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이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상설전시중인 소장품과 함께 시대나 장르를 초월해 서로 교감하고 어울릴만한 또 다른 작품들을 배치해보는 새로운 구성으로 전시공간을 꾸몄다.
가끔 기획전시를 보러 리움에 가긴 했지만, 처음 개관 이후 한, 두 번 본 이후에 상설전시관을 들어간 건 꽤 오랜만.
대기업이 미술관을 건립하고 미술품들을 사모으는데 어떤 검은 의도가 있는 지(가끔 이슈가 되듯) 모르지만, 리움은 건축이면 건축(Mario Botta가설계한 고미술관과 Jean Nouvel이 설계한 현대관 모두 너무 아름답고), 소장품이면 소장품(개관 후 전시실을 둘러보며 그 어마무시한 작품들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던 기억), 전시 디스플레이면 전시 디스플레이(아주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공간) 모두 나무랄 데가 없어, 이런 공간과 작품들을 마련해 즐길 수 있게 해준 기업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그 모든 걸 한 개인이, 아니라면 한 기업이 사들이고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그 무시무시한 자본의 편중이 살짝 무섭고 기이하긴 하지만...
무튼...
이 포스터에 혹해 전시를 보기로 했었다.
청자와 그 배경처럼 뒤에 걸린 모노톤의 그림이 너무 정갈하다. 그림은...
바이런 김의 고려청자 유약 #ㅣ과 # 2.
색의 향취만으로도 그림 속으로 퐁당!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빠져 유영.
앞에 놓인 청자는...
청자양각 운룡문 매병고려, 12세기, 高40.0 口徑8.3 底徑14.0cm 寶物 1385 號
이 작품은 형태와 장식, 유색, 문양소재와 장식구성 등에서 청자 전성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최고의 걸작... 주둥이는 크기가 작은 반형(盤形)으로 어깨와 몸체의 상부는 공처럼 둥글고, 저부에서 점차 폭이 좁아져 바닥으로 이어진다... 표면에는 어깨에서 굽 언저리까지 굵고 가는 음각선을 사용하여 용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어깨와 저부를 작은 구름으로 가득 채운 후 몸체 중앙에 파도를 배경으로 여의주를 희롱하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두 마리 용의 모습이 매우 정교하고 역동적이다.
그 옆에 함께 놓인...
청자음각 연화문 매병 고려 12세기 高27.7 口徑5.3 底徑10.2cm 國寶 252 號
고려중기의 매병들은 청자의 조형미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데, 이 매병은 그 중에서도 형태와 장식, 유색(釉色)이 뛰어난 작품으로 유명하다. 유려한 곡선미의 양감이 좋은 형태를 만든 다음,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어깨에 여의두(如意頭)를, 몸통 4면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봉오리를 입화절지형(立花折枝形)으로 그려 놓았다. 그릇 속으로 스며들 듯이, 혹은 안에서 밖으로 살짝 내보일 듯이 섬세하게 처리한 음각문 위에 맑고 투명한 비색유를 고르게 씌워 구웠는데, 속살에 새겨진 문양과 은은한 빛이 도는 유약이 어우러져 신묘한 정취를 자아낸다...풍성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형태, 맑은 시냇물 같은 청초한 청잣빛, 숨을 듯 곱게 새겨진 부드러운 문양장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
사진으론 잘 안보이지만 몸체 전체에 음각된 문양이 용문양은 너무나 현란하고, 연꽃 문양은 단아하기 그지없다. 주둥이에 살짝 벗겨지다만 금 도금이 남아있어 아마 처음 만들어졌을 땐 훨씬 더 화려했을 것을 상상하게 된다. 색이며 형태며 문양 모두 너무 아름다움.
나중에 팜플렛을 보니 1.시대교감(고미술) 2.동서교감(현대미술) 3.관객교감(기획전) 순으로 전시가 짜여졌는데, 늘 기획전을 보러 가던 버릇으로 관객교감전부터 시작해 완전 거꾸로 돌았다.
