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 2014.
'장미의 열반',
한 다발의 장미를 매일 한 번씩 촬영한다. 나흘째에 장미는 만개했다가 서서히 시들어 열흘이 넘자 시들어 검붉게 마르고 향기도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바싹 마른 검은 장미를 촬영하고, 더이상 아름다운 색도 향기도 품지않은, 장미라는 특성을 다 잃고만 그것을 폐기하려다 문득 호기심에 마른 장미를 태운다. 바싹 마른 장미는 단번에 화르르 타오르며 놀랍게도 활짝 만개했을 때보다도 더한 진한 장미향을 흩뿌린다.
더이상 장미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재로 남으며 가장 강한 장미향기를 보였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먹는다.
끝까지 탐구하지 않는 한 어떤 것의 실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대상의 대충의 모습으로 그 본질을 가늠했다 생각하지만 그건 다 편견이고, 오류일 뿐이다, 라는 각성.
그것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몇 년 전 본 김아타의 전시 사진들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때문에 이 책을 본 순간, 단번에 흥미가 생겼었다.
책은 초창기의 작업부터 최근의 것까지 어떤 동기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 결과에 이르렀는지 진솔하고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때 전시 때 다른 작품들은 참 공감이 갔지만 유독, '뮤지엄 프로젝트'만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않았었는데, 책을 통해 맥락을 알 수 있었다,
잡다한 것들 다 빼고 오로지 스스로의 철학과 고뇌와 치열한 인생과 작업에 관한 탐구와 그것들이 작품으로 결실을 맺는 그 과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글들은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거의 감동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진정을 다해 사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내가 전시에서 봤던 작품들은 물론 보지못한 그 이전과 최근의 작업들까지 알 수 있어 좋았고, 오랜 숙고들로 얻어진 분명한 생각과 논리로 솜씨있게 쓰여진 글들은 잘 정련돼있어 걸리적거리는 것없이 술술 재미있게 읽혔다.
글은 대중에게, 자기를 알고 자신의 작품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을 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이해를 구걸한다기 보다 자신의 것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보였다.
세상을 보고자 정신병원에서 수 백명의 환자를 찍고, 평생을 한 일에 매진했다면 그에 합당한 그들만의 정신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백 여명의 인간문화재들을 찍고, 탄광의 막장을 찾고, 곡마단을 찍고, 소아암 환자들과 핵에 피폭된 아이들을 찍고.... 세상의 온갖 곳을 찾아다니며, 그의 말로 '세상을 다큐하기'.
그는 거의 구도자이다. 어쩌면 사진은 그냥 그 구도의 작은 결과물일 뿐인지도 모른다.
돌, 풀, 물, 사소한 자연에서 주변의 온갖 사물들을 대상으로 이미지 트레이닝, 그 과정을 보니 명상, 참선과 다름 없다.
그리고 일부러 시각을 가리고 온 몸을 체험하는 훈련, 한 시간에 10 cm 움직이기, 그저 의심없이 당연히 여기는 정신의 습관들을 깨부수려 하는 온갖 희안한(?) 트레이닝들.
달빛, 별빛으로 사진을 찍고, 그 후 본격적인 <해체>, <뮤지엄 프로젝트>, 8시간 장노출의 <온에어 프로젝트>, 13곳의 도시에서 각각 1만 컷의 사진들을 찍어 레이어드 하고,
그렇게 이어져 온 수 십년의 작업과 그 작업을 이룬 그의 삶의 어마어마한 부피와 질에 놀라며 읽었던 책.
...한 다발의 장미를 준비하여 매일 같은 시간 하루에 한 컷씩 장미를 촬영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나흘째 빨간 장미꽃이 만개했다. 장미는 아름답고 꽃은 향기로웠다. 그리고 또 나흘째 되는 날, 장미꽃은 시들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열이레 되던 날, 바싹 마른 장미는 더 이상 향기를 내지 않았고, 붉은 장미는 검붉게 변해버렸다. 장미향은 사라졌다. 그날 나는 마지막으로 바싹 마른 장미를 촬영하였다. 촬영을 마무리하고, 이미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한 장미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장미를 불태우기로 하였다...
마른 장미잎에 성냥불을 붙이는 순간 장미는 기댜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연기와 함께 타올랐다. 그 순간,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나의 뇌를 마비시킬 정도의 강한 향기 탓이었다...향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장미에 대하여 알고 있던 나의 상식은 무참히 깨어졌다...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장미 쓰레기들이 졸지에 불타면서 내는 향기는 장미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해체해버렸다.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나의 관념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것이 진정한 열반인가?
