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Pi-Yann Martel

바다가는길 2013. 1. 11. 00:39

파이 이야기얀 마텔 저/공경희| 작가정신

 

 

   ......여러 가지 하늘이 있었다. 바닥은 평평하지만 윗부분은 둥글고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흰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잿빛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숨 막히게 자욱하지만 비는 올 것 같지 않은 하늘도 있었다. 얇게 내려앉은 하늘. 작고 흰 양털 같은 구름이 피어오른 하늘. 솜 덩어리를 늘어놓은 것 같은 얇은 구름이 높게 끼기도 했다. 형태 없이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하늘도 있었다. 짙고 거센 비를 머금은 구름이 지나만 갈 뿐 비는 뿌리지 않는 하늘. 모래톱처럼 생긴 작고 평평한 구름으로 자욱한 하늘. 수평선에 걸쳐진 덩어리로만 보이는 하늘. 태양빛이 바다에 밀려들면,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확연히 드러났다. 하늘은 내리는 빗줄기로 된 머나먼 장막이었다. 하늘은 층층이 있는 구름이었다. 어떤 것은 짙고, 뿌옇고, 또 연기 같았다. 하늘은 검은색이었고, 내 웃는 얼굴에 빗줄기를 뿌렸다. 하늘은 떨어지는 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러 가지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바다는 비밀을 털어놓는 친구처럼 귀에 속삭였다. 바다는 호주머니에 든 동전처럼 쨍그랑댔다. 바다는 산사태가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포로 나무를 문지르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람이 토하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죽은 듯 고요했다.

   그 둘 사이에, 하늘과 바다 사이에 온갖 바람이 있었다.

   또 온갖 밤과 온갖 달이 있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군중 같은 태양에 시달린다. 군중이 시끄럽게 밀려들면 당신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싶고, 숨고 싶다. 외로움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달에 당신은 시달린다. 당신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눈을 크게 뜬다. 고개를 들면, 때로 태양의 폭풍 중심에서, 고요의 바다 한가운데서 누군가 당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점에 갇혀서, 두려움과 분노, 광기, 무력감, 냉담으로 발버둥치고 있을까.

   조난자가 되는 것은 우울하고 지친, 상반된 것들 속에 붙잡힌 것과 같다. 환할 때는 트인 바다가 눈멀게 하고 두렵게 한다. 어두울 때는 어둠이 폐소공포증을 일으킨다. 낮에는 더워서 시원하기를 바라며, 아이스크림을 꿈꾸면서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싶어진다. 밤이며 추워서 따스해지기를 바라며 뜨거운 카레를 꿈꾸고, 담요로 몸을 감싸고 싶어진다. 더울 때는 살이 타들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싶어진다. 비가 내리면, 거의 익사 상태가 되면서 물기 없는 곳에 있고 싶어진다. 바다가 잔잔해서 움직임이 없을 때면 바다가 움직이기를 바란다. 바다가 일어나서 나를 에워싼 원이 집채만 한 파도에 부서질 듯하면, 거센 바다가 주는 고초를 당해야 한다. 숨이 막힐 지경이 되면, 당신은 바다가 다시 잔잔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 순간, 상황은 그 반대로 흘러간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빛에 쓰러질 정도가 되면, 줄에 널어놓은 생선조각을 말리고 태양증류기에서 물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비가 물을 확보하게 해주면,습기가 손질해놓은 물고기를 상하게 해서 초록색으로 변해 흐물흐물해질 거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거친 날씨가 가라앉고, 히늘이 공격과 바다의 배반을 이기고 살아나면, 신선한 물이 바다로 쏟아져버렸다는 분노에 환희가 가라앉게 된다. 이것이 당신이 보게 될 마지막 비일지, 다음 번에 비가 내리기 전에 당신이 갈증으로 죽게 될지 걱정이 되어 환희가 가라앉아버리는 것이다.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바다가 주름살 하나 없다. 바람의 속삭임조차 없다. 시간이 영원까지 계속될 듯하다. 어찌나 권태로운지, 의식불명에 가까운 상태로 빠진다. 그러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감정은 광풍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두 상반되는 것조차 명확하게 남지 않는다. 권태 속에는 공포라는 요소가 있다. 눈물을 터뜨린다. 끔직함이 당신을 가득 채운다. 비명을 지른다. 한데 공포의 손아귀-최악의 폭풍우-속에서도 당신은 권태를 느낀다. 그 모든 것과 함께 깊은 나른함을 느낀다.

   죽음만이 지속적으로 감정을 흥분시킨다. 삶이 안전해서 침체했을 때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거나, 삶이 위협받고 소중할 때 달아나게 한다.

   구명보트에서의 삶은 생활이라고 할 게 없다. 그것은 몇 개 되지 않는 말을 가지고 하는 체스 게임의 마지막 판과 같다. 구성요소는 더할 수 없이 간단하고, 판돈도 크지 않다. 생활은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정신적으로 죽어간다. 살아나고 싶다면 적응해야 한다. 많은 것이 소모된다. 가능한 곳에서 행복을 얻어야 한다.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져서도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러면 지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이 된 기분이 된다. 왜일까? 발아래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 죽어 있으므로.....

 

(영화 속의 장엄한 광경들이 원래는 글로 어떻게 묘사되어있을지가 궁금해 책을 읽었는데,  달랑 이 정도, 몇 페이지에 걸친 묘사를 씨앗 삼아 그런 장면을 연출하다니... 누구의 상상력이었을지 감탄스러울 뿐.

