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히말라야의 '산타스님' 청전

바다가는길 2015. 8. 29. 15:14

 

그의 별명은 ‘산타 스님(Santa Monk)’이다. 1년에 한 번 인도 히말라야 오지(奧地)에 선물을 들고 간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해발 수천m 고산지대에 각종 의약품과 생필품이 담긴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 나눠주는 것이다.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주민들은 20여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마을을 찾아오는 한국 스님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28년째 인도에서 수행 중인 청전(凊典·62) 스님. 30대 중반 달라이 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 후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 정착해 살면서 수행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외국에서 수십 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공로로 그는 올해 19회 만해실천대상을 받았다.
지난 10일 서울 돈암동 흥천사에서 만난 청전 스님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먼저 보살피는 게 최고의 수행”이라고 했다. 청천 스님은 20여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히말라야 오지 마을과 사원에 의약품과 생필품을 전달하고 있다. 그곳 주민들은 그를 ‘산타 스님’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10여년 참선 수행한 후 인도로 건너가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된 청전 스님은 30년 가까이 인도에서 수행하며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스님을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興天寺)에서 만났다. 깡마른 체구에 승복을 입은 스님의 미소는 편안했다. 청전 스님은 “불공은 불상 앞에서 예불만 올려서 되는 게 아니다. 이름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게 불공이다”라고 했다. 그는 “몸이 아파 약을 받으러 오는 히말라야 민초(民草)들이 바로 나의 부처이자 종교”라고 했다.

◇히말라야의 ‘산타 스님’

청전 스님은 인도와 중국 접경지대인 라다크 지역의 오지 마을을 주로 찾아간다. 라다크는 히말라야의 해발 3000~6000m 고산지대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스님이 머물고 있는 다람살라에서 1000여㎞를 더 가야 한다. 인도 땅이지만 티베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흰색 벽돌의 티베트식 불교사원 곰파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로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무대로 유명하다. 스님은 보따리 장사처럼 지프에 한가득 이민 가방 여러 개를 싣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오지를 찾아간다.

―눈과 얼음이 뒤덮인 고산지대에서는 이동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히말라야는 한번 눈이 내리면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길이 막힌다. 온도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겨울이 8개월 이상 계속된다. 이 지역에선 날이 풀려 길이 열리는 여름 석 달 동안만 여행할 수 있다. 천길 낭떠러지 길을 달려 수천m 고개 4~5개를 넘어야 한다. 주민들은 1년 중 절반 정도는 눈과 얼음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사는데, 이들은 야크와 염소를 키우는 유목민들이다. 마을이 수㎞씩 떨어져 있어서 병원도 약국도 학교도 거의 없다.”

―히말라야 오지를 찾아다니며 약과 생필품을 나눠주게 된 계기가 있었나.

“히말라야에서 수행을 하고 있으니 인근 지역의 사원이나 성지를 자주 가보게 된다.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아픈 사람은 왜 이리 많고, 필요한 것들은 왜 하나도 없는지…. 노(老)스님은 돋보기 안경이 없어 경전을 못 보고, 어린이들은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더라. 급한 대로 비상용으로 가지고 간 약을 나눠줬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오지를 찾아다니며 약과 생필품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청전 스님의 순례 보따리엔 히말라야 산간에선 구하기 어려운 온갖 물건이 담긴다. 영양제와 각종 의약품은 물론이고, 돋보기·보청기·학용품·손톱깎이·헌옷 등도 있다. 한번 길을 나서면 한 달씩 순례하는데, 30~40곳의 마을과 사찰을 돌아다닌다. 찻길이 끊어지면 말과 나귀로 물건을 나른다. 히말라야 오지 사람들에겐 영양제가 가장 인기다. 영양제를 먹으면 병이 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약을 나눠주면 주민들이 눈물을 글썽인다.”

2010년 8월 히말라야의 오지인 스피티 지역 췌링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영양제와 약을 나눠주고 있는 청전 스님. /전제우 한국불교사진협회장 제공
2010년 8월 히말라야의 오지인 스피티 지역 췌링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영양제와 약을 나눠주고 있는 청전 스님. /전제우 한국불교사진협회장 제공

―티베트식 불교 사원 곰파에 있는 스님들과도 자주 교류하나.

“노스님들을 친부모같이 모신다. 곰파를 방문하면 돋보기를 꺼내 도수에 맞는 것을 골라주고, 무릎이 아프다면 파스를 붙여주고, 귀가 안 들리면 보청기를 준다. 최고의 관심거리는 손목시계다. 한국에서 쓰지 않는 헌 시계를 모아 새 건전지를 갈아 끼워 스님들에게 드리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매년 한 번씩 보는 스님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길이 험해 가기 어려운 곰파일수록 도착할 때와 떠날 때 서로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내 수행과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히말라야 오지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약과 생필품은 어떻게 조달하나.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나도 한몫하겠다’며 한국의 스님이나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보내준다.”