관객교감전 중 눈에 띄었던 작품들...
에르네스토 네토(1964~ ) Ernesto Neto 2010. 1.심비오테스튜브타임–향기는 향꽃의 자궁집에서 피어난다. 2.집.
마치 외계 생명체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듯. 아니면 거대한 꽃 봉오리의 꽃술 속으로 들어가는 듯.
통로 곳곳에 향낭이 매달려, 아마 처음엔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었을텐데, 시간이 지난 관계로 향기가 퇴색해 그 느낌이 반감됐지만 제법 독특한 공간체험이었다.
데모 스테이션 No. 5 리크릿 티라바닛(1961~ ) Rirkrit Tiravanija
이 건축물 자체는 나에겐 별 감흥이 없었고, 사진에서 보이듯 이걸 이용해서 전시기간 동안 이런 저런 공연이 펼쳐지는 모양인데 가운데 원통형의 공간에 설치 된 비디오에서 그간의 공연들을 보여준다. 내가 갔을 때 한 초등1학년 정도 되보이는 꼬마가 바이올린 연주 중. 그냥, 여긴 뭐지? 하고 들어갔다가 그 꼬마의 진지한, 한 연주자로서의 자부심 넘치는 연주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한참을 봤었다 . 프로그램 설명문을 보니 장누리. 그 이름 기억하자, 나중에 어떻게 클지...
그리고 정작 좋았던 그 위에 설치된 이 작품...
Gyorgy Ligeti.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100개의 메트로놈들이 각기 다 다른 속도로 울리도록 설치했다. 각자 제멋 대로 딸깍이는 메트로놈들이 만드는 불협화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치 협주를 하듯 규칙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무작위로 펼쳐지는 음들, 태엽이 풀리면서 점점 잦아드는 소리들이 한 곡의 현대음악을 듣는 듯했다.
의외로 빠져들게 되고 의외로 묘한 아름다움이 있어 좋았다.
내가 전시실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소리가 시작돼있었고, 몇 십분쯤 후 떠날 때까지 메트로놈들의 공연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까 실제 작동시간은 꽤 길지만, (처음 메트로놈을 작동시키고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체를 다 지켜보지 못한 게 아쉽다.) 대략 느낌은 이런 것, 유투브에 동영상이 있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tvYPOGy_8gg
연금술. 최정화(1961~ ) 崔正化 . 2014. FRP, 철골, 크롬도금. 1,800 x 32cm
<연금술>은 최정화의 확장된 예술철학을 반영하는 기념비적 규모의 작품으로, 미술관의 로툰다 천창에서 로비로 이어지는 빛의 통로를 가로지르며 매달려 있다. 연금술이 금속이 아닌 것을 귀금속으로 변환시키거나 신비의 묘약을 만드는 마법 같은 기술을 의미하는 것처럼, 작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용기들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석 동아줄 같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으며 ‘일상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가”라 믿는 작가는 거대하고 완전한 것 대신 보잘것없고 예술답지 않아 보이는 것으로부터 예술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싸구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연금술이라는 제목처럼 쇠가 황금이 되듯 그를 통해 멋진 예술로 재탄생한다.
그를 보면 제프 쿤스가 생각난다. 둘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오브제들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들.
지금 사진을 보니 문득 작품이 하늘에서 내려 온 동화 속 동아줄 같다는 생각. '마음이 즐거운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이 저희의 것이라'...
중력의 계단.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 . 2014 . 780 x 333 x 2,300cm
LED로 형상화된 태양계 행성들은 천장과 전면의 거울로 인해 완결된 구형으로 보이지만 사실 절반 혹은 4분의 1만 실재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거울과 거울에 반영된 관람자의 모습으로 관계의 미학을 형성했던 엘리아슨의 대표작 <날씨 프로젝트>를 환기시키며 관람자를 작품의 세계 속으로 몰입시킨다. 거대한 태양을 비롯한 행성들의 위치는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관람자는 다른 행성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거울을 이용해 공간을 확장하는 식의 작품들이 근래에 참 많던데... 이 또한 독특한 시각적 경험이었고...
