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봄-황동규

바다가는길 2017. 4. 16. 17:41

 황동규 문학과 지성사. 2016-11-24







살 것 같다



49일간 하늘이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간을 펴고

오늘은 아침부터 밝고 가벼운 구름장들 날리고 있다.

살 것 같다.


열흘 전인가 문득 환해진 저녁 약수터로 올라가다

물먹은 흙에 숨어 있던 나무뿌리에 걸려 엎어지고 나서

아예 생각 뒤편으로 제껴놨던 언덕길이

슬그머니 마음 한가운데로 되돌아왔다.

살 것 같다.


그동안 들이치는 우산 받고 빗소리 속을 걷거나

와이퍼 고속으로 돌려야 얼핏얼핏 앞이 보이는 차를 몰거나

비 그쳐도 온몸에 습기 차 가던 길 잊고 망연히 서 있거나

제대로 한눈팔지도 못한 눈까지 지끈지끈,

끝 무렵엔 산다는 게 무겁게 매달리는 저울추였지.


이제 무거운 추 떨어졌으니 홀가분해진 서부영화의 늙은 악한처럼

총알구멍 뚫린 맥주통 문 앞에 세워논 살롱 앞에서 얼씬대다

엉뚱한 총탄에 맞더라도

회환 같은 것 없이 환히 비틀거리거나

맥주통에 두 손 얹은 채 생뚱맞게 서 있을 거다.








햇빛에 놀란 무지개 춤



밤새 눈이 내렸다.

언덕 오르던 산책길이 능선으로 풀리는 곳에

나무 그루터기 의자,

봄 여름 가을, 잠깐씩 걸터앉아 오가는 사람 바라보던

모르는 새 거리 좁히던 다람쥐도 만나고

점차 눈치 덜 보는 새와도 눈을 맞추던

톱에 잘려 위를 온통 비운 나무 그루터기 의자,

(그때 뿌리의 신경 얼마나 저렸을까?)

오늘은 햇빛 눈부신 하얀 보를 위에 깔고

새 발자국 몇, 갈색 깃 둘을 올렸다.

신선하고 예쁘다.


어느 누구 새가 깃을 빼놓고 갔지?

혹시 최근에 나와 눈 맞추던 새,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 몸 부르르 떨다가?

빼논 깃만큼은 더 떨었겠지.

탁! 지빠귄가 갈색 새 하나 옆 덤불을 박차고

눈 쌓인 나무로 뛰쳐 오른다.

쌓인 눈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며

앞을 가리는 눈가루 막 속에서

햇빛에 놀란 무지개가 춤춘다.

누군가 몸을 부르르 떤다.








세상의 끝

-2012년 봄, 호주행 반년 후, 제주도에서



인적 점점 졸아들어 호주 남동쪽 끝이

정말 세상의 끝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파도 줄줄이 들이쳐 하얗게 부서지고

물러났다 또 와 부서져도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는

괴팍하게 생긴 나무들이 눈 감고 바람에 몸 맡기고 흔들대는

바다까지 달려갔다.

9월 4일 초봄, 한반도와 계절은 거꾸로여도

해는 역시 동쪽에서 뜨고

유채꽃밭들이 넓게 노래하는 길에

고장 난 차 하나 사람 하나 서 있었다.


제주도 섬 휘파람새들이 뭍 휘파람새들보다

끝을 늘인 휘파람 분다.

거센 바닷바람이 휘파람 끝을 살짝살짝 잡아당겼겠지.

제주도 남동쪽 끝

실루엣이 평평해 우습게 건너다뵈는 지귀도 벗어나자

물 빠지는 소리처럼 훤히 열리는 바다,

아직 겨울옷 입은 소철들이 몸부림 없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공간,

유채꽃이 막 땅에 색칠을 마쳤다.

갈매기 몇 나는 둥 마는 둥 하는 벼랑길에

고장 난 차 하나 사람 하나 서 있었다.


언제부턴가 고개 기울이고 허공 트랙을 달리는 지구








오체투지



살 저미는 바람 맞고 피하고 맞다

살에 스치는 바람결 살가워지면

골목길 담장들 위로 큰 꽃 작은 꽃들 얼굴 내밀고

안 보이던 꽃도 보인다.

서커스 하듯 줄 타고 오르는 꽃도 있다.

벌써 시들고 있는 꽃은 눈짓으로

'지금 막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어느샌가 새끼손톱 같은 열매를 아래 매단 꽃도 있다.


짧은 비 그치자 밝아진 골목길에 달팽이 하나

몸보다 큰 소용돌이를 등에 지고

끝에 눈 달린 두 더듬이 좌우로 헤저으며 기고 있다.

시멘트 조각 하나를 힘들게 피한다.

눈물보다 더 진득한 분비물을 온몸에 두르고

오체투지 하고 있군.


슬그머니 승용차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바퀴 바로 앞의 오체투지!