아름다움의 상징, 향기로움의 대명사, 장미는 사라졌고 까만 재만 남았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순간 장미는 감춰져 있던 새로운 경지를 내어놓았다.
장미의 열반, 열이레 동안 마른 장미를 불태웠던 그 날의 우연한 충격은 사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마지막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기로 하였다. 두드려보고, 만져보고, 핥아보기로 하였다. 고갯마루를 넘을 때도 시선을 거두지 말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지독하게 관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설사 상대가 나를 버리더라도 고개를 돌리지 말고, 죽어서도 외면하지 말자 했다. 한없이 탐미하고, 되새김질하고, 비로서 세상에 말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 장미의 열반은 나의 인식 체계를 송두리째 바꾼 개벽이고 혁명이었다. 장미는 열반에 들면서 내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세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예술행위는 사무라이가 칼로 상대의 목을 베듯이 대상을 도려내거나 죽이는 행위가 아니다... 살아 있는 대상의 정신을 고스란히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완성하게 하는 과정이 대화이고, 하나가 되는 순간이 화해이다. 이 과정은 대상이 인간이거나 혹은 바위와 풀 같은 오브제라도 다르지 않다...
이질적인 두 물체와 담론을 융합하고자 할 때 서로의 정체가 살아 있으면 절대 하나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끝없이 자신의 철학과 지식을 발산하는 경연의 장이 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맹렬하게 서로의 에너지와 정체를 완전히 소진할 때, 내가 대상 속으로 완전히 몰입할 때, 나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며 그 순간은 텅 빈 공간이 된다.
기의 정점이 정신의 정점은 아니다. 정신은 혼과 기가 고도로 정제된 것...기와 액션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나와 대상에 내재된 정신세계가 스며 나와야 한다... 대상이 가진 정신이 고스란히 나를 거쳐 세상 속으로 간다.
...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정체를 제대로 보려면 나의 정체가 먼저 온전해야 한다... 스스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세계를 만나더라도 페이지만 늘릴 뿐이고, 늘어나는 아카이브는 나의 카르마가 되어 한으로 남는다...
이미지 트레이닝-관념은 이 시간까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사회의 관습과 습성을 다 가지고 있는 덩어리가 관념이다. 그래서 관념 덩어리인 인간이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관조한다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는 사물의 객관적인 정체와 나의 정체가 온전히 지켜진다. 사물에 깊이 빨려 들어가서 동화되지도 않고, 대상과 아가 온전히 살아 있는 생태이다... 대상에 대한 존중함을 포기하지 않고 사물에 대한 관조적 관계하기를 하루, 이틀, 일 년, 십 년을 치열하게 내적인 투쟁을 하면, 어느 순간 내가 대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가 대상에 대한 나의 관념의 세계가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대상의 세계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세계와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관계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어 한 포기의 풀을 대상으로 관조한다고 할 때, 그 풀에 대한 나의 선 이해는 한 두 시간이면 거덜난다. 그런데 풀이란 존재는 내가 알고 있느 그것이 전부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일부분에 불과하다. 일부분을 이해한 것을 전체를 아는 척하는 것은 대상을 무시하거나 존재적 살인을 하는 것과 같다... 관조단계에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의문과 만나게 된다..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있다. 이 순간이 몰입의 순간이다.
몰입단계에서는 내가 대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 이 때 나의 정체, 아는 없고, 오직 대상, 타만 존재한다... 순간 몰입의 세계, 무아의 경지로 간다. 모든 것이 멈춘다. 무아의 세계이다. 매우 환상적이다. 영원하고 싶은 세계이다... 내적인 몰입에 이르려 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가능하다.. 관념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절대로 몰입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과정은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 대화이다... 대화는 화해하게 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나지만, 그 완성은 화해이다.
해체는 몰입의 과정 뒤에 어느 순간 찾아오는데, 그것은 축복과 환희의 세계이다... 이때는 대상 타도 없고, 나 아도 없는 전혀 새로운 공간, 열려 있는 세계이다. 격렬한 투쟁 뒤에 오는 그 해체의 공간은 하얗고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이 공간에 새로운 세계가 폭풍처럼 밀려든다...
