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제주로...
일상이 지지부진할 때, 어디론가 박차고 떠나고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누구는 공항을 간다고 했던가.
짐가방을 끌고 분주히 오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세계 곳곳의 행선지가 반짝 반짝 불을 밝히고 있는 보드판을 보고 있다 보면, 몸은 비록 여기 묶여 있어도 마음만은 그 보드판 위의 도시들로 어느 결엔가 떠난다든가...
오랜만에 와 보는 공항에서 문득 그 얘기가 떠올랐다. '나쁘지않은 아이디어야.......'.
낡은 짐가방 바퀴 덜덜거리며 끌고 대합실에 들어서서 분주히 어디론가로 떠나려는 사람들 속에 섞이니, 아, 벌써 조금쯤 자유로운 기분, 발목에 묶인 끈이 느슨해진 기분.
짐가방은 화물로 부치고 손가방 하나 메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 밖을 본다.
넓은 활주로 위 비행기들은 가만 보니 공룡들 같다.
군데군데 가만히 서있거나, 활주로 위를 어슬렁 어슬렁, 천천히 움직여가는 덩치 큰 녀석들...
그렇게 광활한 비행장을 어슬렁거리다 간혹은 익룡처럼 날아오른다.
비록 날개를 퍼덕이지는 않아도 단단하고 커다랗고 무거운 몸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건 언제나 공룡을 보는 것 만큼이나 신기하다.
고래 뱃속에 든 요나인냥 우리는 그 거대한 강철 공룡의 뱃속에 든 채 하늘을 날아 움직인다.
비행기 날개 옆으로 구름이 흐른다.
비행기 날개 밑으로 구름이 깔린다.
이 높이, 이 구름들 옆, 왠지 익숙해, 왠지 친숙해...비행기 창에 코를 박고 하늘을 내다봤다.
언젠가 과학이 더 발전하고 재료가 개발되면 비행기 상단 반쯤을 투명하게 만들수있지도 않을까.
그러면 지금처럼 코딱지만한 창으로 하늘을 보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뺄 필요없이 편안히 앉아 구름에 든 듯, 하늘에 뜬 듯 움직일 것이고, 야간비행을 할 때면 총총한 별을 머리에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낢. 무거운 육체를 갖고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해 자력으론 단 1cm도 땅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 그렇게 하늘 한 가운데를 날아 지남이, 공중에 붕 뜸이 매번 황홀하구나.
비행기에서 보는 한라산.
하루.
1.김영갑 사진갤러리 두모악.
두모악 갤러리는 제주도 남쪽 표선과 성산 사이 삼달리라는 곳에 있다.
관광지로서 꽤 자리를 잡았는지 공항에서 들고 온 지도에도 표시가 돼있었다.
두모악 갤러리는 생각 외로 찾아오는 사람도 꽤 있고, 초등학교 터에 제주도 돌로 정원도 잘 가꾸고, 전시실도 소박하고 따뜻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작가의 작업실도 보존해 전시해 놓아 생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아, 여기서 이렇게 작업했구나...
그의 죽은 육신은 뒤란 감나무 밑에 뿌려졌다는데 굳이 거길 찾아가보진 않았다. 아마 죽은 뒤에 그의 영혼은 자기의 갤러리를 찾아주는 사람들, 자기의 작품을 봐주는사람들을 지켜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그 언저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아...
갤러리 가는 길, 파밭 한가운데에 무덤이 들어서있다. 제주도엔 이렇게 밭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갤러리 내부. 작품 밑에 제주도 돌을 깔고, 또 나무로 조각된 작품들을 군데군데 비치해 따뜻한 느낌.
도록에서 살짝 찍어 온 그의 작품. 전시실 안에 탁자와 의자가 있고 도록이 비치돼있어 관람도중 쉬면서 그의 작품집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2.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축구장이 두, 세개는 들어설 넓이에 주황벌판을 이룬 귤껍질을 말리고 있는 농장.
