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남산에 미친 사내
올해 환갑을 한 해 넘긴 사내 김구석은 고향 경주를 떠나지 못한다. 경주고등학교 시절인 1969년 5월 경주 남산을 처음 오른 것이 실수였다. 지금이야 한 해에 120만명이 찾는 순례지이지만 그때는 그저 신기한 야산에 지나지 않았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지라 곳곳에 널려 있는 불두(佛頭)며 뒹구는 탑이 눈에 밟혔고, 칠불암 마애불상 앞에서는 가슴이 떨렸다. 서른 곳이 넘는 골짜기마다 돌부처와 돌탑이 서 있고 바위에는 마애불이 그려져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듯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절들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산이었다.
그래서 매주 경주 남산을 찾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까지 매주 찾았다. 불상과 탑들은 왜 저리 뒹구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1979년 '경주남산고적순례'라는 책이 나왔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경주 남산의 불적(佛蹟)' 이래 한국인 손으로 펴낸 첫 번째 남산 종합 보고서였다. 김구석은 200자 원고지 1600장짜리 책을 복사한 제본판을 들고서 남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1981년 울산시청 산림과 공무원으로 취직했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남산을 찾았다. 복사한 책은 그 사이에 몇 번씩 다시 제본해야 했다.
-
- 경주 남산에 있는 마애불.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물결 속에 잊힐 뻔한 문화유산들이 많은 이들의 손길로 보존됐다. 남산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983년 보따리장수들이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휴대용 환등기를 팔았다. 김구석은 환등기를 사고 친척한테서 카메라를 빌려 슬라이드 필름으로 남산을 찍었다. 틈만 나면 사람들한테 즉석에서 슬라이드쇼를 펼치며 남산을 자랑했다. 1988년 울산에서 경주사적관리사무소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제 마음대로 남산을 찾을 수 있었다. 직장에 손님이 오면 자동으로 김구석이 남산으로 안내했다.
김구석은 '부처님마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회원들과 함께 남산에 올랐다. 묻혀 있던 쓰레기를 파내 수거하고 등산길 안내 리본을 일일이 떼내고, "단풍 참 좋다"며 무심코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남산의 진면모를 알려줬다. 처음으로 남산 안내 지도도 만들었다. 마애불 앞에서는 "바위에 새긴 게 아니라 바위 속 부처를 드러낸 것"이라고 일러줬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보다 더 경주 남산에 미친 대단한 사내와 만났다.
'마지막 신라인(新羅人)' 윤경렬
오랫동안 경전처럼 모시고 살던 '경주남산고적순례'의 저자 윤경렬을 만난 것이다. 그가 대중을 위한 경주 남산 소개서를 내는데, 출판사에서 필요한 사진을 수배하다가 김구석과 닿았다. 그래서 '경주남산'(대원사·1989년)이 나왔다. 글은 윤경렬이 쓰고, 사진은 김구석과 또 다른 사진가 윤열수가 찍었다. 김구석은 가슴이 벅찼다. 고등학생 시절 강의를 들으며 남산에 대한 애정을 키웠던 바로 그 윤경렬과 공동 작업을 하게 되다니. 1993년 또 윤경렬이 쓰고 김구석이 사진을 찍은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은 비슷한 때 출간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함께 대한민국에 문화유산 답사 붐을 일으켰다. 경주 남산은 동네 야산에서 일약 신라 문화의 발원지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윤경렬은 누구인가.
윤경렬은 함북 주을 사람이다. 토우(土偶)에 미쳐서 일본에서 인형 제작을 배워 와 고향에 인형 공방(工房)을 차렸다. 1939년이었다. 1943년 윤경렬은 개성에 고려인형사를 차리고 개성박물관장 고유섭을 만났다. 고유섭은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미술사학자가 빚을 지고 있는 고고미술사학의 선구자였다. 첫 만남에서 고유섭은 "일본의 독기(毒氣)를 빼려면 10년은 걸린다"며 윤경렬을 쫓아버렸다. 두 번째 만남에서 고유섭은 "백제 얼굴을 보려면 부여로, 신라 얼굴을 보려면 경주로 가라"고 했다.