아마도 이 책을 쓰는 가장 큰 이유도 몰입과 해체 뒤에 찾아오는 환희와 축복의 세계, 이 순간을 설명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해체는 파괴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관념이 파괴된 공간에 새로움이 구축되는 긍정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해체의 완성은 하얀 백지처럼 무한 열려 있음이다. 하얗게 비어 있음은 어떤 세계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엄청나게 밀려오는 것들을 자신이 잘 다스릴 수 있는 도구로 주워담으면 된다. 이것이 새로움이다. 시가 되고 영화가 되고, 음악이 되고, 파인 아트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은 나 아닌 것에 무한 존중하는 긍정적인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마음이 대화의 시작이다...
<해체>-관념의 해체, 인간의 무한 진화주의에 대한 반성. 자연이란 밭에 인간을 볍씨로 뿌리기.
<해체>가 나의 관념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는 반성적인 작업이었다면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뮤지엄 프로젝트>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한 존재 의미를 나의 사유와 실전의 집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성과 폭력과 전쟁과 이데올로기와 동시대의 희, 로, 애, 락을 나의 사적인 박물관 유리박스에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기존의 박물관에서는 유물적인 가치가 있거나 화석이 된 죽은 오브제를 유리박스에서 영원히 살게 한다면 나의 사적인 박물관에서는 동시대의 살아 있는 것을 영원히 살게 한다. 말하자면 나의 사유와 실존의 집이다.. 유리박스는 현재를 과거로 가게 하는 타임머신이며 의미를 부여하는 언더라인이다...
'모든 사물은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세상에서 유일하고, 박물관에 있는 그것들보다 더 소중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기.
사진과 영화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 오브제를 적당하게 구획, 정리하는 단계인 프레이밍으로 완성된다. 프레이밍은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에서의 사각 프레임은 단절이 아니라 프레임 밖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현재이다. 회화에서 프레임은 작가의 구성에 의하여 정리된 것으로 보지만, 사진에서의 프레임은 현실에서 잘라낸 것으로 자연에 연필로 선을 그은 것과 같다. 그래서 프레임에 구성된 이미지들은 한 컷의 사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으로 연속된다...
...사진은 모든 현상을 정지시킨다.. 한 컷의 사진은 영원한 미장센이 된다. 영원한 시간의 여관, 시간의 화석...
<온에어 프로젝트>-온에어 프로젝트는 '뮤지엄 프로젝트'의 해체이다. 온 에어는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형상을 말한다. 유한한 존재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관점이다.
'모든 사물은 결국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긴 노출시간은 사라지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빨리 사라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천천히 사라진다"
..<온에어>는 역설이다. 사라지는 것을 선체험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역설한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가치가 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한다. 오브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시공 속에 존재하며 시공은 놀이터가 된다... 하나의 의문이 가지치기 시작하면 의문은 삽시간에 몇 배로 늘어나서 종극에는 우주로 간다.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티스트의 길이다. 마음속에 천 근의 철학과 사상이 있더라도 형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아티스트의 길이다. 난해하고 난감하지만 축복이다. 화두를 안고 날밤을 새우고, 해를 넘기기를 수십 년이다. 풀리지 않는 화두를 파트너 삼아 춤을 추듯 즐기면 어느 새벽이라도 좋고, 아니면 볼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만나는 날, 화두는 새털처럼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것을 주워담으면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인달라>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진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아도 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기에 더 분명해진다... 나의 인달라는 사진의 생명이자 정의와 같은 사실성을 무화시키고 의문점을 가지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인달라는 기록하고 기억하여 재현되는 사진의 기본 어법을 정의하는 데 역설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인달라는 상대적으로 보이는 사진을 더 선명하게 한다. 사진의 설명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을 구상성과 추상성에 대한 고민에서 해방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소중한 값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 것이다. 이미지가 없는 것도 이미지다. 아무 것도 없음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마음이고, 추상이고, 예언이다.
나는 베니스에서 절감한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종이 자신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음을. 바람이 풀을 지나는 소리가 다르고, 전선을 지나는 소리가 다르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소리를 낸다. 나를 봐달라는 속삭임이고 아우성이다. 베니스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눈을 맞추고 베니스의 모든 것을 채집하려는 나의 의지도 나의 소리이다.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더라고 인간들의 삶은 자신의 소리와 같다. 종소리와 자신을 던지는 소리는 각지거나 둥글거나 아름답거나 낯설거나 슬플 뿐
...전 세계 1백여개 나라의 남자 한명 씩, 1벡명을 촬영하여 레이어하였던 <셀프포트레이트>... 1백 명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형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한 작품, 열세 명의 남자 모델이 열 두 제자와 그리스도를 번갈아가며 연기를 하여 작품 속의 모든 동작에는 열세 명의 정체성이 겹쳐 있게 하였다. 베드로 속에 유다와 그리스도가 겹쳐 있고, 그리스도 속에 유다와 베드로가 함께하게 하였다. 모든 인간 속에는 배신과 구원과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인자가 함께한다는 메시지다..