열려진 정문에 지키는 사람 아무도 없길래 무작정 밭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아까 버스를 타고 지날 땐 차도 근처까지 꽉 차있더니 햇빛이 물러나는 시간이라 귤껍질을 거둬들이는지 검은 망만 깔린 곳이 많고, 저 멀리 해안가에 부지런히 망을 끌어내며 사람들이 일에 열중해 있다.
내가 신기해하며, 아름다워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그 곳, 그들에겐 노동의 장이다.
한들한들 거리며 이리저리 사진의 구도를 살피며 향그러운 귤향기에 감탄하는 그 곳, 그들에겐 피땀을 흘려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이다. 그 귤껍질을 펴서 말리고 저녁이면 다시 거둬들이고, 다음 날 또 펴고 할 그들에게 햇빛을 닮은 주황빛은 아름다움은 커녕 지겨운 일거리 그 자체일 것이다.
할 수없지...
또 한 수 접히는 마음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사진 몇 장 찍고 빠져 나왔다.
또 하루.
표선 해수욕장.
물 빠져나간 너른 백사장에 하얀 새 한마리 저멀리 물이 드는 어귀에 홀로 서서 한참 바다를 바라보다 날아갔다.
물이 방금 빠져나갔는지 무심코 들어선 백사장에 발이 푹 빠진다.
내 발자국을 푹푹 각인시키며 걸어보는 모래밭에 자세히 보니 바닷물이 그림을 그려놓았다.
모래 위에 남은 물무늬가 산수화다.
해변에 들고나는 바다는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놓았구나.
썰물이라 바다가 저만치 멀리 물러나있다. 표선해수욕장은 물이 차도 수심이 낮아 아무리 바다쪽으로 걸어들어가도 물이 허리까지밖에 안찼던 기억이 난다.
파도가 그린 그림.
전에 왔었을 땐 해수욕장만 보고 갔었는데, 길을 이어가보니 작은 선착장 지나 검은 돌밭 너머로 또 너른 바다가 펼쳐져있다. 그 바다 위로 하늘! 하늘 위에 구름!
여기 사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도 특별히 눈 줄 것 없는 풍경이겠지만 빽백한 건물에 시야가 잘릴대로 잘리는 도시에 있던 나에게 이렇게 위 반구가 다 드러난 광활한 공간, 바다와 하늘은 그저 감탄이다.
바닷물 빠져나간 돌 틈에 샘물처럼 같힌 물 웅덩이에 사는 조개며 가재며 구경하면서, 파도가 치고 해가 기울면서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모양이 변해가는 높은 구름 바라보며, 바닷 바람 마시며 검은 돌 틈에 한참 앉아 있었다.
제주도 바닷가 곳곳엔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낚시대를 드리운 사람들.
길을 떠나는 철새들.
비천구름.
비천구름 속을 지는 해에 반짝, 별처럼 빛나며 비행기들이 난다.
또 하루.
여기 바다를 보러 왔으니 싫도록, 질리도록 보고 가야지.
오늘도 집 앞 바닷가에 나갔다.
오늘은 흐림. 바다 위로 구름 고루 깔렸고, 바닷빛은 청회색이다. 가끔 틈이 생긴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에 바다가 잠깐 하얘진다.
맑은 날 눈부신 푸르름도 좋지만 흐린 날 무채색 같은 약간 어두운 바다도 얼굴 고요해서 좋다.
멀리 보이는 섬은 남원 앞바다의 지귀도.
남원 큰엉 해안가 산책로 옆에 길가에서 잘 안보이게 숨어있던 동백밭, 제주는 겨울도 풍성하다.
또 하루
위미, 세현동? 동백나무 군락지를 가보았다.
동백나무 숲이 있을 줄 알았더니, 아마 예전엔 숲이었을지 모르겠는데 숲을 개간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아서인지 지금은 동백나무들이 집의 혹은 밀감밭의 담장이 돼 있었다.
수령이 얼마나 된 나무들일까, 키가 7,8m는 되어보이게 거대한 동백나무들.