윤경렬은 경주로 갔다. 유적지를 찾아 실측과 함께 스케치를 하며 신라 얼굴을 찾아갔다. 1954년 경주박물관에 어린이박물관학교를 만들었고, 경주 남산을 죽을 때까지 600번 넘게 갔다. 인형 팔아 번 돈은 답사와 집필에 다 들어갔다. 그러고 나온 책이 '경주남산고적순례' '겨레의 땅 부처님 땅'이었다. 훗날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펴낸 '경주 남산'(2002년)은 윤경렬을 '남산에 대한 첫 종합 지침서를 쓰고, 남산에 문화적·인간적 정취를 불어넣은 분'이라고 기록했다. 윤경렬은 1999년 11월 30일 경주를 떠나 영원히 하늘로 갔다. 사람들은 그를 '마지막 신라인'이라고 불렀다. 그보다 두 달 전 김구석은 "남산하고 살련다"며 18년 공무원 생활을 때려치웠다. 산에서 만난 아내 임희숙도 찬성했다. 임희숙은 몇 년 뒤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2007년 남산 열암곡 계곡에서 넘어진 불상을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다.
자, 경주 남산에 미쳐서 뒤늦게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입학한 다음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된다"며 생업을 접었으니 김구석은 학자 말 한마디에 아무 연고 없는 경주로 내려와 뼈를 묻은 스승만큼 바보가 아닌가. 그럼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국립박물관의 바보들
1974년 4월 30일 일흔한 살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내과 의사 박병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백자 362점을 기증했다. 700여 수집품 가운데 고르고 고른 명품들이었다. 국보·보물급이 즐비했고 당시 돈으로 10억원이 넘었다. 이보다 3년 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총공사비가 429억 원이었다.
모든 일은 1929년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서 시작됐다. 경성제대부속병원의 내과 의사 박병래에게 지도교수 노사카가 물었다. "박군, 이게 뭔지 알겠나." 그저 그런 하얀 접시 하나였다. "조선 것은 아닌 듯합니다." 스물여섯 먹은 조선인 제자에게 스승이 정색했다.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그 순간은 아무 생각 없이 넘겼는데 퇴근하고서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미 개성 주위 산은 고려청자를 노리는 일본 도굴꾼들이 조선인을 시켜 벌집으로 만들어놓았고, 전국 시골집에 있던 조선백자는 일본 골동상들이 훑고 있던 때였다. 그날 이후 박병래는 경성에 있는 일본인 골동품상 12군데를 샅샅이 뒤지고서야 집으로 가곤 했다.
-
-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사람들. 왼쪽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전형필, 고미술사의 선구자 고유섭 그리고 평생 모은 백자를 내놓은 박병래.
그러다 보니 보였다. 입원 환자 가족이 들고 온 김치 그릇은 청화백자였고, 소변 검사하라는 말에 환자 가족이 꺼낸 오줌통은 청화소병(小甁)이었다. 냉면집 젓가락통은 백자필통이었다. 그때마다 족족 사들였다. 주인들에게는 '우리 조상들 예술품'이라며 제값 치르길 잊지 않았다. 백자화로를 두고서 자신이 "10원도 비싸다"고 했는데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2원도 싸다"고 했을 때는 지도교수가 면박을 줬을 때보다 더 치욕스러웠다. 한번 박병래의 손에 들어간 백자는 두 번 다시 시중에 나오지 않았다.