(황금빛 공간에 둥근 행성고리들이 둥둥 떠있지만 실제는 반원짜리 파이프, 형태를 완성하는 거울에 비친 나머지 반은 가상, 가짜 이미지.
그래서 또 이런 역생각이 드는 거다. 우리가 현실에서 '온'이라고 아는 것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깨어서 보면 실은 '반'일 것인지.)
이어서 동서교감에선...
아니쉬 카푸어 육각거울 2009, 스테인리스 스틸, 합성수지. 220x220x41cm
이 작품은 물질을 통해 비물질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카푸어의 <비-오브제(Non-objects)>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다. 작품을 이루는 수 백 개의 작은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들은 자연 상태에서 가장 안정된 구조인 육각형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은 거울로 이루어진 작품의 전체 표면에 반사된 이미지들은 산산이 쪼개지고 해체된다. 일상적인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이러한 신비롭고 만화경 같은 이미지는 재료의 물질성을 초월한 감각과 체험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전의 상설전시때는 못봤던 것 같은데... 아마 내가 본 이후에 새로 구입했나보다. 이번 전시에 처음 보는 작품들이 꽤 있었다.내가 좋아하는 아니쉬 카푸어. 이 작품은 곤충의 눈처럼 육각형의 작은 거울 조각들이 모여 원을 이룬다. 어김없이 그 앞에서 상들은 왜곡되는데, 그 앞을 천천히 움직여갈 때마다 거울은 무수히 오묘한 영상들을 창조해냈다.
가까이 갔다 멀어졌다, 왼쪽으로 갔다 오른 쪽으로 갔다가... 그 앞에서 현란한 상의 유희를 보며 생각아닌 생각, 생각없는 생각에 잠겨 얼마든지 놀 작품.
이우환(1936~ ) 관계항-대화. 2014유리 2장 각 160 x 170 x 2cm, 돌 2개 각 70 x 60 x 60cm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우환의 <관계항> 작업은 각기 다른 사물 본연의 물성 간의 대립과 관계를 다룬다. 이 작품에서 바닥에 놓인 직사각형 판유리는 둥그스름하고 불규칙한 형태의 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공장에서 가공된 유리와 자연 상태의 돌을 그대로 '제시'한 것으로, '재현'과 '창작'을 탈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 이념을 실천한 것이다. 물성의 대립 앞에서 관객은 유리와 돌을 눈으로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 그 주변을 걸으면서 작품에 직접 신체적, 물리적으로 개입하며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글쎄... 이게 뭘까? 그냥 유리 거울과 그 옆에 띡 하니 놓인 돌멩이들. 또는 빈 캔버스에 띡 하니 찍힌 푸른 점 하나, 혹은 둘, 혹은 여럿.
이우환의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왜 좋으냐고 물으면, 글쎄... 모르겠는데...
버릴 만한 것을 다 버린 정결함. 때란 때는 다 벗겨진 순결함. 더 이상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핵심. 딱 그만큼, 그래야만 하는 절대. 무언이 주는 말. 무심함으로 마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무엇...
전에 이우환에 대한 다큐를 본 기억이 있는데, 가공하지않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쓰는 대신 딱 맞는, 마음에 꽃히는 돌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었다.
이 작품, 유리와 돌이라는 이질적인 두 오브제의 만남. 설명에서 '대립과 관계'라고 했지만 대립보다는 관계, 함께 함이 조화로워 보인다.
장 누벨의 이 건물은 검은 스틸 직육면체도 모던하지만 중간 중간 작은 큐브들이 박혀 돌출돼 있는 디자인이 멋지다.