나무를 보지않아도, 땅만 봐도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들, 피처럼 선명히 붉은 홍동백, 분홍빛의 겹동백꽃들이 거기가 동백나무밑임을 알려준다.
나무 숲 속에서 모습은 보이지않고 재잘대는 목소리로만 있던 녀석들, '동박새'라는 걸 처음 보았다.
정말로 동백나무에 앉아 동백꽃 속에 부리를 밀어넣고 있는 녀석들, 박새보다도 더 작다. 꽃송이보다 아주 조금 큰 작은 새들.
기척을 감추고 사진을 찍어보려했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녀석들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제주를 떠나기 전 녀석들을 다시 만나 간직할 수 있을지...
위미마을, 허리 높이 조금 위까지 쌓인 돌담, 담 안으로 집집마다 동백나무, 혹은 열매가 큰, 열매때문에 가지가 휘어져 담장 밖으로 나와 열매가 땅에 끌리기도 하는, 유자인가? 이름 모를 노란 열매 주렁주렁 단 나무들 예쁘게 장식돼있는, 안으로 낮은 담장, 낮은 나무 탓에 집 안 사정이 다 보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 낯선 사람이 골목을 어슬렁대도 개도 짖지 않는 마을.
한 시간 남짓을 어슬렁대는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구나. 낮시간이라 다들 일터로 간 모양.
집집마다 이렇게 열매 가득 단 나무들이 정원수를 대신한다.
어느 집 담장 너머로 흐드러지게 맺혀있던 이름 모를 열매.
키가 7,8m는 될 동백나무 군락.
구비구비 이어진 호젓한 돌담길이 텅 비었다.
또 하루.
제주에도 눈.
하늘은 맑아 햇빛이 비추는데도 햇빛 속을 이리저리 눈발이 몰려다닌다.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 눈은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한다. 바다쪽에서 몰려오는가 하면 다시 바다쪽으로 몰려가고, 눈송이 몇이 이리로 가면 또 다른 몇은 저리로, 혹은 위로, 혹은 아래로...
한라산은 구름을 모아들여 제 모습을 감추고도 제 몸의 두 세배는 넘을 큰 구름을 휘어감았다.
거대한 구름산이 산 대신 서있다.
파란 하늘에서 내리는 눈, 위에 구름도 없는데 어디서 오는 거지?
한라산에 퍼붓고 있을 눈발이 센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
역시 제주라 갈팡잘팡하는 눈발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땅에 내리진 못했다.
무척 추워졌다는 날씨. 창문을 열면 바람 제법 차도 오히려 큰 숨 쉬어 속을 헹구고 싶은 상쾌한 온도일 뿐.
또 하루.
어젯 밤 새 한라산엔 눈이 퍼부었나보다. 베란다에서 내다보니 정상 부근뿐 아니라 옆구리 등선까지 온통 하얘졌다. 어제는 구름에 뒤덮여 모습조차 사라져 있더니 오늘은 커다란 뭉게구름 한덩이로 공중에 떠있다.
서귀포에서 보이는 한라산.
중문에 다녀왔다. 제주도가 제대로 바람 맛을 보여준다.
컨벤션 센터 가는 다리 위, 몸이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날려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바람.
긴 다리 위에 서서 항구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나와 씨름 한 판 하고자 청하는 바람에 대항해 가끔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면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있어야했다.
머리칼을 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내 온 몸으로 대응해야 하는 중량감의 바람.
바람이 나랑 놀자는 거 같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지적했듯 내가 만난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바다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는 동안, 뭐 또 좋은 거, 내가 훔쳐갈 풍경 없을까, 뭔가 사진꺼리 없을까 찾는 동안 막상 실물의 바다를 놓치는 건 아닌지...
컨벤션센터 옆, 주상절리 '지삿개'
컨벤션센터에서 보이는 중문해수욕장. 하얀 건물은 하이야트 호텔.
