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황동규

바다가는길 2006. 3. 26. 00:39

 

 

 

 

외계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196
황동규 저

 

 

 

 

 

같은 나라 사람, 같은 언어를 쓴다.

그의 말, 못알아들을 말 하나 없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너무나 쉽게 내 마음에도 선연히 떠오르니...

 

 

 

꽃들

 

 

세상 갈수록 캄캄해

며칠 내 허방다리 피해 발끝만 보고 다니다가

마음먹고 언덕에 올라 큰 대자로 누워도

마음 계속 팔다리 옹크린 형상일 때

훌쩍이듯 간간히 몸 뒤척일 때

속삭이는 소리

그게 태어나기 전 바로 네 모습이다.

속삭이는 소리

 

金의 어머니 양지꽃.

 

 

 

꿈의 꿈

 

 

지난 몇 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 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아도 몸 뒤척이는 까치 새끼들

바알간 발톱까지 적시고

발톱에 묻은

거미줄 남은 한 가닥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그만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촐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곳

 

 

1. 대천 부근 뻘밭

 

핑크시대 피카소가 방랑하는 광대무리를 모아

몸짓 표정 그리고 슬픔의 따스함을 심어주다

가운데 엄지 꼭두의 다리 하나를 잊어버리고

다음 캔버스로 건너가고 말았듯이

이즘 여행에서 나는

엄지 지명 하나쯤을 안 갖고 돌아온다.

대천행! 여행에서 나는 뻘을 걸으며

더 갈 수가 없어

오랜만에 수평선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 물결이 만들어주는 내 지구의 모습)

능쟁이 황발이 똘창이 바카지

온갖 쬐그만 게들을 다 만져보고 오며

정작 뻘 이름은 안 갖고 돌아왔다.

오 뻘이여,

물결의 고향,

우리 정신의 진한 곳, 하늘의 무르팍이여.

능쟁이 황발이 똘창이 바카지

걷다 보면

머리 위 구름은 말없고

꼬마 게들만 나를 알아보는 곳.

 

뻘 바위 위에 앉아있는

나를 잊어버리고......

 

 

 

 

산벚꽃 나타날 때

 

 

물 오른 참나무 사이사이로 산벚꽃 나타날 때

더도 말고

전라북도 진안군 한 자락을 한 나절 걷는다면

이 지상살이 원 반쯤 푼 것으로 삼으리.

장수물과 무주물이 흘러와 소리죽이며 서로 몸을 섞는

죽도 근처

아니면 조금 아래

댐의 키가 조금 불어나고 있는 용담 근처.

알맞게 데워진 공기 속에 새들이 몸 떨며 날고

길가엔 조팝꽃 하얀 精 뿜어댈 때

그 건너 색깔 딱히 부르기 힘든 물오른 참나무들

사이 사이

구름보다 더 하늘구름 산벚꽃 구름!

그 찬란한 구름장들 여기 저기 걸어놓고

그 휘장들을 들치고 한 번 안으로 들어간다면.

 

 

 

봄 현등사

 

 

현등사처럼 산등성에 간신히 매달려

눈길에 미끄러지며 나무 그루터기 움켜잡으며

세상 살다가

눈 떠도 눈가루 속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 더듬다가

더듬는 손마저 희미해지다가

갑자기 발 밑 환해 자세히 보면

가랑잎 틈새 막 비집고 핀 순금 노랑붓꽃

시냇물 소리 싱싱해지고

산벚나무마다 하얀 꽃 혼들 깨어나

밖이 궁금한 듯 기웃댄다.

현등사

절집 모두가

산등성에 묻은 한옴큼 보랏빛 아지랑이 될 때

그 한 옴큼 속에 넌지시 들어가

겨우내 곱고 있던 두 손의 손가락들을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가슴 높이에서 하나씩 편다.

 

 

 

 

그대를 어찌?

 

 

복사꽃 조팝꽃 산벚꽃 싸리꽃

꽃 물결 때문에

길들이 온통 뒤엉켰구나.

