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마크 로스코 전- 한가람

바다가는길 2015. 6. 5. 18:56

15001649_p크 로스코(Mark Rothko)전. 한가람미술관. 2015.3.23-6.28

 

 

 

 

마크 로스코전!

다른 전시회 때  한, 두점씩, 아니면 그냥 도판으로만 보며 감탄하던 작품들을 한꺼번에 원화로 만날 수 있는 기회.

세상 참 좋아졌다. 이렇게 손쉽게 눈 앞에서 그 그림들을 볼 수 있다니...

 

 

 거리풍경 1936-7. 91.5X55.8

 

지하철 환타지 1940.  87.3X118.2

 

 

그의 초기작들. 나쁘지않지만 별로 큰 특징은 없다. 작자를 몰랐어도 왠지 러시아화가일 거라 추측하게 하는 색감..  스산하고 쓸쓸한 느낌.

그가 어느 나라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왠지 국적을 생각조차 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알고보니 그는 러시아계 유태인.

7살 때 미국으로 이민해 미국 국적자가 됐으니 러시아에서 산 건 어릴 때 잠시 뿐인데도 러시아계 유태인이라는 뿌리, 그 정서가 그의 생 내내 자리잡고 있던 것 같아 보인다.

이후 세계2차대전을 겪으며, 그 인간의 비극을 그리스 신화를 빗대어 표현하고자 작품들로 전개되지만, 로스코 그림들을 통틀어 그 신화 모티브의 작품들은 내가 그림의 주제가 된 신화의 내용을 몰라서인지 가장 공감이 안되던 것들이었고..

 

"화가들 사이에 폭 넓게 받아들여지는 관념에 따르면, 화가는 잘 그리기만 하면 무엇을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아카데미즘의 본질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좋은 그림 따윈 있을 수 없다... 주제가 결정적이며, 비극적이고 무시간적인 주제만이 타당하다.."

 

예술가 들이란 왠지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사와 무관히 봉두난발로 창작에만 몰두하는 이미지가 그려지지만, 로스코는 절대 외적 세상을 도외시 할 수 없던 사람 같다.

 

 

신화 주제이후에 전개되는 멀티폼.

전쟁을 피해 유럽의 화가들이 미국으로 피난하고, 그 영향으로 미국에 추상과 초현실주의가 받아들여졌다.

신화모티브의 그림들에 한계를 느끼던 그도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 추상으로...

 

무제 1947. 96.2X116.4

 

넘버2. 1947. 145.4X112.2

 

넘버 9. 1948. 134.7X118.4

 

"나는 내 그림이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림 안의 형태들은 연기자들이다"

 

대학 중퇴 후 1년 간 머물렀던 연극계에서 그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그래서 자신의 그림도 한 편의 드라마이길 원했단다.

멀티폼에서부터 로스코 특유의 색면화가 싹튼다. 이때부터 그의 무수한 색 실험의 흔적이 보인다.

그림을 한정짓기 싫어서 제목도 없이 '무제'나 숫자로만...

내 안의 드라마를 캔버스에 옮겼으니, 누군가 그 이야기를  눈치채주길?

색들의 미묘한 매력이 나타나지만 아직은 정리 덜 된 난삽한 느낌.

 

마티스. 붉은 방. 1911.

 

멀티폼류에 한계를 느끼던 참에 1949년, 마티스의 '붉은 방'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영구전시된다. 로스코는 수개월 동안 매일 이 그림을 찾아가 보며 한 단계 더 나아갈 모티브를 찾았다고 한다.

글쎄.. 나로서는 이 그림의 어떤 점이 그토록 획기적이었던 건지, 어떻게 이 그림으로부터 로스코가  특유의 방법론을 창조해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그림을 응시한다면 마치 음악이 그런 것처럼 당신은 그 색이 될 것이고, 전적으로 그 색에 젖어들게 될 것이다"

 

그는 작업할 때 항상 작업실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곤 했단다.

그리고 전시 때도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싫어 전시장 역시 음악으로 채워넣곤 했단다. 

모짜르트, 드뷔시, 바그너?, 주로 듣던 작곡가들이라는데 막상 전시장엔 뜬금없이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이 흘렀다.

참 원없이도 바흐의 첼로곡을 들었다.