컨벤션센터 옆, 갈대 무성한 산책로.
바람에 맞서며 다리에 서서 찍은 항구 풍경.
무슨 요새같은 유적지, 뭔지 잘 모르겠다.
또 하루.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터미널에서 내려 무작정 바다쪽으로 길을 잡아, 시골 미술관이니 고가의 진품을 소장하기 어렵고 아마 복사본들이 전시돼있지 않을까, 별볼일 없을지도 모르는데...하면서 길 가 표지판을 살피며 가다보니 이중섭미술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든다.
길을 따라 들어서니 우선 만난 건 아기자기한 정원. 고산지대 논밭처럼 계단식으로, 한 계단마다 하나씩 몇 개의 자그마한 정원들이 중첩돼있다.
역시 제주는 겨울에도 풍성해서 커다란 밀감나무, 보통 밀감나무와 달리 몇 십년 묶은 감나무만큼이나 키가 큰 나무는 마치 감 맺듯 노란 귤들을 잔뜩 달고 서있고, 높낮이가 다른 정원들을 미로처럼 가로막고 또 열어주고 있는 검은 돌담 위로 콩넝쿨이 보랏빛 꽃을 피웠고, 한 곳엔 배추며 상추가 자라고, 정원 구석 돌 옆에 심은 수선화는 얼굴 비추어 볼 샘물 없이도 예쁜 꽃을 피웠다.
그렇게 어슬렁 어슬렁 정원 구경을 하며 걸어들어가다 보면 초가지붕을 얹은, 예전 이중섭이 살았다는 집이 마당 정갈히 있고, 그 위 고갯길 꼭대기에 미술관이 서있다.
다 복사본이겠거니 하고 들어 선 전시실, 대부분 기증 받은 작품들.
소품들인데 오히려 전시회에서도 본 적없는 처음 보는 작품들이다. 주로 현대화랑 박명자씨나 가나의 이호재씨가 기증한 것들.
이중섭 스타일 이전의 서귀포 앞 바다를 그린 유화작품도 있고, 어두컴컴한 박명에 두 사람이 서 있는, 추운 느낌의 그림에 '희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도 인상 깊고, 게와 아이를 그린 그림, 혹은 수첩 한 장에, 혹은 엽서에 펜화처럼 간결하게 스케치된 사슴이나 매화도 작지만 완성도가 있는 새로 보는 그림이었다. 그 밖에 은지화 몇 점과 자화상, 입꼬리는 올라가 웃고있는 듯 보여도 삶의 고단함을 감추지 못하는 슬픈 눈빛의 자화상과, 부인과 주고 받았던, 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친필 서신들...
지금 생각해보니 작품 수 몇 개 안되는 조촐한 규모였는데 처음 보는 작품들을 만나서인가, 한 번 가보길 잘했다는 생각.
이층엔 기증받은, 이중섭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도상봉, 이성자, 박래현, 권옥연, 문학진, 이상범, 장우성, 변관식 등의 작품들이 전시돼있고, 옥상에 올라가면 이중섭이 매일 보았을 그 바다가, 그 섬, 섶섬이 떠있는 그 바다가 보였다.
그가 그린 그림 속에선 옹기종기 초가집 지붕이 이어져있던 곳, 지금은 빼곡히 시멘트 건물들이 들어서 바다를 약간 가리고 있는 게 다를 뿐.
미술관 정원의 밀감나무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집과 그 너머 미술관 모습.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 본 앞바다. 바다 위 보이는 섬이 섶섬이다.
'섶섬이 있는 풍경'
'게와 아이'
또 하루.
제주에 삼일 째 비가 내리고 있다. 비오는 해안가 산책로는 인적없이 텅 비었다.
새들은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분주히 수풀 사이를, 혹은 바다 위를 날았다.
비 내리는 바다는 멀리 수평선에 안개의 흰 띠를 두른 채 먹먹하다, 망망하다.
텅 빈 산책로처럼 텅 빈 바다.
