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마주친 것들

오늘의 시

바다가는길 2008. 4. 5. 19:36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1936년)

 

-아마도 시인은 꽃이 핀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꽃잎이 둥글게 열리는 것과 꽃의 둘레를 달무리처럼 둥글게 감싸는 향기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둥근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죽은 사람의 몸이 놓이게 되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묘혈인데, 그처럼 오목하게 파인 곳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이 시는 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문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밝게 만개한 꽃과 비산하는 꽃 향기의 반대편에 차디찬 주검과 서늘한 묘혈을 배치하고 있다. 열린 공중과 유폐된 땅 속, 두 공간은 서로 차단되어 멀리 떨어져 있다. 시인은 이 이격된 거리를 가파르고 낙차가 큰 절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에도 병이 든 육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황폐한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문태준

 

4월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시인이 추천하는 애송시 100편'중 문태준 시인이 추천한 74편째 시.

그런데 제목이 '절벽'이다. '절벽'이라니...'절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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