그림이랑 제법 잘어울렸는데, 그거 자동재생시키는 게 뭐 어려워 시시때때로 음악이 뚝 뚝 끊기고 엉뚱한데서 다시 시작하고 하곤 해서 좀 짜증.

 

 

"나는 색의 관계나 형태, 그 밖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비극, 황홀경, 파멸 등과 같이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서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런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었던 것과 동일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색의 조합으로 자기의 그림을 보는 건 자기의 그림을 제대로 보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솔직히 말해 내가 감탄하는 건 그 색들인데 어쩌지?

색들이 뿜는 빛, 아우라, 에너지, 말로 표현 안되는 느낌들.

캔버스에서 색들이 스며나와 내게로 스며드는 것.

 

 

 

 

멀티폼을 거쳐 드디어 황금기.

내가 좋아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이 황금기 때의 것.

그 미묘한 아름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림 앞에 코를 박을 듯이 다가서서, 도대체 왜? 무엇이?, 하며 캔버스 구석 구석을 살피며 그 이유를 찾으려했지만, 결국 그저 그 표현 안되는 어떤 느낌들, 보이지않는 향기 같은 것에 젖어 아름다움의 기쁨을 누릴 뿐이었다.

 

무제. 1949. 203.7X168.6

 

넘버 7 또는 넘버 11. 1949. 173X111

 

 

'정면의, 드러내지는, 숙달된 솜씨로 마감된  표면에 대한 욕망'... 드러냄으로 향하는 여정... 한 마디로 반투명, 혹은 화가들이 투명이라고 부르는 것(투명한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 '숙달된 솜씨로 마감된 표면'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그 깊이를 보여주는 것...

대부분의 멀티폼 작업에서 얻고자 했지만 부족했던 것도 바로 이 투명함이었다. 로스코가 물감을 얇게 칠한 건 이걸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겹 칠하면 먼저 칠한 것을 완전히 덮어 버리기 일쑤였고, 젖은 물감들이 배경으로 섞여 들어가서 불투명해지곤 했다.... 깃털을 쓰고 긁어내고 흘려 보고 할퀴어 보는 등 로스코가 하거나 하지 않았던 모든 일은 물감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  '숙달된 솜씨로 마감된 표면'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그 깊이를 보여주는 것, 즉 다른 수단을 통해 투명에 가까운 것을 얻으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모두들 로스코의 색의 비밀을 알고 싶어했다.

단순히 조화를 이루는 색들의 조합이 아니라 색 자체가 그 밑에 무수한 겹을 지니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 밑에서 배어나오는 무수한 뉘앙스들이 있다. 아무리 오래 그림을 보고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팜플렛에 실린 그림들을 사진 찍어 올렸지만 책 도판으로 한 번 색이 죽고, 사진으로 또 더 죽어 엉망이 됐지만 그래도 이런 그림이 있었지, 기억하고 싶어서...

당연히 여기 실린 색은 안타깝게 원색이 아니다.

 

넘버 10. 1949. 141X81.4

 

무제. 1950. 109.6X126.1

 

무제. 1951. 112.4X94.9

 

무제. 1957. 247.3X207.8

 

넘버5. 1958.167.6X105.2

 

"나는 큰 그림을 그린다. 역사적으로 큰 그림의 기능은 웅장하고 호화로운 대상을 나타내기 위함이겠지만, 내가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친밀하고 인간적이고 싶기 때문이다."

 

"내 그림들은 크고 색채로 가득하며, 틀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미술관 벽면들은 보통 광대하고 압도적이라 그림이 벽면과 장식적 관계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 그림들이 가진 의미를 왜곡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친근하고 강렬하며, 장식적인 것과는 대립적입니다. 심지어 건물 크기로 그려졌다기보다는 평범한 인간의 크기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전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듬성듬성 작품을 걸지않고, 빽빽하게 전시하곤 합니다. 즉, 작품의 느낌으로 전시 공간이 흠뻑 젖어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벽면은 힘을 잃고, 제 그림들이 지닌 신랄함이 더욱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그의 그림의 감상법으로 그림에 바싹 다가서 보기가 제안되고 있었다.

진작에 종종 내가 그림을 보던 방식.

시야를 그림으로 꽉 채워 그림 속으로 빠져들기.