작은 어선들은 아마 항구에 발이 묶였을 것이고, 뭐하는 배인지 모를 증기선 같은 큰 배 하나만 바다 한가운데 떠있다.
언제 또 이런 바다를, 비오는 바다를 볼 수 있으랴...마음을 기울여 그 막막한 바다를 가슴에 담으려 애썼다.
비오는 남원 큰엉해안가 풍경.
또 하루.
중문. 여미지 식물원.
오늘, 가는 비 오다가 그친 후 내내 하늘은 흐린 채로였다. 비 온 후의 촉촉한 대기, 상큼한 온도.
중문 관광단지 안의 키 큰 야자수 도열한 아스팔트 길은 비에 촉촉히 젖은 채 말끔한 얼굴이었다.
잘 닦여진 길, 근사한 호텔들 즐비한, 남루한 구석 어디에도 없는 거리.
삶의 행복이 물질적 부에 있지 않다고 하지만, 물질적 여유, 풍요로움은 사실 얼마나 편리하고 안락하고 기분좋은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하고 생각했다.
나이 드니 따뜻하고 여유롭고 풍요로운 풍경이 좋다.
여기 제주는 1월 한겨울에도 곳곳이 열매며 꽃이다. 제주에 온지 꽤 됐는데도 길가에 흔전만전 흐드러진 동백, 담장 너머로 가지가 휘어지게 열매 달고있는 귤나무들, 볼 때마다 감동이다.
식물원 온실 정원의 열대과일들이며 꽃들은 온실안이니 그렇다쳐도, 실외의 정원에도 곳곳에 꽃이 만발하다. 하다못해 길 가 잡초도 이름 모를 꽃들 피우고, 싸리울타리에도 애기 손톱보다도 작은, 정말 코딱지만한 하얀 꽃이 별처럼, 성긴 눈발처럼 가는 가지 위에 얹혔다.
예전엔 몰랐는데, 한겨울에도 꽃이 피어나도록, 열매가 익도록 허락하는 이런 너그러운 대기가 참 좋구나.
여미지식물원은 온실 내부에 '열대식물원', '열대과수원' '수경식물원' '선인장원'등 주제별로 흔히 보기 힘든 식물들을 볼 수 있어 좋았을 뿐더러 외부엔 호젓한 산책로를 빙 둘러 여러 나라 스타일의 정원이 특색있게 꾸며져있어 둘러보는데 재미도 있고 시간도 꽤 걸렸다.
그 밖에 중문관광단지 안에는 여미지 식물원외에도 '테디베어 박물관', '소리박물관' '아프리카박물관' 등이 있어 꽤 볼거리가 많은 데다가 , 롯데, 하이야트, 신라호텔등이 정원을 개방하여 잘 꾸며진 정원과 산책로를 구경하는 것도 좋고, 해변까지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시간이 모자란 느낌.
일본정원.
잔디공원. 옆의 길을 빙 둘러, 한국정원, 일본정원, 영국정원, 이태리정원들이 둘러서있다.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은 길.
잔디공원의 노동백이 붉은 꽃을 뚝뚝 떨구고있다. 처연한 꽃송이들.
영국식정원.
비 그친 후 생긴 물웅덩이는 하나의 캔버스.
식물원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 천제연폭포 다리가 보인다.
식물원 온실 정경.
바나나가 이런 식으로 열리는지 처음 알았네, 열매 끝에 연꽃 봉오리같은 게 달린 게 신기해서 한 컷.
또 하루.
성산.
전날, 중문 다리 위에서 만난 그 바람이 다시 성산에 분다. 칼바람이 심장을 에인다.
일출봉을 오르거나 우도엘 가 볼 예정이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 유람선을 타보기로 했다. 유람선을 타면 바람을 피해 실내에서 편하게 바다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배를 타는 순간 그 계산은 빗나가고 말았다. 나 때문에...