그 길에 엉켜 앞 뒤 못보고

아파트의 찌든 살 한 덩이

떠돌지 않고 돌아왔다면

그대를 어찌?

 

가슴에 주렁주렁 꽃 채 매단 큰 재 하나 넘으면

작은 재들 머리에 꽃동이 이고 떠돈다.

처음 보는 재도 낯익은 재 같아

벼랑 가까이 끌려가다 아슬아슬 놓여난다.

발 바로 앞에서 산까치 한 마리 현란히 난다.

벼랑이란 바로 날기 시작하는 곳.

그 날음에 눈 퍼뜩 떠져

벼랑 반 보 앞

살떨림 한번 격하게 격하게 그대 몸 훑지 않았다면

그대를 어찌?

 

 

 

 

딴 방향으로 날다가

 

 

떠다니다 떠다니다 멈췄네

논산 가야곡면 쌍계사

대웅전, 다섯 꽃 문살 이파리들

늦가을 비에 젖어 시들고

전기 촛불 속에서

나무 새 몇 마리 말없이 천장에서 날고 있는 공간

한마리는 들보 건너에서 외로이 딴 방향으로 날고

 

딴 방향으로만 떠다니다

문득 걸음 멈춘 볼 만한 산도 길도 없는 곳

사방 어두운 구름 겹치고 가을비 치고

낙엽 떨어져 채 구르지 못하고 흙에 젖는

어떤 것은 날려와 섬돌과 기둥에 척척 들러붙는

뜯으려해도 뜯으려 해도 뜯어지지 않는

질기고 긴 잎 날려 다리를 와 감는

가을 한 저녁.

 

 

 

 

빗금으로 내리지르는 보이지 않는 세월의 빗줄기

 

 

단풍 가운데도

산벚 단풍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단풍잎 하나

우연히 눈 앞을 스치며

속을 보이려다 말고

숨 죽이고 마지막까지 마른

혈관 채 보이려다 말고

날아간다.

 

그래 속 보이지 마라,

그냥 바람이 좋아, 라고 말해봐라.

삶이 헐거워졌어, 라고.

 

 

 

 

눈 내리는 오천성

 

 

언덕이 사라지고

성문이 눈에 묻힌다

아 손바닥들이 하얀 돌계단

조심 조심 짚고

돌 城 속에 몸 들이민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눈발 속에 덤불들이 사라지고

해송 머리칼들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욱이 바다가 사라진다.

종이 상자 껍질로 창 막은 교회 하나

하얀 어깨가 자란다.

솔솔 눈 뿌리는 소리.

 

멧새 한 마리 눈 앞에서

눈 털며 날아.

또 한 마리

눈 털며 따라 날아.

떠다니는 저 따뜻한 피들.

눈발이 굵어지고 새들이 사라지고

적막!

내 슬그머니 사라져도

저 눈 뿌리는 소리 들리겠지.

아 청결해라!

 

 

 

 

뺨에 금 채찍!

 

 

눈부셔

들판 가득

生金물결

 

사라지려는 꽃내음 하나 찾아 꽃집에 들어가

모든 냄새 놓치고 말 듯

금 물결 속을 걸으며

모든 빛을 놓친다.

금 이삭이 손등 쿡쿡 찌르고

바지 밑으로 들어와 종아리 찔러

시간이 금빛으로 졸아들고

당겼다 놓으면

금빛으로 출렁댄다.

논둑의 쑥부쟁이 한 무리가 출렁에 걸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바로 선다.

출렁 위로 나르는 되새떼

몇 놈은 정신없이 옆으로 튀었다가

되튕겨 돌아온다.

나도 한 번 마음 놓고 가로 튀어,

아 뺨에 금 채찍, 이 찬란함!

 

금 속을 마음껏 걸었으니

내 이제 더 무슨 가난을 탐하리오.

