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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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 못알아들을 말 하나 없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 쉽게 내 마음에도 선연히 떠오르니...
꽃들
세상 갈수록 캄캄해
며칠 내 허방다리 피해 발끝만 보고 다니다가
마음먹고 언덕에 올라 큰 대자로 누워도
마음 계속 팔다리 옹크린 형상일 때
훌쩍이듯 간간히 몸 뒤척일 때
속삭이는 소리
그게 태어나기 전 바로 네 모습이다.
속삭이는 소리
金의 어머니 양지꽃.
꿈의 꿈
지난 몇 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 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아도 몸 뒤척이는 까치 새끼들
바알간 발톱까지 적시고
발톱에 묻은
거미줄 남은 한 가닥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그만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촐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곳
1. 대천 부근 뻘밭
핑크시대 피카소가 방랑하는 광대무리를 모아
몸짓 표정 그리고 슬픔의 따스함을 심어주다
가운데 엄지 꼭두의 다리 하나를 잊어버리고
다음 캔버스로 건너가고 말았듯이
이즘 여행에서 나는
엄지 지명 하나쯤을 안 갖고 돌아온다.
대천행! 여행에서 나는 뻘을 걸으며
더 갈 수가 없어
오랜만에 수평선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 물결이 만들어주는 내 지구의 모습)
능쟁이 황발이 똘창이 바카지
온갖 쬐그만 게들을 다 만져보고 오며
정작 뻘 이름은 안 갖고 돌아왔다.
오 뻘이여,
물결의 고향,
우리 정신의 진한 곳, 하늘의 무르팍이여.
능쟁이 황발이 똘창이 바카지
걷다 보면
머리 위 구름은 말없고
꼬마 게들만 나를 알아보는 곳.
뻘 바위 위에 앉아있는
나를 잊어버리고......
산벚꽃 나타날 때
물 오른 참나무 사이사이로 산벚꽃 나타날 때
더도 말고
전라북도 진안군 한 자락을 한 나절 걷는다면
이 지상살이 원 반쯤 푼 것으로 삼으리.
장수물과 무주물이 흘러와 소리죽이며 서로 몸을 섞는
죽도 근처
아니면 조금 아래
댐의 키가 조금 불어나고 있는 용담 근처.
알맞게 데워진 공기 속에 새들이 몸 떨며 날고
길가엔 조팝꽃 하얀 精 뿜어댈 때
그 건너 색깔 딱히 부르기 힘든 물오른 참나무들
사이 사이
구름보다 더 하늘구름 산벚꽃 구름!
그 찬란한 구름장들 여기 저기 걸어놓고
그 휘장들을 들치고 한 번 안으로 들어간다면.
봄 현등사
현등사처럼 산등성에 간신히 매달려
눈길에 미끄러지며 나무 그루터기 움켜잡으며
세상 살다가
눈 떠도 눈가루 속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 더듬다가
더듬는 손마저 희미해지다가
갑자기 발 밑 환해 자세히 보면
가랑잎 틈새 막 비집고 핀 순금 노랑붓꽃
시냇물 소리 싱싱해지고
산벚나무마다 하얀 꽃 혼들 깨어나
밖이 궁금한 듯 기웃댄다.
현등사
절집 모두가
산등성에 묻은 한옴큼 보랏빛 아지랑이 될 때
그 한 옴큼 속에 넌지시 들어가
겨우내 곱고 있던 두 손의 손가락들을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가슴 높이에서 하나씩 편다.
그대를 어찌?
복사꽃 조팝꽃 산벚꽃 싸리꽃
꽃 물결 때문에
길들이 온통 뒤엉켰구나.
그 길에 엉켜 앞 뒤 못보고
아파트의 찌든 살 한 덩이
떠돌지 않고 돌아왔다면
그대를 어찌?
가슴에 주렁주렁 꽃 채 매단 큰 재 하나 넘으면
작은 재들 머리에 꽃동이 이고 떠돈다.
처음 보는 재도 낯익은 재 같아
벼랑 가까이 끌려가다 아슬아슬 놓여난다.
발 바로 앞에서 산까치 한 마리 현란히 난다.
벼랑이란 바로 날기 시작하는 곳.
그 날음에 눈 퍼뜩 떠져
벼랑 반 보 앞
살떨림 한번 격하게 격하게 그대 몸 훑지 않았다면
그대를 어찌?
딴 방향으로 날다가
떠다니다 떠다니다 멈췄네
논산 가야곡면 쌍계사
대웅전, 다섯 꽃 문살 이파리들
늦가을 비에 젖어 시들고
전기 촛불 속에서
나무 새 몇 마리 말없이 천장에서 날고 있는 공간
한마리는 들보 건너에서 외로이 딴 방향으로 날고
딴 방향으로만 떠다니다
문득 걸음 멈춘 볼 만한 산도 길도 없는 곳
사방 어두운 구름 겹치고 가을비 치고
낙엽 떨어져 채 구르지 못하고 흙에 젖는
어떤 것은 날려와 섬돌과 기둥에 척척 들러붙는
뜯으려해도 뜯으려 해도 뜯어지지 않는
질기고 긴 잎 날려 다리를 와 감는
가을 한 저녁.
빗금으로 내리지르는 보이지 않는 세월의 빗줄기
단풍 가운데도
산벚 단풍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단풍잎 하나
우연히 눈 앞을 스치며
속을 보이려다 말고
숨 죽이고 마지막까지 마른
혈관 채 보이려다 말고
날아간다.
그래 속 보이지 마라,
그냥 바람이 좋아, 라고 말해봐라.