코 앞에 바다를 두고 도저히 실내에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세찬 바람에 출렁이는 뱃전으로 파도의 흰 포말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도 바람을 이기려 온 힘을 다하며 배를 쫓아오고, 두서없이 휘날리는 머리칼은 어떻게해도 수습이 안되고, 옷 밖으로 드러난 손, 얼굴이 금세 꽁꽁 얼고...
하지만 뱃전에 서서, 기둥을 잡고도 바람에 휘청이며 나를 감싸고 출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 있자니, 구름 많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과 그 햇살 받아 은빛이 되는 바다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 파도와 손 내밀면 손등에라도 내려와 앉을 듯 가까이 나는 갈매기와 추위를 무릅쓰고 큰 맘 먹고 가슴 펴고 들이쉬는 숨 한 가득 들어오는 바다 냄새에 저절로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람선 선장은 우도와 일출봉을 돌며, '왼편을 보시면..' '오른편을 보시면..'하고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하나도 듣질 못했다. 바다 보는데 넋을 잃고 있느라.
한 시간이라는 유람시간 후딱 지나가고, 비로서 바다를 진짜로 만났다는 기분.
성산항 등대.
유람선에서 보는 성산 일출봉.
유람선에서 보는 우도.
갈매기가 배를 쫓으며 난다.
일출봉의 뾰족봉우리들.
또 하루.
중문해수욕장 바다, 오래 못 만난 지인을 만나듯 반갑고 다정해...
오늘도 구름많은 하늘, 그 하늘 아래 바다는 옥빛이다. 바람도 잦아들어 고요한 바다가 조용히 해변으로 들었다 났다를 반복한다. 파도가 들고나며 모래를 쓸어올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부드러워...
좌로도 우로도 시선 가리는 것 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가 마음을 쉬게 한다.
하이야트에서 연결된 길로 해변으로 내려왔다가 신라호텔로 연결된 계단으로 다시 올라갔다. 신라호텔은 바다 쪽 너른 정원이 예전 내 기억보다 더 잘 가꿔져있구나. 구비구비한 산책로에 잎 무성한 야자수며 소철이 호위하듯 서있고, 꽃 만발한 동백동산도 꾸며져있고, 잉어가 놀던 연못도 더 예뻐진 것 같고...
함부로 자란 게 아닌, 조경 잘 된 정원, 지중해 풍의 깔끔한 건물들, 쾌적한 분위기, 다시 한 번 물질적 부로 누릴 수 있는 안락함, 풍요로움이 적은 게 아니라는 생각.
또 하루.
우도.
모처럼 바람이 잦아들어 대기 고요하다.
지난 번 몰아치는 바람에 포기했던 우도행 다시 감행.
아슬아슬 배 한 대 놓치고, 한 시간 후인 다음 배를 기다리며 성산항 방파제에 올라섰다.
방파제 밑에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낚시대가 줄을 드리우고 있고, 어디선가 휘익, 휘익 새소리가 난다.
자세히 보니 오랜만에 조용해진 바다에 나온 해녀들이 물 위로 올라와 내는 소리다.
오리발을 보이며 물 속으로 들어가 한참만에야 올라와 숨을 고르는 소리. 아니면 서로 떨어져있는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신호이기도 한 걸까, 음조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소리는 덤불 속을 늘 바삐 돌아다니던 새소리처럼 청아하지만 휘파람 소리가 잦으면 그만큼 숨이 많이 차다는 얘기 같아서 왠지 안쓰럽기도 하다.
우도에 가서도 막배를 타고 나오느라 잠깐 시간 남는 틈에 해변을 따라 조금 걷는데, 거기 해안 검은 돌틈에서도 해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네시가 좀 넘으니 하나, 둘 작업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오는데, 다들 아주머니도 넘어선 할머니 연배. 어망엔, 그 정도면 많이 잡힌 걸까, 아니면 적게 잡힌 걸까, 멍게 한 스무 개 남짓...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무거운 어구들을 짊어지고 타박타박 작은,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항구쪽으로 간다.