캔버스 크기에 따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잘 보이는 그림들도 있고, 이렇게 아예 그림 속으로 들어갈 듯이 해야 잘 보이는 그림들도 있고.

(코를 박고 보는 또 다른 그림으로 김환기의 점 시리즈들이 있는데, 강신주의 책을 보니 김환기도 로스코를 참 좋아했다는구나.

그러고보니 수화가 뉴욕에 있을 때가 로스코가 활동하던 시기니 거기서 아마 로스코를 접했겠고, 뉴욕시대를 통해 환기의 그림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모했으니 어쩌면 로스코의 색면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걸까?

이렇게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어디선가 접점을 갖고 있는 걸 알게 되는 게 참 재미있다.)

 

로스코는 완벽주의자 였던 것 같다. 어떤 분야이든 대가치고 당연히 '적당주의자'는 없겠지.

작품 스케일에서 드러나듯 미터 단위의 캔버스를 밀리미터 단위로, 0.7mm만 더 크게, 혹은 작게, 하는 주문을 했단다.

2m짜리 그림이 1cm 더 크거나 작은 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그의 눈에는 그 차이가 용납이 안되는 거였겠지.

그래서 작품은 물론 전시도  일일히 스스로 설치, 감독하고, 전시 중엔 매일 전시장에 나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예술작품 조리법-성분들-공식

1.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이해-motality에 대한 암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비극적 예술, 낭만적 예술 등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룬다.

2.sensuality.  세계를 향해 구체적일 수 있는 우리의 기초. 그것은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계다.

3. tension. 갈등이나 억압된 욕망.

4.irony. 이것은 현대의 성분이다. 인간이 순간적으로나마 다른 무언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다.

5.wit와 play

6.the ephemeral(덧없음)과 chance(우연)

7.희망. 10퍼센트 정도의 희망은 비극적 개념음 더 견딜만하게 만든다. 난 그림을 그리 때 이런 성분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계량한다. 항상 이런 성분들에 뒤따르는 형식들이 존재한다. 그림은 이런 성분들의 비율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의 레시피. ㅎㅎ.

 

 

 

황금기를 넘어 벽화의 시대로...

 

내가 본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황금기때의 찬란한 색감의 그림들이었고, 리움 전시에서 처음 조용한 그림을 보고 아, 이런 작품도 있구나 싶었었는데, 후기로 가면서 점점 색감이 어두워진다.

내면의 풍경이 바뀌어 간다는 얘기겠지.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인정을 받고 명성을 얻은 케이스.

당대의 최첨단 빌딩이었던 시그램의 레스토랑 벽화를 의뢰받는다.

부자들만 드나드는 그 레스토랑에서 자기의 그림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껍질을 깨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그 식당을 방문해보곤 결국 거기선 자신의 작품이 한낱 벽장식으로 머물 뿐일 걸 깨닫고 어마어마한 계약을 파기해버린다.

그는 그렇게 순진하기도 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영웅주의에 빠진 사람이었나?

어쨌든 시그램 벽화를 위해서 준비하던 그림들이 남았는데, 스케치라고 돼있는 걸 보니 완성작은 아닌가?

점점 조용해져가는 이 그림들도 참 좋다.

 

이탈리아 여행 중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피렌체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입구, 미켈란젤로의 방으로 불리는, 벽돌로 막힌 창과 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문이며 창이지만 동시에 벽인...

 

무제. 1957. 231.9X176.7

 

무제(시그램 벽화 스케치). 1959. 183.5X152.7

 

 

 

그리고 로스코 채플.

휴스턴에 위치한 성토마스 대학의 예배당.

석유재벌 드 메닐 여사가 종파를 초월해 누구라도 찾아와 명상할 수 있는 예배당을 기획하며 로스코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이 그의 최상작들은 아니다.

뭐, 당연히 그렇지 하며 관람했지만 마지막 이 로스코 채플 섹션으로 그래도 전시가 꽉 차는 느낌.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을 재현한 어둑어둑한 둥그런 방에 걸린 흑백의 그림들. 저절로 고요해지는 마음.

편한 대로 관람하라고 그림 앞에 커다란 방석들이 놓여있고, 가운데 의자들이 놓여있고... 그저 생각을 버리고 물끄럼히 그림들을 바라다봤다.

그 어둠들이 어찌나 안온하고 편안하던지...