달팽이가 더듬이 조심조심 내저으며 침착히 기어

바퀴 폭을 벗어난다.

볼 것 다 봤다는 몸짓을 하며 나도 자리를 뜬다.

볼 것 다 보았다니?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








춤추는 은하



창밖에 포근한 융단 깔리는 느낌 있어

눈 비비며 발코니로 나간다.

흰 눈이 8층 아래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건너편 축대를 한 뼘 가까이 돋우고, 흥이 남아

공중에 눈송이를 날리고 있다.

마당 가득 하얗게 살구꽃 흩날리던

정선군 민박집의 아침이 8층 높이로 올라!

새 꽃밭 찾아낸 벌들이 8자형 그리며 춤추듯

눈송이들이 느슨한 돌개바람 타고

타원을 그리며 춤춘다.

살랑대는 저 춤사위, 지구의 것 같지 않군.

그래 은하의 춤!

은하 속 어디에선가 꽃 피운 행성 하나 찾아냈다는 건가?

잠깐, 기억들 다 어디 갔지?

뇌 속이 물 뿌린 듯 고요해지고, 살랑대며 춤추는 은하가

천천히 돌면서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몸을 내민다.







마지막 날 1



하늘 한편이 기울 만큼

갈까마귀 줄지어 날아가는 꿈을 꾸다 깨니

초여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하고

옆방에서 전화하는 아내의 말소리가

새소리처럼 눈부시게 들린다.

이제 시간 밖으로 나갈 시간,

눈에 띄지 않게 슬그머니 현관에 나가

우산꽂이에서 우산을 뽑아 들고

손가락으로 신발을 꿰신으려다

허리를 펴고

신발장 고리에서 구두주걱을 빗겨 든다.


문을 열자 열린 층계 창을 통해

확 달려드는 빗소리와 싱그러운 물비린내,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챙기지 않고 가지?

허나 생각을 벌기 위해

빈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내지는 않을 거다.







마지막 날 2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사방에 녹음 넘칠 때 가고 싶다.

초여름 농사철 막 끝난 후

조금 한가해진 신작로를 걷다 가고 싶다.

녹음이 자연의 본색이라서가 아니다.

겨울밤, 낮에 물고기 잡은 얼음 구멍에서

크고 작은 두 별이 도란대며 나란히 헤엄치는 모습처럼

자연의 품을 더 살갑게 보여주 것도 있지 않은가?


냄새 자욱한 밤꽃이 가실 무렵

모든 추억의 냄새가 녹음처럼 다 비슷비슷해질 때,

우회도로 난 후

길 한가운데까지 쳐들어온 자갈과 풀에 신경 주지 않고 걷다

갈림길에서 그만 길을 잃는다.

두 길이 양 옆에서 춤추듯 설렌다.

평생 한 길 취하고 다른 한 길 버리는 일 하고 살았으니

마지막 한 번쯤 한꺼번에 둘 다 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젊은 시인에게



선배랍시고 한마디 한다면

시에도 시독(詩毒)이 있네.

일단 삼키면

꽃들이 근접촬영, 근접촬영! 얼굴 들이밀고

뭇 벌들 일제히 꽁지 구부리고 달려들지,

주위 사물의 범상한 표정들, 홀연히 진해져

시신경 파고드네.

해독제를 찾아 인사동, 몰운대, 해남 땅끝,

지도에서 막 지워지고 있는 강원도 폐광촌을 헤맸지.

해독제는 중독된 다음에나 찾게 되는 것,

그때는 이미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네.


입 열었다 하면 늘 아귀 척 들어맞게 말하는 신기한 사람들

그리고 자주 만나도 도무지 지겹지 않은 비비 꼬인 사람들과도

허허롭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다면,

생각의 진실, 오래 남아 소중하고

느낌의 진실, 즉시 사라져 절실하다는 한물간 소리도

새 물건처럼 들을 수 있다면,

누런 시 가습에 주렁주렁 매단 시인들 큰길 가게 하고

목에 두른 시구 같은 것 모두 풀어버리고

시원하게 '나'도 풀어버리고

시가 아니어도 좋은 시의 세상에

길 트시게.








잔물결들



제주 동남쪽, 외갈매기 덜 울어 덜 적적하고

걸어가면 해조 냄새만 조금씩 바뀌는 곳,

큰길 아니고 '올레길'도 아닌

바다 쪽 벼랑 위로 섬쥐똥나무들 촘촘히 한 줄로

상반신 내밀고 있는 길.

혼자 걷는 발걸음 절로 느려지고

생각의 속도 줄어드니

풍경들도 가다 서다 하는 곳.


돌부리 차며 언뜻 뒤돌아보니

오래전에 인사 나누고 잊은 명사(名詞)같은 사내 하나

무언가 흥얼대며 뒤따라온다.

걸음 멈추고 바다를 보면 그도 서서 바다를 본다.

수면 가득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와 스러지는 잔물결들.