'삶이 그렇게 고단하구나' 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일까. 동료들과 말 나누는 목소리에 그 힘든 노동 후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친다. 목소리가 쩌렁쩌렁들하다.
우도는 몇 년 만인가, 거의 10년만인 것 같은데, 전에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난개발 되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여서 좋기도 하지만 그 동네 주민들 10년간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을 걸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우도를 한 시간 반 동안 도는 관광버스를 타봤다. 전에 왔을 때 갔었던 북쪽 언덕 위, 그 언덕 위 등대쪽 언덕을 올라갈 수 있었다. 아래는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었던 경안동굴인가 하는 동굴이 있는, 물빛 에메랄드색인 작은 해변이 절벽 밑에 있고...
등대가 있는 언덕 위에 오르면 한 바퀴 빙그르르...360도로 다 바다가 보이는, 아, 여기가 섬이구나, 하는 걸 눈으로 볼 수 있는 전망이 있다. 구름 낀 회색 바다 위에 작은 배들이 점점이 붙어있고.
바람 없는 날. 날씨도 너무 포근해 어디든 돌아다니기 너무 좋은 상태라 언덕 꼭대기에서 맞는 바람도 겨울 바람답지 않게 상쾌했을 뿐.
그리고 다시 섬을 구비구비 돌아 산호사 해수욕장. '홍적단괴'라든가 하는 어려운 이름을 새로 달았다. 거기 물빛도 여전히 투명하고 맑고...
우도는 배 늘 드나드는 항구의 물빛조차 옛날 동강 건너다 본 물처럼 수미터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게 맑다. 그렇게 물 맑게 남아있으니 개발이 안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바다는 땅에서 보는 바다든, 배 위에서 보는 바다든 왜 그렇게 마음을 아득하게 하지?
햇빛 뚫고 나올 틈도 없는 구름 밑 회청색 바다를 아득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길 잡아 오래 좀 있을 걸, 게으름 부리다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으로 훑고 온 게 또 후회되는구나.
동굴 앞 해변. 물빛이 에메랄드색, 예술이다.
등대로 오르는 언덕길에서 보이는 우도 전경.
산호사 해수욕장, 여기 물빛도 예술.
또 하루.
1100도로.
한라산에 가보려고 돌아가려던 비행기 예약 미루고, 한라산을 오를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어 혹시 한라산을 못가더라도 그 발치라도 가보자하는 생각에 제주에서 중문까지 1100도로를 탔다.
산길로 들어선지 오래지않아 귀가 먹먹해지더니 숲이 희끗희끗해진다.
제법 겨울 티를 내던 숲은 1100고지를 정점으로 금방 눈이 자취를 감춘다.
어리목을 지나고 영실 매표소를 지나고... 정류장엔 등반을 끝내고 버스를 기다리는 등반객들 몇 서있다.
내일 나도 꼭 와야지...막상 어리목, 영실, 낯익은 풍경보니 다져지는 마음.
제주에서 중문오니 4시 10분쯤. 집에 가기 시간이 일러 다시 중문 해수욕장행.
하이야트로 들어섰는데, 늘 가던 왼쪽 길, 해수욕장으로 이어진 길 말고, 해가 지는 오른 쪽 길이 궁금해져 그리고 가봤다.
처음 가보는 산책로, 그 길은 또 돌계단 밑으로 또다른 작은 해변으로 이어져있다.
전에도 그리로 길이 있었던가? 처음 만나는 해가 지는 절벽.
숨겨져있던 아름다움, 사진 몇 장으로 간직.
그리고 다시 내려간 중문 해수욕장. 바람도 없는 포근한 바다가 누워있다.
내 발치로 강아지처럼 달려드는 파도를, 그 파도가 일어나오는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이제 또 언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오랜 작별인사를 했다. 어김없이 절벽 뒤로 붉은 해가 지고...
하이야트호텔 오른 편 산책로에서 만난 석양.
중문해수욕장에서. 동그란 해 옆의 한 점 구름이 예뻐서.