...작업의 밀도가 크고 깊을수록 내가 얻는 것은 많다.
지금, 지난 시간을 길게 회고하는 이유는, 이 사건들이 나 한사람의 기적이기를 바라지 않아서다. 하나의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고, 역사가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나는, 우리는, 모두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신화의 주인공이라 믿는다... 분명 당신은 당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드러내면 된다.
<인달라>-'온에어 프로젝트'의 마지막. 색과 공에 대한 해체였고 나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작업이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듯이 전 세계의 역사적인 열세 도시를 주유했다.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한 도시의 만 개의 사진을 겹치기. 뉴욕, 워싱턴, 모스크바, 도쿄, 프라하, 베를린, 런던, 파리, 서울, 로마, 아테네, 베니스, 델리.
만 컷의 사진을 레이어하여 완성된 최종 이미지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회색 이미지이지만, 물리적으로 1만 컷의 사진이란 엄청난 정보가 들어 있다. 1만 컷에는 내가 사진의 어법에 충실하게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정성 들여 촬영한 그 도시의 거리와 건물과 사람들과 서건들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회색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1만 컷의 사진에 녹아 있는 수많은 사건과 아이덴티티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해체의 과정이 '공즉시색'이다...만 컷의 사진이 하나가 되어 각각의 기능은 죽었지만, 한 컷의 사진에 내재하던 아이덴티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덕경', '논어', '반야심경', 경전의 수백, 수천 자의 글자를 하나씩 집자하여 겹치기.
모든 언어에서 하나의 워드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과 바람, 모래, 바위,나무, 홀씨, 개와고양이, 온갖 동물과 미물, 사람 등,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의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은 경이 된다.
세상은 경의 요람이다, 하루를 사는 것은 경들을 만나는 과정이며 경들과의 여행이다. 나는 그것들을 경외한다...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의미가 있다면 텍스트가 진리의 요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
<자연드로잉>에서 캔버스는 내가 서 있을 자리에서 나를 대신한다. 내가 비바람을 맞고, 눈보라를 마주해야 할 일을 캔버스가 대신 한다.
예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나의 캔버스에는 세상에서 전해들은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떤 곳에서 어느 정도 천착하고 자신을 투쟁 혹은 기투하였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투쟁의 정도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거의 비례한다. 설사 나의 행위가 세상의 눈과 등가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짓을 멈추지 않은 것은 그래도 세상의 법을 믿기 때문이다. 단순한 법, 결국은 행한 것 만큼 얻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엄청난 노동과 시간의 밀도가 녹아 있는 수만 컷을 하나로 포개어 만든 극한의 미니멀이 주는 감동을 어찌 말로 설명하겠는가?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원한다고 뮤지엄과 온에어, 자연드로잉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거기게 데려가 놓은 것은 치열한 과정들, 그 과정들 속의 자연스러움이었다. 나를 통제할 수 없는 자유의 바람이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이다. 스스로 감동하지 않은 예술 행위와 비평, 컬렉션은 죽은 예술이다. 감동하는 일은 파장을 공유하는 일이다.
내가 너를 일 년 기다리고, 십 년 더 기다리더라도 네가 오지 않으면 나는 너를 기다리지 않은 것과 같다. 이것이 기다림의 실존이다.
내가 아티스트로 평생을 살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나는 아티스트로 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나의 실존이다.
나의 기다림이 진정하고, 나의 농사일 진정하고, 나의 작업이 진정하였다면 나는 거기서 내가 원하는 값을 얻어야 하고 무한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법, 세상의 이치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마르탱 파주 (0) | 2016.06.23 |
---|---|
멜랑콜리아-크리스테바, 세잔의 사과. (0) | 2016.05.05 |
여름의 묘약-김화영 (0) | 2016.03.29 |
두터운 삶을 향하여-정현종 산문집 (0) | 2016.03.22 |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정찬주 (0) | 2016.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