미뤄 둔 편지 오늘 모두 쓰리

오늘 밤에는

금의 꿈을 꿀 것이다.

 

 

 

 

제비꽃

 

 

오늘은 개일는지

학생들이 오르기 전

이슬 채 마르지 않은 언덕에 올라가

무심히 누웠다

하늘을 보다 아래를 보니

제비꽃 별처럼 수놓은 푸른 수틀 속에 내가 누워있었다

수틀이 마르며 내리는 빛발 속에

꽃송이 하나 하나가 산들대며 빛난다.

곧 사그라들 저 가혹하게 예쁜 놈들!

한 놈은 꽃잎 하나가 크고

또 한 놈은 꽃받침이 살짝 이지러졌다.

키도 제각기 달라

거의 땅에 붙어 있는 놈도 있다.

어느 누구도

옆 놈 모습 닮으려 애쓴 흔적 보이지 않는구나.

한참 들여다 보면

이슬방울인가 눈물방울인가 가진 놈

얼굴에 방울 띄우지 않고

가슴에 내려 녹이고 있을 뿐.

 

 

 

 

외계인 2

 

 

2.

차에서 내려 자물쇠를 연다

조용하다

하늘에 뜬 새도 없다

눈을 한번 감았다 조심히 떠도

이천평 농장 안이 온통 조용.

꽃다지도 피어 있고 민들레도 피어 있다.

저기 어린 왕자 복수초꽃은 숨어 있고

때 이른 씀바귀꽃은 조심히 열려있다.

세상이 온통 초록색과 노랑색, 그 색깔을 좇다가

쌍둥바람꽃 밑에 쉬고있는 도롱뇽을 만난다.

정말 오래간만,

너무 빨리 헤어지지 않기 위해

슬몃 슬몃 다가가 발로 그의 등을 밟는다.

인간의 것보다도 더 영리해 보이는 그의 눈.

점더 세게 밟아도 변치 않는다.

그 눈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도롱뇽 눈물?)

점점 커지다 그의 눈보다 커지다

나를 흐린다.

발을 들어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봄이 들끓는다.

꽃다지도 말을 하고 민들레도 속삭인다.

저기 어린 왕자 복수처꽃도 흥얼대고 있구나.

때 이른 씀바귀도 털들을 한 치 더 올리고 있다.

세상이 온통 색깔 만발,

짧은 비 오려는지 하늘이 살짝 찌푸렸는데

농장은 구석까지 환하다.

노랑나비 하나가 날아가고

또 한 마리 뒤따라가고

밑을 보니 도롱뇽이 자취를 감췄다.

 

 

 

 

내린천을 찾아서

 

 

창촌 양양간 56번 국도

아스팔트 포장 일보 전

강원도 내륙 지방은 흐리다 맑겠음.

낮 최고 기온 춘천 영하 8도 홍천 영하 9도

지형에 따라 눈보라도 치겠음.

 

내 마음의 줄을 한참 잡아다니면

마지막으로 끌려나올 지명의 한 가닥

시간이 아직 백줄기의 혓바닥으로 여울지기도

하릴없이 몇 달 얼어 있기도 하는 곳

내린천을 찾았다.

 

십 년 전 맨 몸으로 헤엄치고

맨 입으로 마신 강물

얼은 채 그냥 남아 있음.

십 년 전처럼 버스가

그림자처럼 강을 끼고 지나감.

 

발 밑에서는 십 년 전의 벌거벗은 나와

바위 밑 자갈 사이에

퉁가리 꺽지 돌마사 수수종애

벌거벗고 자고 있음.

발을 굴러도 깨어나는 기척 없음.

그 기척 없음을 찾아

짧은 겨울 날 다섯 시간을 달려왓음.

 

눈보라가 일었다.

불 붙이기 싫어

라면을 끓이지 않았다.

딱다구리 나무 쪼는 소리 이따금 울릴 뿐

마을에도 겨울엔 밥집이 없었다.

눈보라가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열자

찬란한 산들이 기척없이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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