소설에서 파이는 오직 선의와 인내와 용기와 의지로만 뭉친 그런 아이가 아니라 환상이 아니고선 견뎌낼 수 없는 치열한 상황을 뚫고 나가야 했던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져있다. 영화가  동화적이라면 소설은 보다 현실적이어서 또 그만의 여운을 남긴다.)

 

......분출하는 에너지와 깊은 평화가 묘하게 뒤섞인 느낌은 강렬하게 축복으로 다가왔다. 그 길을 지나기 전에는 바다와 나무들, 공기, 햇살이 저마다 다르게 말했지만, 이제 모두 하나의 언어로 말을 걸어 왔다. 나무는 길을 안내했고, 길은 공기를 인식했고, 공기는 바다를 생각했고, 바다는 햇살과 모든 걸 나누었다. 모든 요소가 이웃해서 조화를 이루었고, 모두 친척이 되었다. 나는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으로 무릎을 꿇었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일어났다. 작은 원의 중심이 된 듯했고, 우연히도 그 원은 훨씬 큰 원의 중심인 느낌이었다. 자아가 알라와 만났다.......

 

......겨울이었다. 넓은 땅을 혼자 거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밤새 눈이 내린 후, 햇살이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집으로 다가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숲이 있고, 숲속에 작은 빈터가 있었다. 바람일까, 아니 어느 동물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눈송이가 와르르 떨어질 때, 햇살이 비쳐들었다. 금빛 눈가루가 햇살 가득한 빈터에 쏟아질 때, 나는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 왜 성모님이었을까. 모르겠다. 성모님에 대한 마음은 그리 크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분이었다......난 그분을 봤다고 느꼈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분은 아름답고 위풍당당했다. 내게 사랑 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잠시 후 그분은 날 떠났다. 두려움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신의 존재는 최고의 보상인 것을......

 

......기도 카펫이 마음에 들었다. 고급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아름답게 빛났다. 어디에 펴든, 그 밑의 땅과 주변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땅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며 모든 것이 똑같이 신성하다는 점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 좋은 기도 카펫이 아닐까......

   밖에서 기도했다. 그게 좋아서. 기도 카펫을 집 뒤, 마당 구석에 펴곤 했다. 해홍두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조용한 곳이었다. 옆의 담에는 부겐빌레아가 피어 있었다. 긴 담 위에는 포인세티아 화분이 조르르 놓여 있었다. 부겐빌레아가 나무 사이를 타고 올라갔다. 진홍빛 포엽과 나무에 달린 붉은 꽃송이의 빛깔이 대조를 이루어 참 예뻤다. 나무에 꽃이 피면 까마귀, 찌르레기, 태양새, 잉꼬가 몰려들었다. 오른쪽으로는 담이 쭉 뻗어있었다. 앞쪽과 왼쪽으로는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뒤쪽에 햇살이 쏟아지는 공간이 있었다. 물론 날씨와 시간, 계절에 따라 풍경이 바뀌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듯 모든 게 분명히 남아 있다. 나는 누런 땅에 조심스레 그려놓은 선의 도움으로 메카와 마주섰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한 번은 벼락이 쳤다. 하늘이 까맣고 낮인데도 밤 같았다.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났다. 그런 상태가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이 휘 불더니 빗줄기를 뿌렸다. 다시 하늘에서 하얀 장작개비 같은 게 번쩍하더니 비가 멈췄다. 흰 뿌리처럼 생긴 것이 바다에 내리쳤다. 순간, 거대한 하늘의 나무가 바다에 서 있었다. 벼락이 바다에 내리치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둥소리는 어마어마했다. 번뜩이는 빛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번개로 인해 나는 뚜렸한 한계에서 벗어나 숭고한 경외감에 빠져들었다.

   다음에는 벼락이 훨씬 가까이 떨어졌다. 마치 우리를 겨냥한 것 같았다. 우리가 높은 파도를 타고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는 순간, 물마루에 벼락이 떨어졌다. 더운 공기와 더운 물이 폭발했다. 이 초나 삼 초 동안, 깨진 우주의 창문에서 쏟아진, 거대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흰 파편이 하늘에서 춤을 췄다.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압도될 만큼 강력했다. 만 개의 트럼펫과 2만 개의 북을 울린다 한들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귀가 멀 정도의 소리였다. 바다가 흰색이 되면서 모든 색깔이 빠져버렸다. 모든 게 순전히 흰빛이거나 순전히 검은 그림자였다. 빛은 바다를 뚫을 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벼락은 내리칠 때처럼 황급히 사라졌다. 뜨거운 물보라는 우리에게 쏟아지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벌을 받은 물살이 은색을 되찾아 무심히 밀려오고 밀려갔다....

"그만 떨어! 이건 기적이라구, 신이 나타나신 거야. 이건......이건 말이지"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거대하고 환상적인 것에 맞는 말이 없었다. 숨이 가빠서 아무 말도 못했다. 방수포에 팔다리를 벌리고 벌렁 누웠다. 빗줄기가 쏟아져 뼛속까지 얼어붙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미소짓고 있었다. 감전당해 화상을 입을 뻔했는데도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다. 그 시련 속에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경이로운 순간에는 사소한 일은 저멀리 사라지고 우주를 생각하게 된다. 천둥과 방울 소리, 두껍고 얇은 것, 가깝고 먼 것, 양쪽을 감싸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원하신다?"

"저...... 그건 아니고,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군요."

"뭔가 말하면, 어쨌건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저...... 영어에서는 그렇겠지요. 일본어로 이야기라 하면 '창작'의 요소가 들어가게 돼요. 우리는 창작을 원하지 않아요. 영어로 '직설적인 사실'만 원하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저......"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