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떼들에게로의 망명-장석남

바다가는길 2006. 4. 5. 20:59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 시인선 112
장석남

 

 

들판이 나를 불러

 

 

바람에 흔들리러 집 나온

들꽃들을 보겠네

봄 들판이 나를 불러 그것들을 보여주네 갑자기 저,

노을을 헤쳐가는 새들

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네 숨가쁨이 삶이 아니라면

온 들판 저 노을이 새들을 끌고 내려와 덮인들

아름답겠나

 

봄은

참았던 말들 다 데려다 어디서 어디까지 웅얼대는 걸까

울컥

떠오르는 꽃 한송이가 온

세상 흔드는 것 보겠네

 

오래 서 있으면 뿌리가 아프고

어둠은 어느 새 내 뿌리 근처에 내려와 속닥거리고

내 발소리 어둠에 뒹굴다 별이

되면 거기

내 뿌리가 하얗게 글썽임에 젖고 있네

살아있는 것이 글썽임이 아니라면 온

하늘 별로 채워진들

아름답겠나 그렇게 봄

들판은 나를 불러 봄 들판이게 하고

 

 

 

 

눈보라

       -명동에서-

 

 

막 퍼붓는, 나를

특별시 명동 켄터키 후리아드 치킨집

처마 밑에 세우고

몰아치는 눈보라

한꺼번에 정신없이

명동을 두들겨

깊은 골짜기로 幻한다

 

목청이 제 몸보다

수천만 배가 큰

눈송이만한 새가

절 처마에 와서 목울대를

오르내리며 운다

 

울음이 명동을 다 덮지만

아무도 귀는 없다 아무도

 

휘황한 골짜기

 

 

 

 

저녁의 우울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청둥오리도 몇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덧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하겠다는 뜻일까

 

 

 

 

꽃 본 지 오래인 듯

 

 

가을 꽃을 봅니다

몇 포기 바람과 함께 하는 살림

바람과 나누는 말들에

귀 기울여

굳은 혀를 풀고요

그 철 늦은 흔들림에 소리 나는

아이 울음 듣고요

우리가 스무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한

우리가 맞는 갖은 설움

그건 것들에 손바닥 비비다보면요

얘야 가자 길이 멀다

西山이 내려와 어깨를 밉니다

그때 우리는 당나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타박 타박 길도 없이

가는 곳이 길이거니

꽃 본 지 오래인 듯 떠납니다

가을은 가구요

 

 

 

 

風笛 3

             -경포

 

 

바닷가에 가

바닷가에 놓아둔다

소나무숲은 마음속에 있다

 

어둔 시간이 와 있다

가슴에서 누군가 살림을 하고

작은 시냇가를 건너가는 나무다리

지나가면, 솎아냈던 슬픔들이 삐걱삐걱

알은체를 한다

 

나는 바닷가가 되어있고

소나무숲은 육신 가득 수런거린다.

 

 

 

 

風笛 6

           -한강변

 

 

몸의 길은 서풍을 따라서 흘러간다

 

골육상잔에 엉기어

저녁이면 늘 피멍이 가까운 하늘을 모두 덮어 나는

멀리 몸의 길 끝까지......나뭇잎 다 지도록

온 대지가 맑은 눈동자 속인 그곳으로

 

서풍에 휘어진 붉은 햇살들을 붙잡고

 

 

 

 

風笛 8

           -서포리

 

 

어디 고요한 곳에 가 누우면

살은 고요함이 다 불러가고

뼛속으로 들어간 내 눈은

고요한 바람을 적시리

 

고요함에 귀를 하나 더 달아주면

 

가슴은 귀에 다 들어가

하염없이 낮아지고,

낮아짐에 다 잦아들어버리고

 

 

 

 

 

風笛 9

             -소월로

 

 

창백한 시간들이 밀려

바람이 다 자고

나뭇잎들이 으습, 이빨 시린 표정들을 할 때

-------한낮인데

찬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눈이 깊은

바람은 자면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다

눈이 시다

세상엔

죽음만 눈이 부신 것이 아니라

 

 

 

 

風笛 10

 

 

그대에게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너무 길었구나

 

허공에 방을 들이고 앉았다가

진눈깨비처럼 쏟아진다

 

 

 

 

초저녁 '밥별'이라는 별

 

 

저녁때 밥을 먹습니다

저녁 때 된장에 마른 멸치를 찍어 먹습니다

자꾸 목이 막혀 찬물도 몇 모금씩 마십니다

좀더 어둡자 남쪽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그 별 오랫동안 쳐다보며 씹는 저녁밥

속으로 나는 그 별을 '밥별'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어느 틈엔가 그 별이 무척 신 얼굴로 진저리치며 빛납니다

눈에 어려 떨어질 듯

어느덧 그 별 내 들숨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떴습니다

누군가가 떠서 초저녁 저무는 마음을 내려다 봅니다

삶은 드렁칡, 삶은 드렁칡, 마음 엉키고

눈에 드렁칡처럼 얽히는 별의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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