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묘약-김화영

바다가는길 2016. 3. 29. 18:54

여름의 묘약 여름의 묘약 : 프로방스, 홀로 그리고 함께 김화영| 문학동네 | 2013년 07월

 

 



오래전 김화영씨의 '행복의 충격'이라는 수필집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충격'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곳의 삶의 공기는 우리의 것과 많이 달랐다는 얘기겠다. 
정년퇴직을 한 저자는 젊은 시절 유학했던 프로방스를 2011년, 2012년에 걸쳐 부인과 가족과 함께 다시 찾는다. 

넓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아늑한 주택을 빌려 느긋이 며칠이고 머물며 다시 그 행복의 대기를 만끽하며 오래 못 본 지인들을 만나고 자신이 번역했던 작품의 저자들의 자취를 찾아 여행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프로방스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좋아하던 책의 저자로 그림자처럼 모호한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카뮈니, 장 지오노니, 프루스트니 하는 작가들이 그때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살았던 실재하던 사람이라는 구체적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에 관한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도 알게 되고.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이 살았고, 그가 즐겨 그렸던 생트빅투아르 산이 있는 곳, 파리에서 전학 온 에밀졸라를 세잔이 살뜰히 보살폈고, 그에 대한 감사로 사과 한바구니를 들고 세잔을 찾은 데서부터 그들은 오래도록 절친이었다고. 세잔의 사과 그림이 그때부터 시작된 건가 싶었고,

 

고흐가 햇빛을 찾아 갔던 아를도 프로방스 지역, 고갱과 다투고 귀를 자른 후 위험한 인물이니 격리시키라는 주민들의 항의로 정신병원에 갇혀 그 유명한 방 시리즈의 그림들을 그렸고, 이후 옮긴 생 레미의 병원에선 아이리스들을 그렸고...

고흐를 홀대했던 아를엔 지금 '반고흐의 공간'이라는 문화센터가 세워져 그를 배척했던 주민들의 수입원이 되고 있다는 아이러니.

엑스의 중심가 쿠르 미라보의 극장들은 '세잔'이니 '르누아르'니 하는 이름들은 갖고 있고.


엑스 근처의 루르마랭엔 70이 가까운 딸이 살며 그 유산을 지키고 있는, 그가 사용했던 책상이며 가구가 그대로 남아있어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카뮈의 집이 있고.

그리고 처음 듣는 카뮈의 죽음. 1960년 1월, 휴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갈 즈음, 원래 가족과 함께 기차로 갈 예정을 바꿔 가족들만 기차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지인의 차를 타고 가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했다고. 

근처에서 발견된 가방엔 책 몇 권과 일기장, 집필중이던 '최초의 인간'의 원고, 쓰지못한 기차표, 그리고 불후의 명작은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쓰게 된다는 운세가 적힌 신문 스크랩이 들어있었다고. 

그가 만약 그렇게 죽지않았다면 얼마나 더한 걸작이 탄생했었을까 하는 아쉬움. 그는 그런 명작들을 쓰고도 여전히 배고팠구나, 하는 생각.

그때 카뮈의 나이 47세, 아직 죽음을 생각하기 이른 나이임에도 그 해 초, 왠지 우울해하며 자신이 죽으면 루르마랭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었다고. 어떤 예감이 있었을까? 그 말대로 거기엔 단촐하기 그지없는 카뮈의 묘도 있다. 

엑스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카뮈의 모든 유고, 자료, 장서, 연구서들이 기증되어 세워진 '카뮈 센터'가 있고.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소설의 저자인 장 지오노가 살았던, 지금은 역시 그의 딸이 아버지가 살았었던 그 모습 그대로를 지키며 살고있는 '장 지오노의 집'이 있는 마노스크. 

세탁소를 운영하는 어머니, 구두수선공인 아버지, 집은 비가 오면 지붕이 샐만큼 가난했지만 그의 부모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언제라도 그의 집에서 위로를 구할 수 있도록 하는 대단한 휴머니스트였다.

어린 시절 장 지오노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산책을 나설때마다 도토리 열매를 뿌려 심곤 했단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소설이 그런 배경을 갖고있구나, 하는 걸 알게됐고.


또 인구 천명의 작은 도시 바농에 있다는 서점 '르블뤼에'. 

어느 무학의 목수가 문방구 건물을 사들여 1990년, 250권의 책으로 처음 문을 연 이래 지금은 건물 세 채를 이은 공간에 몇 십만권의 책을 보유하고, 근처 도시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는 '이 세상 최고의 서점'이 됐다고한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배경이 된 일리에. 실제 그곳은 프루스트의 아버지의 고향으로 어린 시절, 휴가때면 그가 자주 찾았었다고. 지금은 아예 소설 속 지명을 따 '일리에 콩브레'가 됐다. 

소설 속 게르망트니, 스완네니 하는 풍경이 그대로 있는 거기를 거닐며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실제 고모네 집이었던 곳은 '레오니 아주머니 댁'이라는 프루스트 문학관이 됐다.


이외에도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풍경, 풍경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만큼이나 그곳에선 예술도 풍성하게 꽃피고 열매맺었다. 

낯설고 신선한 이국의 지명들을 따라, 마냥 저자를 부러워하며, 즐겁게 따라 여행할 수 있었던 책.


책을 읽다보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번역중이신 모양인데, 어서 출간해주시길.

김창석 역본은 꽤 말 맛이 있어 좋았지만 어휘나 어투가 너무 예스러워 불편한 점이 있었고, 새로 출간된 번역들은 김창석 역에 비해 말 맛이 떨어지고 건조한 느낌, 원어를 읽을 수 없으니 프루스트 본래의 문장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김화영 역이라면 백퍼센트 만족하며 읽을 수 있을텐데...