 

청전 스님은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 결핍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학교에 가보면 전교생이 10~30명쯤 되는데, 젖소 한 마리만 있으면 전교생의 영양 상태가 좋아진다. 그래서 동자승이 많은 사원이나 학교에 소를 한 마리씩 사줘 우유를 먹을 수 있게 했다.”

그의 순례 여행에는 한국에서 간 순례자 2~3명이 동행한다. 2008년 8월 청전 스님과 함께 라다크 순례를 다녀온 전제우 한국불교사진협회장은 “주민들은 스님을 ‘의사 스님’이라고 부른다”며 “스님은 그들을 돌보고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수행으로 여긴다”고 했다.

◇신학도에서 승려로 변신

청전 스님은 원래 가톨릭 신부가 되려고 했었다. 그런데 신학대를 다니다 방향을 틀어 불교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신학도에서 승려로, 한국에서 인도로, 그는 인생의 의문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았다.

어렸을 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위해 전주교대에 들어갔으나 1972년 유신 반대 유인물을 돌리다가 경찰에 잡혀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교사로 임용되고 군 면제 혜택도 있어서 학교를 그만두는 데는 큰 용단이 필요했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현 광주가톨릭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도 그가 머물 수 있는 종착지는 아니었다. 그는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 또 다른 길을 찾았다”고 했다. 주위에서 모두 말렸지만 결국 그는 신학대학을 떠났다.

-신학대 학생이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큰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되어 군대에 갔다가 대건신학대에 복학했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순천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1901~1983)을 찾아갔더니, ‘학생은 전생(前生)에 천축국(인도) 고행승이었구먼’이라고 했다.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회와 생사의 문제를 고민하다 송광사로 출가했다. 내 나이 24세 때였다.”

―스님이 된 후 한국에 머물지 않고 왜 인도로 떠났나.

“출가 후 10여년 동안 전국의 선방(禪房)에서 참선수행을 했으나 풀리지 않는 갈증만 더해갔다. 깨달음을 위한 화두(話頭)만 붙잡고 있는 게 과연 전부인지, 또 다른 수행·공부법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수행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지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인도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어떤 면이 마음을 움직였을까.

“1987년 달라이 라마와 처음 만났을 때 강렬한 체험을 했다. 깨끗이 삭발하고 목욕재계까지 하고 잔뜩 긴장한 채 달라이 라마를 찾아갔는데, 그는 맨발에 싸구려 샌들을 신고 맞아주었다.”

청전 스님은 달라이 라마에게 평소 궁금했던 14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수행 중 간혹 여자에 대한 유혹에 힘든 때가 많다. 존자님(달라이 라마)께서도 그런 성적 욕망으로 갈등할 때가 있느냐”고 물었다. 달라이 라마는 “나 또한 당신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런 성적 갈등이 생길 때마다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다. 그의 인간적이고 진솔한 심성에 감동을 받았다. 고위 성직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위선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은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그 길로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임시정부가 있는 히말라야 산기슭의 인도 다람살라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에 정착한 지 6년째 되던 1993년, 청전 스님은 불교의 성지인 카일라스산(6714m) 순례를 떠났다. 그는 “이 순례길이 수행에 대한 확신과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출발해 장탕 고원을 횡단해 카일라스산까지 걸어갔다. 동료 3명과 함께 하루 30~40㎞씩 20여일 동안 700~800㎞를 걸었다. 배낭에 비상식량인 건빵과 중국 라면을 챙겼다. 중간에 유목민을 만나면 참파(보릿가루)나 마른고기를 얻어먹고 텐트에서 잘 수 있었다. 어떨 땐 텐트도 없이 땅에 매트리스만 깔고 노숙을 했다. 일교차가 심해 한낮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물이 꽁꽁 얼었다.”

―그런 극한 상황을 어떻게 견뎠나.

“달라이 라마와 찍은 사진이 나의 신분증이었다. 유목민을 만났을 때 사진을 보여주면 내 손을 자기 이마에 대고 축복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나를 라마(큰스님)로 생각했다. 처음 해보는 축복의식이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행복을 빌었다. 유목민 중에는 몸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순례를 위해 챙겨간 약들을 그들에게 주었다. 문명의 혜택이 없는 곳에서 약은 단순한 약이 아니라 생명이다. 몸이 아픈 이들에게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진통제와 항생제를 나눠주다 보니 약이 금방 떨어졌다. 이후 집을 나설 때는 5~6가지 약을 꼭 챙겼다.”

청전 스님은 “카일라스산 순례 이후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 게 내 일이 되었다”고 했다.

“산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어느 날 저녁 한 부부가 앓고 있는 아기를 안고 왔다. 그들은 내게 아기가 죽을지 살지를 물었다. 몇 년 전에도 아기가 이런 식으로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아기 엄마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약도 떨어졌다. 내가 무슨 힘이 있는가. 내가 뭘 안단 말인가! 미칠 것 같았다. 아기 머리에 손을 얹어주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지금도 아기 엄마의 그 절박한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사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후 이들을 돕는 게 나의 가장 큰 일이 되었다.”