광복이 되었다. 1945년 11월 환국한 임정 주석 김구의 탈장 수술을 박병래가 집도했다. 4년 뒤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쓰러졌을 때 달려간 사람도 박병래였고, 김구의 손녀이자 안중근의 외손녀인 김효자를 거둬 키운 사람도 박병래였다. 가난한 대한민국에 만연했던 결핵 퇴치에 앞장선 사람도 박병래였다. 박병래는 그 격변기에도 백자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73년 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최순우가 박병래를 찾아갔을 때 박병래는 "백자를 받아줬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폐암을 앓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 최구가 집안 곳곳에 있는 백자를 찾아내보니 700점이 넘었다. 박병래는 이듬해 명품을 골라 기증하고 한 달 뒤 하늘로 갔다. 광복 후 국가에 문화재를 기증한 첫 사례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사람 이름이 붙은 전시실이 열 개 있다. 박병래·이홍근·김종학·유강열·박영숙·최영도·유창종·가네코·하치우마·이우치실(室)이다. 개성 사람 이홍근은 선배인 고유섭에게 "문화재의 일본 유출이 걱정"이라는 말을 듣고 평생 문화재를 모았다. 동원산업을 일으킨 이홍근은 1980년 수집품 4941점을 기증했다. 청자 한 점이 박물관 예산보다 비쌀 때였다. 1989년 목공예품 300여 점을 기증한 화가 김종학, 규방 사물 631점을 기증한 치과 의사 박영숙, 토기 1500점을 기증한 법조인 최영도와 옛 기와 컬렉션을 기증한 법조인 유창종, 그리고 일본인 등 기이한 바보들의 열전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읽을 수 있다. 2003년에는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이 국보 4건, 보물 22건을 포함한 수집품 27점을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보물 150여 건의 5분의 1이다. "제지 공장에서 양잿물에 씻겨 가는 고서가 안타까워 모았고, 고향인 평북 정주에 박물관을 짓는 게 난망해서 기증한다"고 했다. 광복 후 지금까지 242명이 수집품 2만8000여 점을 기증했다. 그러면 김구석은? 현장에서 몸과 시간을 바쳤다.
경주 남산,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1996년 김구석은 세 번째로 인도 배낭여행을 떠났다. 거대한 종교 유적지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에서 김구석은 깨달았다. "우리한테나 석굴암이고 불국사지 그 누가 이 거대 유적을 보고 작은 대한민국을 찾겠는가. 남산과 석굴암과 불국사는 왜 위대하지?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듬해 대학교에 들어간 김구석은 1999년 경주남산연구소를 설립하고 공무원을 관뒀다. 마흔다섯이었다. 그의 인생은 치부(致富)와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김구석은 "어려운 고급 정보 대신 문화유산에 대한 기초 정보를 줘야 우리 문화에 익숙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하는 사이에 김구석과 그가 세운 연구소 사람들은 현장으로 갔다. 지도와 안내서를 만들어 등산객에게 나눠줬다. 대학 강단에서 남산을 이야기했고 삼국유사를 강독하며 깊이를 더했다. 불상과 탑 사이에서 극기 훈련을 하려는 기업을 막았고 탑마다 조명을 설치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학계와 관계와 민간이 경주 남산의 진면모를 밝혀낸 끝에 2000년, 드디어 왕릉 13기, 산성 터 4곳, 절터 147곳, 불상 118개를 비롯해 확인된 문화재만 672점이 산재한 이 동네 야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산이 아니라 웅장한 노천 박물관으로 부활한 것이다. 퇴직한 하급 공무원 김구석이 만든 경주남산연구소는 그 노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강의를 하고 있다.
학계의 냉대 속에서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박병선,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굴해낸 전형필, 사심 없이 모든 것을 내놓은 박물관의 기증자들, 그리고 평생 경주 남산에 매달린 윤경렬과 김구석. 이들 덕분에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은 지금 그 모든 것을 누리는 행복을 갖게 되었다. 그 모든 '장엄(莊嚴)한 바보들'에게, 경배(敬拜).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스크랩-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의 '산타스님' 청전 (0) | 2015.08.29 |
---|---|
'아무 조건없이 추사 '세한도' 내준 日학자 후지쓰카' (0) | 2015.05.30 |
약탈 대신 양보… 정부는 미숙해도 국민은 성숙했다-네팔 카트만두 (0) | 2015.05.06 |
정민의 世說新語]-상구작질 (爽口作疾) (0) | 2015.05.06 |
私財 털어 빈민 돕는 南美의 한인 市長 정흥원 (0) | 2015.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