저 뒤 큐브안의 작품은 조셉 보이스, 옆에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알베르토 자코메티 거대한 여인 Ⅲ (Grande Femme Ⅲ) 1960, 청동 235×29.5×54cm
인간을 가장 본질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자코메티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과감히 덜어냈다. 몸의 볼륨을 통해 인간을 표현하기보다는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로 표현하기 위해 살을 거의 제거해버린 결과 자코메티의 인물상은 이 작품에서 보듯이 뼈대만 남은 듯 앙상한 모습이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이 여인상은 부동의 직립 자세로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아주 어릴 때 자코메티를 좋아했었는데, 실제 작품을 본 적이 없었던가? 이번에 보고 새삼 놀람.
어릴 때의 기억으론 그의 작품들, 비쩍 마른 인물들이 참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인간존재의 불안함을 표현한다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본 느낌은 마치 진흙덩이를 이겨 붙인 듯 청동이 툭툭 덧붙여져 있는 모습이 의외로 무척 강인하다는 인상.
비록 비쩍 말랐지만 커다란 발은 굳건히 땅을 딛고 있고, 꼭 쥔 주먹과 꾹 다문 입, 살짝 찌푸린 표정에 강한 의지가 보인다.
예전엔 자코메티라는 작가가 참 허약한 내면의 소유자일 거라 여겼지만 막상 작품을 실제로 보니 그 안에 꼬장꼬장한 질긴 심지가 느껴진다.
얼마 전 읽었던 전기에 보니, 그의 조각들은 만들다보면 늘 성냥갑에도 들어 갈 만큼 작아져버리곤 했단다. 어떤 심리가 작용한 걸까?
결국 그 사이즈로는 화상이나 콜렉터들을 만족시킬 수도, 전시회를 열 수도 없어 억지로 사이즈를 키워 제작했다는데...
항상 그렇듯 내면의 상처, 고통, 불완전함과 갈등이 예술을 만든다.
디에고 좌상 964~65 청동 60 x 19 x 32cm
작가의 동생을 모델로 제작된 <디에고 좌상>은 자코메티 생애 마지막 양식이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후의 경향을 반영한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정좌하여 먼 곳을 응시하는 디에고의 모습은 작가가 평생 동안 탐구했던 이집트 조각 특유의 자세와 표정을 연상하게 한다. 1960년 이후 자코메티는 작품에서 ‘시선’을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이 작품 역시 거칠게 파편화된 몸통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얼굴에서 인물의 살아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움푹 패인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디에고의 시선은 존재의 허무함, 인간의 고뇌 등 삶에 대한 깊은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 마치 구도자같은 모습. 자코메티 전기에 의하면 동생 디에고는 자코메티의 최대의 조력자였고, 작품이 완성되기 전 밑작업을 도맡아했다. 전기를 읽고 느끼는 바론 최소 작품의 3분의 1의 공은 디에고에게 돌려야 할 것 같은 정도. 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모든 명성은 형 자코메티에게로 갔지. 그만큼 예술이라는 것에 있어서 '창작'이라는 것의 중요성이 있는 거기도 하지만... 디에고 자신의 작품도 나쁘지않았었는데... 조각은 원래 여기 '동서교감'이 아니라 '시대교감'에 불교미술품들과 전시중인데, 그 질감과 색감이 서로 참 잘 어울렸다는 생각. 촛불은 서양 정물화의 전통적인 모티프로, 현세의 삶이 온갖 유혹적이고 즐거운 일들로 가득할 지라도 결국 인생은 허무하고 무상한 것일 뿐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마치 고전 회화같이 서구 전통회화의 양식을 답습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삶의 유한성과 죽음을 상징하는 촛불 모티프는 서구 미술 전통에 대한 그의 회의적이고 반성적인 시각과도 관련이 있다. 블로깅을 위해 리움 홈페이지에 들어가 설명을 읽고서야 이 그림의 의미를 새삼 안다. 곧 타서 없어질 불꽃의 허무함. 의미를 몰랐어도 그냥 이 부염한 빛을 뿌리는 촛불 두 자루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갔다.
