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다카이 준
병실 창문의
하얀 커튼에
오후 햇살이 드리워져
교실과 같다.
중학생 무렵
내가 좋아했던 젊은 영어 선생님이
칠판 지우개로 분필 글씨를
깨끗하게 지우고
교과서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 위로 오후의 태양을 받으며
'그럼 여러분' 하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딱 그때와 같이
나도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
모든 것을 사뿐히 지우고
'그럼 여러분' 이라 말하며.
우연치않게 읽게 된 <시한부 3개월은 거짓말>이라는 책에 수록된 일본 시인의 시다.
그가 식도암에 걸려 죽기 전 해에 발표한 <죽음의 늪으로부터>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라고.
2,3행을 쓰고 며칠을 쉬고, 다시 2,3행을 적는 식으로 '쥐어짜듯이 쓴 마음의 궤적'이라고.
그는 이런 시도 썼다.
울어라/울부짖어라./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좋다./웅크리고 작아져서 울지 마라./고름과 피범벅의 거즈여,/그리고 나의 마음이여
-'울부짖어라'
저자는 쓴다. ''자신의 죽음'은 머리로 생각했던 죽음이나 자신 이외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 소리치고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는 강렬한 고통과 슬픔과 공포'라고.
태어난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피할 확률은 제로이며, 언제건 어느 때 건 예측할 수도 없이, 예고도 없이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것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만큼이나 당연한 일임에도 우리는 늘 숨을 쉬고 있음에도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 죽음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 간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두가 비록 하루 하루 늙어는 갈지언정 그렇게 영원히 함께 존재해 살아갈 줄로 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벼락치듯 갑자기 주변에 어떤 죽음의 그림자가 나타나면 그제서야 죽음이란 것의 존재를 되새기며 경악하게 된다.
참 희안한 일이지.
그렇게 당연하고 상존하는 것을 그렇게나 철저히 잊고 살아간다는 건.
책 속의 시가 참 인상깊었다.
시를 읽으며 문득 언젠가 내게도 올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시처럼 그렇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암 전문의로 수많은 환자의 죽음의 과정을 지켜본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죽음의 늪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삶을 마감하고 싶을까?' 하고.
'자신의 임종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커다란 주제'라고.
죽음은 삶의 이면.
언제가 죽음이 왔을 때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저자가 던져 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나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곤도 마코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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