내가 발을 떼자 그도 움직인다.

이거 뒤를 밟는 거 아냐?

굽은 길 돌다 걸음 멈추고

쥐똥나무 머리를 쓰다듬는다.

등 뒤로 그림자처럼 그가 천천히 지나가고

어깨 한 번 으쓱, 거리 두고 내가 뒤따른다.

그가 서자 나도 선다.


다음번 굽은 길을 돌며

허리 굽혀 쥐똥나무에 얼굴을 대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는 그를 조심히 지나간다.

생각난 듯 괭이갈매기가 울고

해조 냄새가 바뀌고

바다가 쥐똥나무 울타리를 걷어버린다.

저 앞에 천천히 혼자 가는 사람 또 하나!

그가 서자 나도 선다. 저도 모르게 몸에 돋는 소름.

가거니 서거니 자리 바꾸거니

그래, 건드리면 간지럽게 잦아들 잔물결들!








반짝이고 만 시간의 조각들



나도 모르게 왈칵 가슴에 안겨졌던 벅찬 젊음은

어디 주체 못 하고 마냥 안고 떠들기도 한 젊음은

품에 안았던 느낌마저 내놓고 가더라도,

겨울 오후 햇빛, 건물 내부를 온통 눈부신 빛으로 만들어

나도 빛의 일부인 양 황홀히 녹았던 시에나 대성당 추억 같은 것도

자진해서 반납하고 가더라도,

별 볼 일 없이 반짝대다 마는 삶의 사금파리들까지

치우고 가라고는 않겠지.


희부연 봄 하늘에 약간 서쪽으로 기운 해

노란 유채꽃밭에 노랑나비 흰나비들 모이고

꼬리 긴 오목눈이 한 떼 약속한 듯 한꺼번에 와르르 날아오르는,

기차는 뵈지 않지만 철길이 알맞은 곡선으로 휘돌고

젊은 남녀가 손잡고 철길을 걷다

둑 아래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부는 듯 안 부는 듯 산들바람 속에

날벌레들 공중에 박힌 조그만 눈들처럼 떠 있는...


여기 어디에 빗자루를 대겠는가?








바가텔(Bagatelle)


 

잔눈 맞고 밟으며 왔다.

어느 결에 눈이 그치고

달도 별도 없는 바닷가

파도도 물소리도 없다.

먼 데서 울던 밤새 소리도 없다.


어둠 속에서 혼자 불빛 비추고 있는 등대

나무 몇만 사는 조그만 섬도 길 잃은 배도 없는

수평선마저 없는 바다를 천천히 훑고 있다.

더 없는 것은 없나? 반복해 훑고 있다.

가만, 마음에 모여 있던 생각들 다 어디 갔지,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순간 가슴 한끝이 짜릿해진다.

이 짜릿함 마음의 어느 함에 넣을까?








초행길 빈을 뜨며



바닥에 깔린 돌들 반들반들, 빗물에 빛나는 골목들,

가보진 못하고 혀에서만 맴돈 쇤부른 궁전,

둘 다 같은 마음으로 이별한다.

너무 검소해서 천장이 더 올려 뵈는

스테판 대성당,

소리 없이 가을비 내리는

긴 퇴적토 섬이 둘로 쪼갠 도나우 강,

벼르고 찾아갔다가 금시 제자리에 두고 온 만남들,

그것으로 족하다.

벨베데레 궁, 클림트와 함께

인간의 황금빛 속마음을 들여다본 곳,

어느 하나에도 못 들러본

열셋이나 된다는 모차르트하우스

둘 다 한목소리로 노래하리라.

세상의 좋은 것 다 보고 가려는 욕심

거품 좋은 맥주잔 수평으로 기울이듯 비웠다.

노래의 불빛이 가수의 불빛보다 먼저 스러지기도 한다지만

본 것도 못 본 것도 함께

궃은 날 마음에 군불 지피듯 노래하리라.

소리없이 내리는 가을비

수평으로 환해진 골목들.





자꾸 떠날 준비를 하시네..

어느덧 문지모임에서 최연장자가 되고, 지지난주 만났던 동창의 부고를 받고, 둘도 없이 친한 친구도 곁을 떠나고..

비소리는 점점 볼륨이 줄고, 자꾸 발은 뭔가에 걸려넘어지길 잘하고, 꽃들의 이름이 지워지고, 길이 낯설어지고..

자꾸 마지막 날을 상상하시네..

인생의 막바지의 날들은 어쩌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연옥과도 같은가?

하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하나의 온전한, 선연한 풍경들을 마음 속에 그려놓는다.

여전히 마음을 울리는 힘을 지닌 시들.

천천히 몇 번을 읽고, 이게 좋은가, 저게 좋은가 별로 따지지않고 눈이 가는대로 몇 편 옮긴다.

바라기는, 문지에서 유래없는 최연장자가 되시길.

반가운 시집을 계속 만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