3MX3M의 커다란 스케일. 그 앞에 바짝 서면 시야가 다 채워진다. 스트라이프의 색감도 참 예쁘지만 한참 바라보면 착시가 생겨, 3차원의 이 물질계가 0,1,0,1의 디지털세계로 부호화 할 것 같은 느낌. Francis Bacon-figure in a room. 1962. 유채. 198.8X144.7cm 어둡고 밀폐된 방 안 한 가운데 소파에 괴기스럽게 뒤틀린 모습의 인물이 누워 있다. 마치 폐쇄 공포증으로 고통받는 듯한 인물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고립을 표현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인식했던 작가의 강박관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왜곡되고 거칠게 표현된 인물은 넓고 단순한 색면으로 처리된 방의 내부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더욱 시선을 집중시킨다. 프란시스 베이컨도 참 궁금한 작가 중 하나지. 그가 그려내는 풍경들이라니... 주위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과 삶이 그의 내면에 이렇게 비춰졌다는 얘긴데... 그 기괴함을 어떻게 견뎠을까. 대면하기 썩 유쾌하지않은 형상들이지만 항상 그의 그림엔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 이면의 진실을 그리기 때문일지... 이 작품은 '옷 벗은 마야'의 패러디 같기도 하고. 대담한 색의 대비와 핵심외의 공간을 여백으로 두는 묘미, 대각, 사선으로 변화를 준 화면이 좋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피할 수 없는 진실. 2005 222 x 176 x 74cm. 데미안 허스트의 대표적인 작업인 자연사시리즈에 속하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포름알데히드 방부액 속에 담긴 죽은 비둘기와 해골을 통해 죽음을 가까이 마주하게 된다. 허스트는 기독교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흰 비둘기와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을 영구적인 보존을 가능케하는 방부액 속에 설치함으로써 종교나 과학이 결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그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진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문제적 인간, 데미안 허스트.
해골에 다이아몬드나 붙여 센세이션을 일으켜 명성을 얻고자하는 부박한 작가로 치부해 다른 전시때 회화작품 같은 거 있어도 일부러 무시하고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실제로 처음 보는 설치작품.
틀이 하얀 상자 속 새하얀 비둘기는 날개를 활짝 펴고 너무도 생생하게, 生生하게, lively하게 한껏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 새의 실체는 방부액속에 잠긴 죽은 시체. 밑의 해골은 그 이름표. 설명으로는 기독교 성령의 상징으로서의 비둘기, 물질적 죽음의 상징 해골로 종교도 과학도 영원함을 보장치않는다는 의미라는데, 기독교적 바탕이 없는 내겐 이렇게 읽힌다.
삶을 가장한 죽음. 아니면 죽음도 하나의 다른 형태의 삶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건가, 라고. 핵심만 툭 던지는 간결함, 사족을 붙이고 싶을 욕구를 과감히 자제할 줄 아는 감각이 좋은데... 작품검색하러 홈피에 들어갔더니 그는 의외로 대단한 다작가에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는 노력가다.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명성이나 노리는 얄팍한 작가로 옆에 치워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이 이렇게 주절히 주절히 그에 대해 떠들게 만든다. 포름알데히드액에 잠겨있는 대상은 새뿐 아니라 말, 돼지, 소, 양, 상어, 기타등등에 심지어 배가 갈려 내장은 다 드러내지고 갈비뼈만 오롯이 드러난 채 마치 십자가의 예수처럼 두 팔 벌려 매달려있는 소인지, 양인지도 있다. 가능하다면 그는 아마 사람도 몇, 이런 저런 형태로 그렇게 담궈놓고 싶은 욕망이 마음 속에 간절할 거다. 작품제작방식이 불쾌한 마음으로 궁금해진다. 불쾌하다는 건 그가 다루는 것이 시체나 죽음이기때문이 아니라 그 동물들, 어떤 이유로든 죽은 동물들을 사용한 건지, 아니면 혹시 작품을 위해 죽여서 사용한 건지 하는 의문에서다. 누가 그러래? 누가 그래도 된대?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을 취해야만 하는 게 이 자연계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지만, 태어나 살아있는 것 치고 삶을 계속하고 싶은 의지와 욕망이 없는 게 있을까? 모든 생명의 무게는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같다. 인간외의 것들을 인간 마음대로 다루고 생명을 취해도 좋다는 인간의 그 오만함은 어디서 오는 건지... 데미안 허스트(1965~). 어둡고 둥근 나선형의 나비 날개 회화(깨달음). 2003 d. 213.4cm 나비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시케와 영혼을, 기독교 도상학에서는 부활과 새로운 생명, 영원불멸을 상징한다. 