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F.스콧 피츠제럴드

바다가는길 2013. 10. 28. 20:33

 

위대한 개츠비위대한 개츠비

-세계문학전집007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김영하

|

문학동네

 

 

 

 

황금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오, 내 사랑, 황금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내 사랑이여,

내가 당신을 차지하리라."

 

-토마스 파크 딘빌리어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모든 종류의 전문가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존재, 이른바 '균형잡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창으로 보면 실제보다 훨씬 더 근사해 보이는 게 인생이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데이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성은 뭐랄까,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 빛나는 눈동자와 정열적으로 빛나는 입, 그 눈부신 광채로 그녀의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반면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좋아해본 남자라면 잊기 힘든 어떤 흥분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음악적인 충동과 속삭임-'한 번 들어볼래요?'-방금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해치웠으며 곧이어 또다른 즐겁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약속...

 

그녀의 홍조 띤 얼굴에 잠시 비낀 마지막 석양은 낭만적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숨을 죽여 이야기를 들었다. 어스름이 내리면 신나는 거리를 뒤로해야만 하는 아이들처럼 햇빛 한 점이 그녀의 얼굴에서 후회하듯 주저하다가 그녀를 버리고 천천히 떠나가버렸다...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획신시켜주는 미소였다...

 

...마차가 작은 다리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엇다. 나는 그녀의 금빛 어께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데이지와 개츠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 깨끗하고 강건하고 상상력이 결여돼 있고 세상 만사를 회의적으로 접근하는, 내 팔에 명랑하게 안겨 기대고 있는 이 보기 드문 여성에게로 온 정신이 쏠렸다. 어지러운 흥분과 함께 문득 하나의 경구가 내 머릿속을 때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바쁜 사람과 피곤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지 않았다.그들은 소파의 양 끝에 앉아서 마치 어떤 질문 하나가 던져졌거나, 아니면 던져진 질문이 아직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고 허공에 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응시하고 잇었다....놀라운 것은 개츠비의 변화였다. 그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고 있었다. 환희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없이도, 그로부터 뻗어나온 새로운 행복의 광휘가 온 방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비가 그쳤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비로서 알아챠렸을 때, 한 줄기 햇빛이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일기예보관, 혹은 날마다 보는 햇빛에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감탄하고 마는 태양의 숭배자처럼 그 소식을 데이지에게 전했다. "어떻게 생각해? 비가 그쳤대."

"좋아, 제이." 고통과 비탄에 잠긴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오직 예기치 않은 기쁨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데이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 집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산정할 작정인 것 같았다. 가끔씩 그는, 그녀라는 놀라운 존재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더이상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는 듯, 멍한 눈초리로 자신의 소유물들을 둘러보곤 했다...

그의 정신은 두 단계를 지나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최초의 당황과 놀라운 기쁨이 지나고, 그는 그녀의 출현이라는 기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이를 악문 채, 말하자면 믿을 수 없는 집중력으로 꿈꾸어왔던 것이다. 이제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너무 많이 감아놓은 시계처럼 태엽이 서서히 풀려가는 중이었다...

 

...눈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독보적인 열장을 가지고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리고 자신의 길에 날리는 온갖 밝은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혼에 쌓아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귓전에 대고 뭔가를 속삭일 때면 감정이 북받치는 듯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뜨거운 열정으로 거세게 요동치는 그녀의 음성에 그는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오래 꿈꾸어도 결코 질리지 않은 그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영생불멸의 노래였다...

 

...그것은 명백히 제스처의 세계가 아닌, 감정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웨스트에그에, 롱아일랜드의 어촌에 브로드웨이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이 '놀라운 장소'에 압도당해 있었다. 또한 그녀는 낡은 완곡어법을 경멸하는 날것 그대로의 활기와, 지름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너무나도 현란한 운명들에 겁을 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 놀라운 단순성 속에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한 구석이 없어." 내가 말했다. "목소리에 가득한 건......"

나는 망설였다.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야." 개츠비가 불쑥 말했다.

바로 그거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정말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충만했다. 돈, 그 안에서 오르고 내리는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짤랑거리다가 때론 심벌즈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려대기도 하고, 하얀 궁전의 공주처럼 저 높은 곳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으로 만든 소녀상처럼......