누구는 그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지만, 색을 다 버린 그 색들은 세속을 초월한 한 세계 같았고, 이젠 모든 것을 넘어 서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않게  된 깨달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제. 1963. 341.6X183.2

 

넘버 7. 1964. 236.4X193.6

 

무제. 1969. 229.6X275.9

 

무제. 1969. 137.8X173.4

 

 

 

 

그리고 로스코의 죽기 전 마지막 그림..

로스코 채플 작업 이후, 그는 부인과 별거하고, 동맥류로 앓아 눕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더이상 그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의사로부터 대작 작업을 하지말라는 경고를 받는 등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가는 가운데 스스로의 그림도 정점을 지나 더이상 스스로를 뛰어넘을 새로움이 나오기 어렵다는 걸 알았을 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무채에서 다시 강렬한 색면화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작품의 관리, 판매를 화랑에 위임하고 있었는데 그의 그림을 사고싶어한 한 사람이 화랑을 찾아가 그의 마지막 그림들을 보고는 그림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고 이 화가를 당장 찾아가 살펴야 한다고 했지만 묵살 당했고, 그 얼마 후 그는 자살한다.

마치 그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피빛 그림.

 

무제. 1970. 152.4X145.1

 

 

로스코, 이렇게 생겼구나.. 왠지 화가라기 보단 은행가나 사업가, 정치가 같아 보이는데..

 

전시를 본 후 궁금해서 읽어봤던 책의 느낌으론 그는 동시에 양 방향으로의 지향점을 가진 것 같다.

영적, 정신적 지향과 함께 세속적인 성공, 명성에의 집착, 게다가 책에서 드 쿠닝이 말하듯 사람들을 선도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가로서의 지향까지.

 

그가 태어난 곳은 옛 소련의 드빈스크, 지금의 라트비아다. 당시 소련에선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유태인은 일정 거주지역을 벗어나 살 수 없었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곳곳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문에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했지만, 이민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는다.

9년의 중등교육과정을 8년에 조기졸업할 만큼 영민해 예일대에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하지만 가난한 러시아계 유태인 이민자로서 대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 잠시 연극계에 있다가 우연히 미술을 하는 친구를 방문한 계기로 단번에 그것이 자기의 길이라 생각해 미술학교를 다닌다.

졸업 후엔, 전업작가였을 거라고 여겼던 내 생각과 달리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20여년간 미술교사로 일했다.

유태인이라는 태생이 그를 영적 지향점을 갖게 이끌었겠지만 동시에 고향에서의 목숨의 위협까지 느껴야했던 학대와 이민 온 낯선 나라에서의 가난과 멸시는 한편으로 사회적 성공에의 열망을 갖게하지 않았을지.

모짜르트를 그렇게 좋아했다지만 절대 모짜르트적일 수 없는, 오히려 바그너같고 말러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형태야 언제나 변하지만 색이야말로 보다 원초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일 수있겠다.

색으로  쓰여지는 드라마, 그 만의 독특한 어법.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그 세계.

 

 

 

 

 MARK ROTHKO 마크 로스코 : 『Vol. 1: 작품들』, 『Vol. 2: 소통 표현주의: 강신주 저. 민음사.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아니 코엔 솔랄

 

 

 

"겨울 눈 덮인 오리건의 광활한 풍경은 무이면서 동시에 전부이기도 한, 기념비적인 텅빔 속에 잠겨 있었다."

 

'로스코의 통일성에 대한 강렬한 추구는 '세계를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티쿤올람(tikkun olam, '세상을 고치고 개선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교의 기본 원리의 하나. 신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일부는 신의 협조 파트너인 인간의 몫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에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들은 창조 작업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을 연상시킨다.....

유대교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인 예언은 현상태의 세계를 고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존재했던 세계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을 의미...

 

'드 쿠닝은 로스코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에 최면이 걸린'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역할, 즉 메시아의 역할이었다"

 

"나는 지금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 그림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서 나 자신을 넘어서는 작품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야"

 

'우리는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라는 장애물, 즉 우리가 한때 사용했던 유럽적인 회화의 도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나 인간 또는 '생명'으로부터 대성당을 만드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성소를 만들고 있다.-바넷 뉴먼'

 

"그림은 예리한 감성을 지닌 관찰자의 눈을 통해 살아가며 생명력을 얻는다. 그림이 죽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그림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고 냉정한 행위다."

