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눈 문학과지성 시인선 193 |
담쟁이 꽃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느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죄 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 풀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꽃을 피우던가.
누군가에게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造花
아직 비석도 세우지 못한 네 무덤
꽂아놓은 조화는 아름답구나.
큰 비 온 다음날도, 불볕의 며칠도
조화는 쓰러지지 않고 웃고 있구나.
무심한 모습이 죽지 않아서 좋구나.
향기를 남기지 않아서 좋구나.
나는 이제 살아있는 꽃을 보면
가슴 아파진다.
며칠이면 시들어 떨어질 꽃의 눈매
가슴 아파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아프다.
남은 풍경
새 한 마리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작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나뭇가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직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풍경이 혼자서 어두워집니다.
해변의 바람
2.
잠이 오지 않는 바람이
밤의 한기에 떤다.
아무도 없는 이 해변에서
떠도는 너를 안는다.
한동안은 편히 살 수 있겠다.
참 멀리도 왔구나.
물새들 발소리도 지워지고
간간히 이름 부르는 소리도 그쳤다.
옷 벗고 바람이 되는 빈 몸.
3.
돌아갈 곳이 없는 시간을
다 버리기로 한다.
문득 눈을 뜬 이곳은 어딘가.
바람 속인가, 그대 속인가,
천천히 보이기 시작하는
길 잃은 바람의 아픔.
가을산
내가 옛날에 바람의 몸으로
세상을 종횡으로 누빌 때
높고 낮은 것도 가리지 않고
치고 안고 뒹굴고 다닐 때
산은 자꾸 내게서 눈을 돌렸지.
이제 들리지 않던 소리 새로 들리고
소리들 모여 사는 낮은 산에 싸여
한평생의 저녁은 이렇게 오던가
푸른 구름의 너그러운 나그네 말이 없고
그 백수의 풍경만 나를 채우네.
오, 가을 산에 모인 빛,
죽은 나뭇잎의 찬란한 색깔,
그 영혼의 색깔,
숨어살던 내 바람까지
오색의 춤판이 되어 돌아오네.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힌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폭설
무엇이 당신을 잠 못들게 하는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정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 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이 세상의 긴 강
1.
일찍 내린 저녁 산 그림자 걸어 나와
폭 넓은 저문 강을 덮기 시작하면
오래된 강물결 한결 가늘어지고
강의 이름도 굴절도 모두 희미해지는구나.
국적이 불분명한 강가에 자리 마련하고
자주 길을 잃는 내 최근을 불러모아
뒤척이는 물소리 들으며 밤을 지새면
국적이 불분명한 너와 나의 몸도
깊이 모를 이 강의 모든 물에 젖고
아, 사람들이 이렇게 물로 통해 있는 한
우리가 모두 고향사람인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무거운 밤 헤치고 새벽이 스며든다.
수만개로 반짝이는 눈부신 물의 눈,
강물들 서로 섞여서 몸과 몸을 비벼댄다.
아, 그 물빛, 어디선가 내 보았던 빛,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우리,
길 잃고도 쓰러지지않는 동행을 알겠구나.
2.
며칠 동안 혼자서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길고 여유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도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 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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