데미안 허스트는 나비의 이러한 전통적 상징성에 의존하여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명상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천 마리 나비의 날개들은 규칙적이고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고, 아름답고 화려한 색깔의 나비 날개로 덮인 작품은 마치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듯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상, 작품 속의 나비들은 모두 아름다운 날개만 남은 죽은 나비들로, 덧없는 삶과 부서지기 쉬운 육체를 의미하며,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작은 일깨움을 던져준다. 다른 작품이지만 대략 이런 느낌. 화면을 빼곡 채우며 펼쳐진 그림은 (그림이 아니지, 그리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해, 꼴라주라고 해야되나?)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편의 만다라다. 하나하나 다 다른 빛깔의 나비날개들은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며 현란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지만 그 시각적 아름다움에 현혹되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생각은, 도대체 몇 마리의 나비를 죽인 거야? 하는 것. 심지어 아래의 설명을 보자면, '나비는 참 예쁜데 털숭숭한 몸통은 징그러워' 하는 말을 듣고 그 뒤로 몸통을 떼내 날개만을 작품에 사용했다니... 나비의 아름다움이 날개에만 있다는 건 얼마나 얄팍한 감상인지. '덧없는 삶, 부서지기쉬운 육체, 삶과 죽음에 대한 일깨움, 삶에 대한 찬양으로서의 죽음에의 집착, 기표니, 기의니, 이상화된 아름다움의 보존'... 무슨 의미를 갖다붙인대도 작품을 위해 아무렇지않게 무수한 생명을 죽이는 것에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다. 그의 창작의지를 위해 동원되는 그 생명들의 의지는 배제됐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마음의 갈등을 품게 한다는 점,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의 유의미성이 부여되는 거겠지,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게 될 날은 영원히 오지않을 것 같지만, 가시처럼 목구멍에 까슬하게 걸려있긴 할 것 같다. “I’ve got an obsession ith death … But I think it’s like a celebration of life rather than something morbid.”[1] The first ‘Kaleidoscope’ painting, ‘It’s a Wonderful World’, was created in 2001. Originally inspired by a Victorian tea tray found by Hirst, the works are made by placing thousands of different coloured butterfly wings in intricate geometric patterns into household paint...... The ‘Kaleidoscope’ paintings reference the spiritual symbolism of the butterfly, used by the Greeks to depict Psyche, the soul, and in Christian imagery to signify the resurrection......Their titles similarly often reference Christian iconography, and Hirst chose to name a collection of paintings in 2008 after entries in The Book of Psalms. Whilst the butterfly is one of Hirst’s most enduring “universal triggers”, in the ‘Kaleidoscope’ paintings he differs from his use of it in earlier works. Previously, the inclusion of live butterflies, as in the installation ‘In and Out of Love’ (1991), or whole dead ones in the butterfly monochrome paintings, was partially an exploration of “the way the real butterfly can destroy the ideal (birthday-card) kind of love; the symbol exists apart from the real thing.”[2] Recalling someone once saying to him: “Butterflies are beautiful, but it’s a shame they have disgusting hairy bodies in the middle,” Hirst chose to use only the iridescent wings in the ‘Kaleidoscope’ paintings, divorcing the butterflies from “the real thing”.[3] Titles such as ‘The Most Beautiful Thing in The World’ (2003) reflect the idealised beauty they encapsulate. 