 

...그런 표정을 수습한 후에 그는 격정적으로 데이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심지어 아직 제기되지 않은 비난들까지도 미리 방어하면서. ..결국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오후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데 허망한 꿈만이 홀로 남아 싸우고 있었다. 방 건너편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향해, 더이상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암울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으면서 끝까지 분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인셍이 당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 결정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내려주어야 했다. 사랑, 돈, 혹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현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어야 했다...

 

...아마도 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는 자신이 오래 간직해온 안온한 세계가 이미 끝나버렸고, 단 하나의 꿈을 갖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던 것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렀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무시무시한 이파리들 사이로 생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미 한 송이조차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수 있는지, 사람 손이 거의 닿지 않은 풀밭 위로 떨어지는 햇빛이 얼마나 날것일 수 있는지를 발견하고는 몸을 떨었을 것이 틀림없다. 새로운 세상,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이런 세상에서 가련한 혼령들은 마치 숨을 쉬듯 꿈을 들이마시면서, 우연을 가장하여 주위를 맴도는 법이다...

 

...그 모든 게 경솔하고 혼란스러운 짓이었다. 그들, 톰과 데이지는 경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살아 있는 것들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그런 다음에는 돈이나 더 무지막지한 경솔함, 혹은 그들을 한데 묶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에 숨었다.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말끔히 치우게 했다...

 

...해변가의 집들은 이제 대부분 닫혀있었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페리에서흘러나오는 잔광 말고는 빛이랄 것이 없었다. 달이 더 높이 떠오르면서 존재감 없는 집들이 묻혀버리자, 마침내 나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에 꽃을 피웠던 이 유서 깊은 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섬은 신세계의 풋풋한 초록색 가슴이나 다름없었다. 이 섬에서 자취를 감춘 나무들, 개츠비의 저택에 자리를 내주었던 나무들은 한때 인류의 마지막, 가장 위대한 꿈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이며 유혹의 눈길을 던진 것이다. 그 덧없는 축복의 순간, 이 대륙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에 인간은 분명 숨을 죽였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경이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수용력의 한계에 필적하는 그 무언가와 역사상 마지막으로 대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심미적 묵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이제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겠는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서 언젠가 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에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했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번역을 했네. 재미있겠다, 하고 들고 왔다.

소설을 읽어보니 영화는 제법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던 걸 알게된다. 책을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피츠제랄드의 소설은 처음 읽는데, 캐릭터를 만드는 힘이 있고 상황과 심리의 묘사가 영화를 보듯 생생하다.

꼭 영화를 먼저 봐서가 아니라 소설만 읽었어도 읽으면서 그 장면장면들이 머리속에 그려졌을 것 같다.

재기발랄한 문체는 피츠제럴드의 것인가, 김영하의 것인가? 원본엔 어떻게 쓰여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술술읽히던 매끈한 문체.

영화를 보고도 그랬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니 또다시 그 가엾은 영혼에 대한 연민을 멈출 수가 없구나...

 

그리고 해설을 통해 알게 된 미처 생각도 못했던, 꽤 타당성이 있어보이는 한 가지...

 

-이 소설이 발표된 이후 여러 평자들이 개츠비라는 인물이 미국이라는 신생 제국을 인격화하고 있다고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개츠비는 자신의 화려한 미래의 모습을 거듭하여 상상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을 현실이라 믿게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않고 상류층 여성인 데이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부는 의심과 질시의 대상일 뿐이며, 윤색된 과거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모두 자신의 꿈에 맞게 바꿔버리겠다는 그의 무모한 낙관주의는 바로 1925년 당시 신생 강대국인 미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서 깊은 유럽의 제국들로부터 견제당하면서도, 예의도 모르는 상것들이라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국제무대에 등장해 서서히 힘을 키워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자기확신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불안한 승리, 아슬아슬한 성공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바다 건너 이스트에그의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는 개츠비처럼 미국인들은 낙관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최고의 소설로 꼽는 이유일 것이다-

 

-데이지는 사랑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개츠비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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