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중에서
귀 기울여 보면 산깃동잠자리 휘 날아올랐다가 삭정이 끝에 고쳐 앉는 소리, 산굴뚝나비 날개 펄럭이는 소리, 민달팽이 물돌 기어넘는 소리, 재넘이바람이 은사시나무 이파리 팔만 사천 장을 한꺼번에 넘기는 소리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산의 바탕은 적막과 고요이다. 낯선 사람끼리는 혀로 말하고 귀로 듣지만, 아는 사람들은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고, 통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듣는다. 산도 저이도 ‘아무 말’ 없이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무서운 일인가. 산과 시인이 구분되지 않는다.
-시인 반칠환
동아일보 & donga.com에서
아름다운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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