아버지는 곧 재혼을 하고 계모는 아들을 낳았다. 동생이 울 때마다 계모는 욕을 하고 매질을 해 하루에 백 번도 넘게 맞았다. 눈이 퉁퉁 붓지 않은 날이 없었다. 들에 나가 일을 해야했기에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잇사가 열세 살 때 잇사편 이던 할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불화를 막고자 잇사를 다른 집에 고용살이로 보내나 얼마 후 그 집을 떠난다.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늘 춥고 배고프고 잠 잘 곳이 없었다고 잇사는 쓰고 있다.
잇사는 어른이 되어서도 궁핍을 벗지 못해 거처도 없이 남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며 스스로를 '거지 두목 잇사'라 불렀다.
누구보다 고난에 찬 밑바닥 삶을 살았기에 전통 시풍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소재와 대담한 언어를 구사했다.
부손
봄날의 바다 온종일 쉬지 않고 너울거리네
어제도 저물고 오늘도 또 저물어 가는 봄이여
오늘 뿐인 봄을 걷고 걸어서 작별했어라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잠깐 졸다가 추워서 깨어 보니 봄은 저물고
내가 나를 손짓해 불러 본다 가을 저물녘
시원함이여 종에서 떠나가는 종소리
유채꽃 피었다 달은 동쪽에 해는 서쪽에
팔베개하고 꾼 꿈은 머리에 꽂은 벚꽃 가지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리고
초겨울 찬 바람 들여다보고 달아나는 연못의 색
시코
여기저기 흩어진 봄이여 모란 꽃잎 위
지금 한 가마니 사 둘까 봄눈 내리네
꽃잎 하나가 날려도 봄이 깎여나간다 (一片花飛減却春)-두보
시키
눈 오늘 밤 내리겠지 하고 말하고 잠이 든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가을 바람 속 살아서 서로 보는 그대와 나
양귀비 피어 그날의 바람결에 흩어지네
여름 소나기 잉어 이마를 때리는 빗방울
샘물은 계속 솟아나오네 뻐꾸기 노래하고
얼음 녹아 돌 가라앉는다 산의 옹달샘
도토리 떨어져 가라앉네 산의 연못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확립시킨 시키는 잇사가 죽고 40년 후 태어났다. 스물세 살에 폐결핵에 걸려 서른다섯에 생을 마감했다.
부손같은 시인을 재발견하고, 그때까지 시골에 묻혀사는 사람이 한가로히 읊는 낡은 문학으로 치부되던 하이쿠에 새로운 빛과 의미를 부여.
소인
산다는 것은 나비처럼 내려앉는 것 어찌 되었든
늦게 핀 벚꽃 너에게 부는 저녁의 강풍 나에게도
시게요리
밤에 내린 눈 알지도 못한 채로 잠이 갓 들어
데이시쓰
아, 이거! 이거! 이 말만 되풀이한 벚꽃 핀 요시노 산
소도
꼭지 빠진 감 떨어지는 소리 듣는 깊은 산
사람 기다리는데 한쪽으로 낙엽 불어 가는 바람의 길
나를 데리고 내 그림자 돌아오는 달 밝은 밤
오니쓰라
뜰 앞에 피어 있는 흰 동백
-한 승려가 오니쓰라에게 "진리는 무엇인가? 시는 무엇인가?"하고 묻자 답한 시.
피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꽃 지기만 해도
산골짜기 물 돌도 노래를 하네 산벚꽃 피고
란세쓰
매화 한 송이 한 송이만큼의 따스함이여
미우라 조라
고요함 속 떨어져 서로 스치는 꽃잎 소리
이젠
오늘이라는 바로 이 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매화꽃 붉고 붉고 붉다
-미치광이 시인으로 불린 이젠은 어느 날 바람도 없는데 흩어져 날리는 매화꽃을 보고 감동해 돌연 깨달음을 얻고 승려가 되었다.
소라
밤이 새도록 뒷산에 부는 가을바람 듣네
-바쇼와 작별하며 쓴 하이쿠.
