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너무 잘 풀려도 이상하게 편치가 않아요. 뭔가 중요한 것을 빼먹어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여유시간이 생기면 도리어 불안하다고요. 바빠서 질식 직전이거나 일이 꼬여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열 받을 만한 일이네요.
하지만 전 이해해요. 태풍 전 고요의 적막감은 ‘도대체 얼마나 큰 파도가 오려고 이러는 것일까’하는
불안을 야기하죠. 잘 풀리는 기간은 잠시일 뿐, 내게 이런 행운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수수께끼 같은 망상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거에요.
‘새로운 메일 1통’이란 불이 반짝이면 즐거운 기대보다, 뭔가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질까봐 조마조마하죠? 헌 옷만 물려 입다가 소원하던 새 옷을
어쩌다 입었더니 도리어 불편하게 느껴지던 그 기분 말이에요. 그 이유는 이미 ‘불안에 중독’ 됐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이 전쟁이죠. 언제 어디서
어떤 짱돌이 날아와 내 머리통을 날려버릴지 알 수 없으니까요.
이 때 느껴지는 불안은 내 안의 ‘경보장치’에요. 내게 다가오는 위험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대응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에 벨을 울려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벨이 항상 울리고 있다면? 오분 대기조로 완전군장을 하고 막사에 대기하는 것은 며칠을
넘기기 힘들어요. 칼날 같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란 오래하기 어려우니까요. 곧 지쳐버려요. 그래도 계속된다면? 거지 같지만 적응을 해야지요.
인간은 바퀴벌레보다 더한 적응력의 존재라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이제는 원래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라 여기면 그만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그러고
나면 불안에 나를 맞추면서 내 삶의 리듬은 ‘업 템포’가 됩니다. 그래서 쉽게 지치고 피곤해져요.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전반적 기조로 자리 잡고 예민해져요.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더 큰 불안의 전조로 느껴지는 것이에요. 불안이 당연히 없어야
할 자리에도 불안한 이유는 불안이 자기 그림자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에요. 이런 불안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길은 없는 것일까요?
제 처방은 ‘근거 없는 낙관’입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어떻게 낙관을 할 수 있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거꾸로 근거가 없어야 진정한 낙관적 자세를 취할 수 있어요. 불안에 중독된 당신은 근거를 만들고 합리화를 통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 해요. 그러나 섣부른 근거는 높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까봐 다시 불안해지죠. 그러니 아예 근거
없이 그냥 낙관적으로 마음을 먹어 보는 거에요.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해도 잘 풀릴 것이라 여기는 것이지요. 이런 자세 말입니다. “인생 뭐
있어!” 갑자기 떨어진 일을 오늘 무리해서 한다고 누가 인정해주지도 않아요. 내일 일은 내일, 오늘 일도 가끔은 내일 하는 ‘무대뽀’ 정신도
필요해요. 항상 불안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심히 개미같이 살아오던 당신에겐 황당한 처방같이 들릴 거에요. 그렇지만 근거 없고 대책 없는
베짱이 같은 낙관이야말로 만성적 불안에 찌들어버린 당신의 몸과 마음의 방향을 되돌릴 브레이크가 되어줄 것이라 저는 믿어요. 무슨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하냐고요? 또, 또 근거 찾는다. 그런 것 없다니까요.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근거없는 낙관'이라...완전공감! 잊지말고 정신의 비타민으로 챙겨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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