이불(1964~ ) 심연. 2014. 370 x 360 x 330c <심연>은 쌍방향 거울(Two-way mirror)과 LED 조명을 이용하여 형상의 무수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설치작품이다. 마주보도록 설치된 두 장의 거울과 전구가 빛을 반사하여 작품 내부에 무한히 빨려 들어갈 듯한 3차원의 환영적 통로를 구현하며, 중심부에 놓인 폴리우레탄 구조물은 유기체와 기계의 형태를 동시에 취하며 과거와 미래의 시제를 중첩시킨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오랜 기간 천착해온 시공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간다. 여기서 거울은 확장된 자아 탐색의 경험을 제공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심연>은 존재와 본질에 대한 탐구 과정을 상기시키며 세계를 이루는 의미와 지각작용이 가변적이고 상대적임을 시사한다. 이런 식의 거울을 이용한 공간확장, 예전에 쿠사마 야요이전 때도 봤었고... 이불의 이 작품은 어떤 변별성을 갖나? 육각의 튜브안에 든 이불 특유의 기계적 형체들 빼고? *시대교감 마크 로스코. 무제. 1969. 캔버스에 유채. 172 x 128.5cm 어두운 붉은색 바탕에 검은 사각 색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억제된 색채로 무겁고 우울한 정서를 나타낸다. 로스코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일 년 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당시 질병과 극심한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던 자신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였다. 인간이 처한 운명과 비극이라는 감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로스코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모든 예술적 열정과 영감을 상실한 나약한 인간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간 존재의 비극을 절제된 색조로 표현하였다. '시대교감' 전시공간에 불교미술과 자코메티의 디에고좌상과 함께 있는 작품. 설명을 보니 죽기 얼마 전의 병과 우울에 시달리던 때의 작품이구나. 그래서 이런 색감이... 원래 로스코의 그림들은 색감이 참 다채롭고 미묘하고 화려하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 밝고 따뜻한 색감들도 이 우울한 색만큼이나 그의 내면의 표현이었다는 얘기니까 이 그림은 그가 살아 생전 참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로스코의 색은 색이라기 보다 빛같은데, 해를 마주보다가 눈을 감을 때 그 눈 안에 남는 빛의 그림자, 그 잔영의 색들이다. 가끔씩 햇빛 좋은 날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눈 안의 빛의 환영을 즐길때 아, 로스코의 색의 비밀이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무수한 변주의 빛들을 물질인 물감으로 재현한다는 게 참 대단했다는 생각. 마음의 빛이 죽자 그림에서도 빛이 사라져. 하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이도 아름답다.
서도호(1962~ ) 우리 나라. 2014. 청동. 137 x 194.3 x 8cm 자세히 보면 요런 디테일. 참 징한 작업이다. 도대체 몇 개의 미니어처들이 들어가있지? 우리나라, 여기 살고있는 (북한까지 포함해서) 우리 온 민족. 우리 온 민족이 살고있는 우리나라. 이런 게 즉물적으로 느껴지는 작품. 그의 의도는 전체 속의 개아, 개아가 모여 이루는 전체를 양방향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거지만. 예전의, 뭐였더라? 군번표 갖고 했던 작업처럼. 서도호의 작업들. 이렇게 작은 모듈들을 무한히(징하도록) 모아 아주 커다란 하나의 매스를 만드는 것, 또 하나는 집시리즈처럼 천으로 가볍게, 휘이 훠이하게 사물들을 재현하는 것, 어떻게 그렇게 영 다른 작업들을 동시에 진행하는지 신기. 김홍도-포의풍류도. 조선 18세기 말. 종이•수묵담채.-28.0ⅹ37.0cm 김홍도는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인들과 어울려 시회(詩會)를 가졌을 만큼, 글씨와 풍류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정좌한 채 앉아서 비파를 켜는 인물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문인들의 취향을 묘사한 것으로 김홍도 자신이 지향하던 풍류를 묘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물의 주변에는 파초, 붓과 벼루, 칼, 생황, 호리병, 책 등이 있어 당시 문인들의 취미생활을 엿볼 수 있다. 화면은 전반적으로 다양한 기물들을 복잡하게 놓여 있으면서도 삼각형 구도로 적절히 모아 놓은 구도가 돋보인다. 화면 좌측에는 "흙벽에 종이창을 내고 종신토록 포의 차림으로 시와 음악을 즐기면서 살리라"라 적혀 있어 김홍도가 지향하던 풍류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여유가 부럽다. 뭐, 굳이 애쓰지않고 그린 듯한 그림. 이 방 안 풍경 하나로 그의 일상이, 내면과 삶의 지향점이 보이는 듯하다.