도코쿠
이 무렵의 얼음을 밟아 깨는 아쉬움이여
-스승 바쇼와의 작별시
서리 내린 아침 멀구슬 열매 흩어져 떨어져
-30대의 나이로 죽기 전 마지막 하이쿠
지요니
아쉽고 아쉬워라 질 때까지 보지 못한 매화꽃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보고 문단에 소개했다. 시코가 죽었을 때 쓴 하이쿠
봄비 내리네 다 아름다워지는 것들 뿐
매화꽃 핀다 무엇이 내려도 봄은 봄
달그림자조차 잠시 멈추었다 꽃의 새벽
첫 눈 내리네 글짜 쓰면 사라지고 쓰면 사라지고
꽃도 되었다 물방울도 되었다 이 아침의 눈
백개의 열매 덩굴 한 줄기의 마음으로부터
보름달 아래 눈을 밟고 걸으면 자갈소리
어찌 되었든 바람에 맡겨두라 마른 억새꽃
물 시원하고 반딧불이 사라져 아무도 없네
달도 보았으니 나는 세상에 대해 이만 말 줄임
들에 산에 움직이는 것 없는 눈 내린 아침
-지요니의 시는 장식이 없고 순수하다. 삶과 시가 다 맑고 순결하다.실제로도 돌을 베개로 삼을 만큼 단순한 삶을 산다. 도의 길을 알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지요니의 하이쿠집에 소인이 쓴 서문.
다이기
아름다워라 눈 내려 쌓인 후 맑게 개인 날
기토
아름다워라 보이는 것마다에 봄은 지나고
료타
장맛비에 빛의 비 섞인다 반딧불이
아무 말없이 손님과 집주인과 하얀 국화와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교타이
아지랑이 속 모든 것들 바람의 빛
소바쿠
내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의 눈의 고요함
문 열고 찻 잎 버리러 가는데 눈보라
료칸
숨 막히는 초록 속 목련꽃 활짝 피었네
탁발 그릇에 내일 먹을 쌀 있다 저녁 바람 시원하고
제비붓꽃 내 오두막 옆에서 나를 취하게 해
불 피울 만큼은 바람이 낙엽을 가져다주네
자루에는 쌀 석 되
화롯가에는 땔감 한 단 있으니
미망이니 깨달음은 아무래도 좋고
먼지같은 명성과 이익은 나와 무관하다
오두막 지붕 위에 내리는 밤비 소리 들으며
두 다리 뻗고 한가로이 앉았노라
오늘 오지않으면 내일은 져버리겠지 매화꽃
탁발하러 나갔다 봄의 들판에서 제비꽃 모으며 시간 다 보냈어라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마을에서 떨어진 오두막에 간혹 도둑이 들었다. 때마침 오두막으로 돌아온 료칸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도둑에게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과 담요를 건네주었다. 도둑은 당황해서 얼떨결에 그것들을 받아쥐고 달아났다. 도둑이 열어놓고 간 덧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료칸은 중얼거렸다 "도둑이 달을 두고 갔구나. 그에게 저 달을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삶은 이슬 같아서 텅 비고 덧없다
나의 세월이 가버렸으니
떨고 부서지며
나도 사라져야 하리
-료칸의 마지막 하이쿠
-어느 봄날 승려 료칸은 튓마루 아래에서 대나무 싹 세 개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싹은 빠른 속도로 자라 금세 마룻바닥에 닿았다. 료칸은 고심 끝에 판자에 구멍 세 개를 뚫어 준 뒤 대나무에게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필요하면 처마도 뚫어주겠다고 말했다.
한 번은 동생이 료칸에게 방탕한 자기 아들을 꾸짖어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조카에게 이튿 날 떠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카가 료칸의 짚신을 묶어주는데 따뜻한 물 한 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료칸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 후 조카는 방탕한 생활을 접었다.
-그는 스승에게 大愚라는 법명을 받았고, 산중턱 버려진 오두막에 살며 스스로 '오홉암'이라 이름 지었다. 5홉, 즉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뜻이다.
스이하
달빛에 부딪치며 간다 산으로 난 길
도토리 한 알 자신의 낙엽에 파묻혀 있네
산토카
충분히 잘 먹고 혼자의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소세이
싹이 트는 고요함이여 가지 끝
다코쓰
그 누구도 없는 온 하늘 자존의 가을
-사세구
교시
돌 위의 먼지에 떨어지는 가을 비
그가 한 마디 내가 한 마디 가을은 깊어가고
"사계절의 변화에 마음을 두고, 그 안에서 안주하는 세계를 찾는 것은 하늘이 준 축북이며, 그것에 정을 보내는 마음이 하이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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