삶이 헐거워졌어, 라고.
눈 내리는 오천성
언덕이 사라지고
성문이 눈에 묻힌다
아 손바닥들이 하얀 돌계단
조심 조심 짚고
돌 城 속에 몸 들이민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눈발 속에 덤불들이 사라지고
해송 머리칼들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욱이 바다가 사라진다.
종이 상자 껍질로 창 막은 교회 하나
하얀 어깨가 자란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멧새 한 마리 눈 앞에서
눈 털며 날아.
또 한 마리
눈 털며 따라 날아.
떠다니는 저 따뜻한 피들.
눈발이 굵어지고 새들이 사라지고
적막!
내 슬그머니 사라져도
저 눈 뿌리는 소리 들리겠지.
아 청결해라!
뺨에 금 채찍!
눈부셔
들판 가득
生金물결
사라지려는 꽃내음 하나 찾아 꽃집에 들어가
모든 냄새 놓치고 말 듯
금 물결 속을 걸으며
모든 빛을 놓친다.
금 이삭이 손등 쿡쿡 찌르고
바지 밑으로 들어와 종아리 찔러
시간이 금빛으로 졸아들고
당겼다 놓으면
금빛으로 출렁댄다.
논둑의 쑥부쟁이 한 무리가 출렁에 걸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바로 선다.
출렁 위로 나르는 되새떼
몇 놈은 정신없이 옆으로 튀었다가
되튕겨 돌아온다.
나도 한 번 마음 놓고 가로 튀어,
아 뺨에 금 채찍, 이 찬란함!
금 속을 마음껏 걸었으니
내 이제 더 무슨 가난을 탐하리오.
미뤄 둔 편지 오늘 모두 쓰리
오늘 밤에는
금의 꿈을 꿀 것이다.
제비꽃
오늘은 개일는지
학생들이 오르기 전
이슬 채 마르지 않은 언덕에 올라가
무심히 누웠다
하늘을 보다 아래를 보니
제비꽃 별처럼 수놓은 푸른 수틀 속에 내가 누워있었다
수틀이 마르며 내리는 빛발 속에
꽃송이 하나 하나가 산들대며 빛난다.
곧 사그라들 저 가혹하게 예쁜 놈들!
한 놈은 꽃잎 하나가 크고
또 한 놈은 꽃받침이 살짝 이지러졌다.
키도 제각기 달라
거의 땅에 붙어 있는 놈도 있다.
어느 누구도
옆 놈 모습 닮으려 애쓴 흔적 보이지 않는구나.
한참 들여다 보면
이슬방울인가 눈물방울인가 가진 놈
얼굴에 방울 띄우지 않고
가슴에 내려 녹이고 있을 뿐.
외계인 2
2.
차에서 내려 자물쇠를 연다
조용하다
하늘에 뜬 새도 없다
눈을 한번 감았다 조심히 떠도
이천평 농장 안이 온통 조용.
꽃다지도 피어 있고 민들레도 피어 있다.
저기 어린 왕자 복수초꽃은 숨어 있고
때 이른 씀바귀꽃은 조심히 열려있다.
세상이 온통 초록색과 노랑색, 그 색깔을 좇다가
쌍둥바람꽃 밑에 쉬고있는 도롱뇽을 만난다.
정말 오래간만,
너무 빨리 헤어지지 않기 위해
슬몃 슬몃 다가가 발로 그의 등을 밟는다.
인간의 것보다도 더 영리해 보이는 그의 눈.
점더 세게 밟아도 변치 않는다.
그 눈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도롱뇽 눈물?)
점점 커지다 그의 눈보다 커지다
나를 흐린다.
발을 들어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봄이 들끓는다.
꽃다지도 말을 하고 민들레도 속삭인다.
저기 어린 왕자 복수처꽃도 흥얼대고 있구나.
때 이른 씀바귀도 털들을 한 치 더 올리고 있다.
세상이 온통 색깔 만발,
짧은 비 오려는지 하늘이 살짝 찌푸렸는데
농장은 구석까지 환하다.
노랑나비 하나가 날아가고
또 한 마리 뒤따라가고
밑을 보니 도롱뇽이 자취를 감췄다.
내린천을 찾아서
창촌 양양간 56번 국도
아스팔트 포장 일보 전
강원도 내륙 지방은 흐리다 맑겠음.
낮 최고 기온 춘천 영하 8도 홍천 영하 9도
지형에 따라 눈보라도 치겠음.
내 마음의 줄을 한참 잡아다니면
마지막으로 끌려나올 지명의 한 가닥
시간이 아직 백줄기의 혓바닥으로 여울지기도
하릴없이 몇 달 얼어 있기도 하는 곳
내린천을 찾았다.
십 년 전 맨 몸으로 헤엄치고
맨 입으로 마신 강물
얼은 채 그냥 남아 있음.
십 년 전처럼 버스가
그림자처럼 강을 끼고 지나감.
발 밑에서는 십 년 전의 벌거벗은 나와
바위 밑 자갈 사이에
퉁가리 꺽지 돌마사 수수종애
벌거벗고 자고 있음.
발을 굴러도 깨어나는 기척 없음.
그 기척 없음을 찾아
짧은 겨울 날 다섯 시간을 달려왓음.
눈보라가 일었다.
불 붙이기 싫어
라면을 끓이지 않았다.
딱다구리 나무 쪼는 소리 이따금 울릴 뿐
마을에도 겨울엔 밥집이 없었다.
눈보라가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열자
찬란한 산들이 기척없이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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