01 정선-인왕제섹도 02 정선-금강산 전도 03 이인문-송하관폭도 백자 호. 조선 18세기 백토(白土) 高46.5cm 백자는 그 흰 빛도 빛이지만 좌우가 정확한 대칭이 아닌 게 더 매력적이다. 보면 그냥 별거 없이 평범해 보여도, 마치 하얀 쌀밥이 아무 맛 없는 거 같아도 씹으면 씹을 수록 달콤하고 내게 피와 살을 주듯, 백자도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예쁘고, 마음을 순하고 따뜻하게 한다. 지금은 보물처럼 미술관 유리전시실 안에 들어있지만 원래 도자들 다 생활용품 아니었나? 이건 누가 간장이라도 담아서 썼나봐. 아무도 일부러는 그릴 수 없는 문양이 생겼다. 높은 산, 푸른 하늘 위에 구름 동동 떠가는 것 같네.. 달의 이면. 이수경(1963~ ) 2014 . 도자 파편, 에폭시, 스테인리스 스틸, 동분, 금분, 24K 금박 135 x 135 x 135cm 폐물, 못 쓰는 것이라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들을 모아 다시 살려낸다. 그것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하나하나의 각기 다른 조각들에서 그 하나하나의 그릇들의 온전했던 때의 모습을 본다. 아니, 도공들이 버린 거라면 채 쓰여보기도 전에 그냥 부서져야했던 것들인가? 버려져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도자기 파편들에서 모든 깨진 것, 모자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아름다움을 본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그들을 연결시키는 데 꼭 금칠을 해야했나 하는 것.
01 02 03 04 분청연화문 편병 청화백자 도형 연적 청자철제상감 매병 청자진사표형 주자 이외에도 김환기니, 이중섭, 이종상, 박서보, 장욱진 등에 장 샤오강, 바스키아, 쿠닝, 워홀이니 하는 화가들과 조각작품들, 화려한 고대 금속공예품들과 수월관음도 같은 불교미술품들 등 정말 흥미로운 전시품들이 많다.
시간이 모자라 동영상 작품 몇을 놓쳐 아쉽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 가는 바람에 입장료 반을 할인 받아 단돈 오천원에 전시를 봤지만 리움의 소장품들, 그리고 미술관은 관람료 만원이 절대 아깝지않은 가치를 갖는다. 누구에게라도 한 번쯤은 꼭 가 보라고 권하고 싶은 장소. 좋은 전시였음. 사진과 설명은 리움 홈피에서... http://leeum.samsungfoundation.org/html/exhibition/main_view.asp?seq=34&type=2
셋 다 예전에 간송에서 본 것 같은데(착각인가?) 리움 소장이었나? 어마무시한 그림들. 하나 하나 다 너무 좋고...
<번역된 도자기> 연작은 도공들이 버린 도자기 파편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을 통해 현대미술의 문맥으로 도자기를 재창조하는 이수경의 대표작이다. 작가는 백자에 비해 주목 받지 못하고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만 명맥이 유지되다 사라져버린 회령 지역의 흑유 항아리 파편을 재조합하면서 백자 역사의 이면을 조명한다. 흑유 파편을 금박으로 접합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흑유의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며 그 상처를 보듬고자 했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흑유 달항아리는 유려한 백자 달항아리 옆에 함께 전시되어 과거의 역사를 전달하는 동시에 잊혀진 흑유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일깨운다.
홈피에서 일일히 사진 가져오기 귀찮아 대강 몇 개만 올리지만, 청자, 상감청자, 백자, 분청 등등등 너무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많다. 형태며 문양이며 세세히 보려면 한참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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