 

'우유부단한 가정주부를 위해 페인트공이 준비한 견본 세트'

(재미있는 평.  당시 그렇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제니스 갤러리에 전시된 마크 로스코의 음울하고 음침한 캔버스들에서 우리는 혼란의 기류보다는 엄숙한 침묵을 만나게 된다. 그림들은 기본적인 모습에서 드러나듯,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인 용어로 구성되었다.....

미묘하고 까다로우며 개인적인 것을 개입하지 않고 그린 그림들은 빛과 공간의 이미지다. 그것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았지만 마치 자연을모방한 것 같은 공명을 자아낸다. 자욱하고 어두우며 종종 격정적인 색채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각형은 캔버스의 바닥에서 위를 향해 장엄하게 떠오른다...... 그의 그림은 자립적이다. 시각적인 세계에서 단절된 채 그림은 형태와 색의 조화를 느끼는 예술가의 감정의 세계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 1903년트코비치가 9월 25일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안나 골딘과 야콥 로트코비치 사이에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 1910년 아버지 로트코비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정착하다.
  • 1913년 마르쿠스와 어머니, 누이가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가족들이 다시 모이게 된다.
  • 1914년 아버지가 사망하다.
  • 1921~23년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위치한 예일대학교에 입학하다.
  • 1924년 뉴욕 시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SL)에서 조지 브리지먼의 해부학 강의를 듣다.
  • 1925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의 회화 수업을 듣다. 웨버의 영향으로 표현주의의 양식으로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다. 채색하기 전에 언제나 밑그림을 그리곤 했다.
  • 1926년 웨버 밑에서 계속 회화 공부를 하다.
  • 1929년 브루클린의 유대인 센터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 1932년 밀턴 에이버리와 아돌프 고틀리브를 만나 친구가 되다. 이디스 사샤와 결혼하다.
  • 1933년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센터 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수채화를 제자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다.
  • 1935년 독립 미술가 협회 ‘더 텐’을 공동창립하다. 벤 자이언, 아돌프 고틀리브, 루이스 해리스, 잭 쿠펠트, 루이스 샹거, 조지프 솔먼, 나훔 차즈바조프 그리고 일리야 볼로토프스키 등이 회원이었다. 로스코는 1940년 그룹이 해체되기까지 ‘더 텐’과만 전시회를 열었다.
  • 1936년 뉴욕의 공공사업촉진국(WPA) 회화부에서 일하다.
  • 193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다.
  • 1940년 이때부터 마크 로스코라는 이름만 사용하다.
  • 1941년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로 종이나 캔버스에 그리다.
  • 1944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추상화를 수채, 구이슈, 템페라로 종이에 그리다. 이디스 사샤와 이혼하다.
  • 1945년 마리 앨리스(‘멜’) 비스틀과 재혼하다.
  • 1946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마지막 작품을 종이에 그리다.
  • 1947년 멀티폼의 등장으로 점점 더 추상화 경향을 띠고, 이것은 몇 달 후 후기작을 특징짓는 사각형 색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종이에 그리는 일이 적어진다. 뉴욕의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 1948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미국 조각, 수채, 그리고 드로잉 연례 전시’에 참가하다. 어머니 케이트가 가을에 사망하다.
  • 1949년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치고 현대미술 강의를 맡게 되다.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성숙기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하다. 이후 작품 제목은 모두 번호와 제작 연도로만 이루어지게 된다.
  • 1950년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하다. 딸 케이트가 태어나다.
  • 1951년 브루클린 대학의 드로잉 교수가 되다.
  •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유명한 ‘15인의 미국인전’에 참가하다.
  • 195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개인전을 열다.
  • 1955년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 1958년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벽화 제작을 맡게 되다. 뉴욕 MOMA에서 회고전.
  • 1961년 하버드대로부터 홀리요크 센터의 식당 벽화 주문을 바다.
  • 1964년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에게 고용되어 휴스턴의 새 예배당을 위한 기념비적 벽화를 제작하다.
  • 1966년 세 번째로 유럽을 여행하다.
  • 1968년 동맥류를 앓아 3주간 병원에 입원하다.
  • 1970년 2월 25일에 자살하다.
  • 1971년 텍사스 주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당의 봉헌식이 거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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