또 하루.
한라산.
드디어 다녀왔다. 안 갔으면 어쩔 뻔 했나. 너무 아름다웠던 산.
제주터미널에서 11시 버스를 타고 영실에서 내려 12시경부터 산행시작.
안 와봤으면 어쩔 뻔 했나. 눈 쌓인 겨울 산 올 겨울 들어 처음이라 너무 반가운데,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탄성이 나오는 절경의 연속이다.
가파른 골로 흐르던 물은 얼음 폭포로 굳어져있고, 우거진 숲 사이로 냇물 소리 맑다.
영실은 등산로 입구 자체가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 터라 얼마 오르지 않아 벌써 구름에 너무 가까워졌다.
바람에 연기처럼 흩날리며 머리 위를 나는 구름, 손을 내밀면 손가락 사이에 걸릴 것만 같아.
낮은 관목들이 펼쳐진 산길, 바람 거칠게 없이 세게 몰아쳐, 찬 아이스크림 급히 먹었을 때처럼 머리까지 아파오는데, 눈 쌓인, 가끔 녹다 얼어 빙판이기도 한 좁은 산길 한라산 산신께서 보살펴주길 기원하며 조심조심 오르는 길에 순간 순간 구름이 가렸다가 펼쳐놓는 산의 모습, 그 장엄한 풍경에 와, 와, 마음이 그 탄성을 참지못하고 입 밖으로 털어내고 만다.
병풍처럼 둘러 선 바위 산 저 너머로 구름 군단이 몰려와 넓은 평원을 이루고 바람에 쓸리는 실구름들은 그 구름밭을 감췄다가 보여줬다가하며 마술을 부렸다. 내 발 밑으로 휘도는 구름이 계곡 속으로 빨려들고...
사람들 모두 산이 주는 그 광경에 감탄을 멈추지 못하고 추위에 빨개진 볼로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져, 오르고 내리는 산길 내내 계속 모르는 사람끼리도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인사를 나누며 얼굴에 웃음 떠나지 않았다.
능선에 올라서, 아마도 예전 오백나한상이 보이던 그곳, 구름에 싸여 세상이 다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길을 표시하며 양쪽으로 도열한 막대와 깃발만 있는 곳, 앞서가던 사람이 어느 결엔가 순식산에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나도 뒷사람으로 부터 사라져, 빙 둘러봐도 천지사방이 그저 아무 것도 없이 희게 텅 비어지는 곳, '別有天地 非人間', 사람 세상이 아닌 그곳에서 사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한참을 서있었다.
버스 막차 시간을 맞추려 부랴부랴 오르고 내리는 산길, 산은 내게 너무나 많은 선물을 주고, 웃음을 주고, 그 아름다움으로 힘을 주고...
산 오르는 내내 산만 보며 자주 세상을 잊었다.
세상이 다 지워진 세상.
시시각각 구름이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새모양의 바위. 까마귀가 자주 날아와 앉아 쉬더라.
돌아감.
하늘에서 해 지는 걸 보고싶어 석양에 맞춰 비행기를 타보려했는데 자리가 없어 6시 비행기를 탔다.
벌써 해는 지고 날이 어두워 저 밑 세상이 별 밭이 되었다.
땅에 뿌려진 불빛들 보니 사람 세상의 맥락이 핏줄처럼 드러난다.
인간세상도 이렇게 보니 별이네.
그리고 그 밖에...
초생달
샛별
해.
숙소에서...
그리고 그 밖에...
매일 매일 다르던 큰엉해안가의 해지는 풍경.
바다를 보러 제주에 갔고, 그만하면 실컷 본 듯도 한데, 돌아와보니 여전히 모자르다.
하지만 '여행의 기술'에서 말했듯, 내가 만난 수많은 풍경들, 재생의 힘을 지닌 자연의 풍경들, 시간의 점이 되었던 그 순간들은 역시 내 마음 속에서도 시시로 때때로 떠올라 나를 살릴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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