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바다가는길 2013. 5. 14. 16:21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저. 문학과지성사






 

호수와 나무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 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나무와 돌



나무가 몸 안으로 집어넣는 그림자가

아직도 한 자는 더 남은 겨울 대낮

나무의 가지는 가지만으로 환하고

잎으로 붙어 있던 곤줄박이가 다시 곤줄박이로 떠난 다음

한쪽 구석에서 몸이 마른 돌 하나를 굴려

뜰은 중심을 잡고 그 위에 

햇볕은 흠 없이 깔린다






하늘과 침묵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사내의 이마 위에서 그리고 이마 밑에서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

그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좌우로 물살을 나누며

사내 앞까지 와서는 급하게 우회전해 나아간다

그래도 침묵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

사내는 몸속에 있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뜰 위에 놓고 말이 없다

그림자에 덭인 침묵은 어둑하게 누워 있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 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숲과 새



떡갈나무 하나가

떡갈나무로 서서


잎과 줄기를

잎의 자리와 줄기의 자리에

모두 올려놓았다


그 자리와 자리 사이로

올 때도 혼자이더니

갈 때도 혼자인


어치가  날다가

갈참나무가 되었다






강과 나



강과 나 사이 강의 물과 내 몸의 물 사이 멈추지 못하는 강의 물과 흐르지 못하는 강의 둑 사이 내가 접히는 바람과 내가 풀리는 강물 소리 사이 돌과 풀 사이 풀과 흙 사이 강을 향해 구불거리는 길과 나를 향해 구불거리는 길 사이 온몸으로 지상에 일어서는 돌과 지하로 내려서는 돌 사이 돌 위의 새와 새 위의 강변 사이 물이 물에 기대고 있는 강물과 풀이 풀을 붙잡고 있는 둑 사이 내 그림자는 눕혀놓고 나만 서 있는 길과 갈대를 불러 모아 흔들이는 강 사이






지붕과 벽



어두워지자 골목의 구석에서는 가랑잎을 뒤적이던

바람이 가랑잎 밑에서 잠들었다

몇 개의 가등이 사라지는 길을 다시 불러내고

어둠은 가등을 둘러싸고 자신을 태워 불빛을 지켰다

달이 뜨자 지붕과 벽과 나무의 가지와 남은 잎들이

제 몸속에 있던 달빛을 몸 밖으로 내놓았다

달은 조금씩 다른 자기의 빛들에 환하게 와 닿았다

몸속의 달빛이라 기울어진 지붕에서도 달빛은

한 방울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달빛을 파면서 밤새 한 마리가 세상을 구십도로 눕혀 보여주더니

다시 가볍게 제자리로 돌려놓고 가버렸다

잎들 가운데 몇몇은 벽 앞으로 떨어지며

벽이 몸 안에 숨기고 있는 균열을 몸 짓으로 그려 보였다

잎이 지나간 뒤 벽은 그러나 달빛만 가득했다






도로와 하늘



도로 하나가 해 뜨는 쪽에서

해 지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해 지는 쪽에서 해 뜨는 쪽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도로의 양쪽에는 가로수들이 함께 달리며

한 구역씩 맡아 하늘을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가고 사람도 어디로 가고

도로에는 지금 질주하는 도로만 가득합니다





   

-유리창과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 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아침과 바람



바람이 잠깐 집에 들렀다

갔습니다 아침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라일락나무 밑은

그 시간 비어 있었습니다

박새 한 마리가 아침 7시에 

방문하고 간 뒤였습니다

지금 10시가 살구나무의 

몇 개 남지 않은 꽃을 피하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림자와 길



혼자 걸어서 갔다 왔다

명자나무가 숨겨놓은 꽃망울까지

지금은 내 발자국 위에서 꽃망울 그림자가 

쉬고 있다

꽃망울 그림자가 꽃망울로 돌아가자면

아직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서산과 해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로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국화와 벌



오늘은 정말 가을이어서

국화의 봉오리들이 퍽퍽 벌어졌습니다

어제보다 두 배는 족히 될

벌들이 잉잉거렸습니다

구룡사에서는 반야경 독경 테이프를

다른 날보다 한참 늦게 틀었습니다

늦게 틀어놓은 반야경이지만 그 소리에 얹힌 

붉나무 잎 몇몇은

우리 집까지 잘 도착했습니다






새와 나무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며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돌멩이와 편지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눈송아기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편지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한 마리 새가 날아간 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 하나 뜰에 있는 것을 본 순간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접시와 오후



붉고 연하게 잘 익은 감 셋

먼저 접시 위에 무사히 놓이고

그 다음 둥근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온전하게 놓이고

그러나 접시 위의 

잘 익은 감과 감 사이에는

어느 새 '사이'가 놓이고

감 곁에서 말랑말랑해지는

시월 오후는

접시에 담기지 않고

밖에 놓이고






모자와 겨울



새가 언덕에서 지나가는 구름을 자주 보는 겨울입니다

텅 빈 밭에는 햇볕이 흙에 달라붙고

논에는 고인 물에 하늘이 버려져 있는 겨울입니다

마을 앞은 여름에 무너진 자리가 한 번 더 무너지고

엉겅퀴가 무리 지어 서 있던 자리에는 바람만 남고

어쩌다가 밖에 나온 사람도 길에 있지 않고

버려진 모자 하나 길 위에 얼고 있는 겨울입니다






집과 소식



오늘은 울타리 및을 헤집던 박새가

느닷없이 불두화 쪽으로

두어 걸음 가다가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자귀나무 허리가

한동안 환해지고

잔디밭에서는 조약돌 하나가

키를 낮추고 솟았습니다

낯선 사람 몇몇이 집 앞에 멈추더니

지붕 밑에서 반짝이는 흰 벽을

우두커니 서서 보고 갔습니다






이쁘고 이쁜 이미지들.

울지않고 방긋 웃는 아기,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 바라보는 아기의 투명하고 까만 눈동자 속에 비친 세상 같다.

생물, 무생물을 가리지않고, 새, 나무, 돌, 집, 사람, 그림자, 허공, 구름, 바람, 꽃, 심지어 시간까지 여기선 모두가 생생히 살아 자기의 존재를 다해 존재한다.

그의 시가 늘 그렇듯 천천히 천천히 말들을 단어들을 하나씩 떠올리다보면 선명히 그려지는 풍경들,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짓게 만드는 이미지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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