―그 순례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무엇이었나.

“20여일 동안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는 극한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 고생을 하면서 어떤 험난한 어려움도 이겨 나갈 용기를 얻었다. 수행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것임을 알았다. 순례를 통해 몸과 마음이 변했다.”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은 어땠나.

“티베트 불교도들이 산 주위를 온몸을 땅에 엎드리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참배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간절한 사무침으로 ‘나를 바치며’ 수행하는 것이다. 사막과 설산(雪山)을 오체투지로 가는 사람들을 보니 나의 도보순례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수행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배고프고 추울 때 숨어 있던 의식이 살아난다. 인간은 고행을 할 때 의식이 깨어난다.”

청전 스님은 “우리는 흔히 깨닫고 난 후의 부처만 보려고 한다. 그러면 부처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부처가 되기 이전의 인간 부처, 즉 고행하는 부처의 모습을 봐야 부처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고 했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방에 마련된 불단(佛壇)에도 금동불상이 아닌 부처님 고행상(苦行像)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내 이웃이 나의 종교”

청전 스님은 인도에 살지만 티베트의 붉은색 승복 대신 한국 승려들과 같은 승복을 입고 수행한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람살라의 사원 인근에 집을 얻어 명상과 기도, 봉사를 하며 살아간다. 2층 방에서 커튼을 걷으면 설산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달라이 라마를 만날 때는 한국어 통역도 하고 있다.

청전 스님은 “아침에 방안 불단에 촛불을 켠 후 절을 하고 티베트어로 불경을 낭송한다”며 “아침은 보리를 볶아 갈아서 만든 참파를 물에 개어 먹고, 점심은 한국식으로 된장국을 끓여 밥을 해먹는다”고 했다. 그는 “인도에 처음 올 때만 해도 3년 정도 스승 곁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공부하고 봉사활동 하다 보니 어느새 3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다.

청전 스님은 “인도에 살면서 만난 이웃들이 나를 가르친 ‘참스승’”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시장에 삼 형제가 푸줏간을 운영하고 있다. 주위에서 은근히 그들을 무시하는데도 삼 형제의 행동이나 표정은 누구보다 온화하고 편안하다. 수도자 모습 같다. 순박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을 돌아본다. 가난하지만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나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의 종교는 민초, 즉 중생이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웠나.

“한치의 위선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세상의 스승이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인생살이의 고(苦)가 가득하지만, 어찌 그렇게 행복한 웃음을 짓고 어떻게 그토록 편안한 얼굴인지…. 인간 본래의 때 묻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순수한 영혼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청전 스님은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배고픈 사람들을 먼저 보살피는 게 수행”이라고 했다.
“비 올 때 우산 없이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우산 없이 비 맞으며 걷는 게 나의 길이다.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물질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굶어 봐야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리 주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부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봉사활동이 곧 수행이다.”

―봉사가 왜 수행인가.

“나 스스로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깨달아 나 혼자 행복하면 뭐 하나. 처음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제 나이 서른다섯인데, 언제 티베트 글씨 배우고 말 배워서 공부하지요’라고 물었다. 그는 ‘10년 공부(수행)하면 20년 봉사할 수 있고, 20년 공부하면 40년 봉사할 수 있다’고 했다. 공부 많이 해서 큰스님 되라는 게 아니라 공부해서 봉사할 수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전 스님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밥을 얻어먹기 위해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대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밥할 때 보리라도 더 넣어서 오는 이들 한 사람도 그냥 보내지 않도록 하시게’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면 어떤 느낌이 드나.

“아침에 지하철을 타보니 사람들이 다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더라. 행복이나 기쁨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다고 할까. 서울 거리에는 높은 빌딩이 올라가고 예쁜 옷들이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남에게 보복하고 이익만 좇으려 한다. 불편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내가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좀처럼 짜증을 내지 않는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한가.

“달라이 라마는 새해 법문에서 늘 ‘자정기심(自淨其心)’을 이야기한다. 흔히 ‘자기 마음을 맑게 한다’로 번역하지만, 실상은 ‘자기 마음을 길들인다’는 의미에 가깝다.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일을 많이 해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마음이 잘 길들여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를 잘 낸다. 하지만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아도 된다. 자기 마음을 길들이면 화가 날 때 화의 뿌리를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청전 스님은 간디의 흑백 사진 한 장을 건네주었다. “마음의 스승이다. 간디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이다. 화가 나거나 마음이 흐트러질 때 꺼내보라”고 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

“행복은 남을 도울 때 오는 것이다. 행복은 혼자 이룰 수 없다. 이웃과 함께 얻어야 한다.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최고의 수행이다. 내가 히말라야에서 행복한 것은 불편함 속에서도 남을 배려하고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홍렬 기자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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