...일요일 시내 거리는 한산해도 시장 가까운 법원 앞 주차장은 벌써 만원. 시장이 어디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장바구니를 들고 한가하게 걷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거기가 장이다.

농가에서 직법 구운 부드러운 빵이 넘쳐날 듯이 쌓여 있다.

토마토, 복숭아, 오렌지, 멜론 같은 과일들, 아직 땅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양파와 호박과 버섯, 녹색과 검은 색의 올리브 절임, 토마토 말랭이, 노란 호박꽃 무더기, 올리브유, 타임, 바질, 월계수잎, 로즈메리등 각종 프로방스 허브...... 향긋한 냄새와 빛나는 색깔과 떠들썩한 사람들의 대화가 오관을 애무한다. 삶의 기쁨은 바로 이 곳, 과일과 채소와 소금과 기름과 향료의 색채와 냄새가 소용돌이치는 이 시장에서, 즐거운 표정들 속에서 빛난다.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이 눈빛과 목소리와 미소로 만난다. 프로방스의 아침 시장에 우울한 얼굴은 없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우체국 앞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듯 흐뭇한 얼굴로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번뜩이는 햇빛에 한쪽 눈을 찡긋한다....

 

... 잘 익은 멜론을 세로로 잘라 두 조각을 내고, 가운데 씨를 스푼으로 파내어 오목한 샘을 만든 다음 그 속에 코냑을 반쯤 채워서 냉장고에 넣어 차게 해둔다... 과육 속에 깊숙이 배어든 코냑 향이 그윽하다... 오목한 샘에 코냑이 아닌 사향포도로 만든 백포도주를 부어 그 향이 배어들게 하여 먹는 방식이 그 유명한 '카바용 멜론'이란 것이다... 프로방스에서는 여름 후식의 백미로 삼는다...

프로방스 여름날의 타오르는 화염이 땅속의 서늘한 물을 만나 과육 속에 썩지 않는 시간의 단 맛으로 스며들면, 우리의 혓바닥에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만나 삶의 희열이 된다.

 

... 텅 빈 마음 속으로 실바람이 지나가는 가벼움의 시간...

 

... 작고 아름다운 엑상프로방스에서 여행자는 망설일 것도 없이 쿠르 미라보로 나간다. 여기가 엑스의 심장이다...

"메마른 돌산 생트빅투아르에 등을 기댄, 물과 신선한 공기와 푸른 하늘의 도시, 화가 세잔이 붓으로 그 매서운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고도 엑상 프로방스는 쿠르 미라보 거리에 늘어선 고색창연한 저택들과 분수와 하늘을 가린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좁은 골목의 구시가 등 유구한 세월 동안 간직해온 그 고전적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프로방스의 수도다"


...카뮈가 노벨상 상금 덕분에 사들일 수 있었던 이 아름다운 시골집... 테라스는 높이를 달리하는 여러 층의 정원을 굽어본다. 나직한 담을 지나 거의 까뮈 집안 사람들만 사용하는 골목 너머로 펼쳐진 정원은 골짜기로 이어지다가 수목이 우거진 야산과 만난다. 그 너머로는 뤼베롱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집을 매입한 즉시 10월 초의 두 주를 파리에서 보낸 카뮈는 마침내 루르마랭 집으로 혼자 돌아온다. " 10월 17일 보클뤼즈로 출발. 10월 18일, 나는 건조하고 싸늘한 미스트랄 바람 속에서 밤기차를 타고 와 일 쉬르 소르그에 내린다. 반짝이는 햇빛 속에서 하루종일 기분좋은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다. 전신에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19일, 끊임없는 빛,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집에 여러 시간 동안 우두커니 서서 포도나무의 붉은 낙엽들이 거센 바람에 불려서 이 방 저 방으로 날아드는 것을 바라보다. 미스트랄 바람."

 

...프랑스 남동부의 행복한 요람 프로방스는 서쪽으로 오랑주, 아비뇽, 아를을 거쳐 지중해로 흘러드는 론 강이 경계요, 북쪽으로는 방투 산, 뤼르 산, 그리고 시스트롱, 바르슬로네트를 사이에 두고 오트잘프 지역과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 니스를 중심으로 하는 알프 마리팀 지역에 등을 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지중해의 코트다쥐르로 활짝 열려 있다. 한여름의 건조하고 부드러운 공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온 천지에 가득한 라벤더, 타임, 로즈메리 향기,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 창공을 향해 화살표처럼 솟아오르는 시프레 나무의 고장 프로방스. 높은 산, 긴 강, 광대한 평야, 물결 잔잔한 지중해, 그리고 뜨거운 태양, 어는 것 하나 빠진 것 없이 신의 축복을 받은 땅...


...나는 지오노 센터의 인적 없는 안뜰, 둥근 연못을 한 바퀴 돌고나서 녹음 속 벤치에 앉아 맑고 푸른 눈의 소년을 생각해본다.중학교 졸업의 학력과 20년 가까운 말단 은행원 생활이 전부인 이 젊은이는 일생 동안 고향 마노스크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는 오직 꿈과 정열, 인간과 고전문학에 대한 치열한 관심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서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마노스크에 눌러살면서 '작은 기쁨들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법"을 배웠다는 장 지오노. 그는 구태여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바로 "행복의 고등사범학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풍경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눈이 부시도록 싱그러운 초여름 아침의 햇빛과 귀가 멀 듯 거대한 침묵...

이 빛나는 자연 앞에서 무슨 말을 더 보태랴...

 

...초록색과 냉기가 그리울 때 내가 즐겨 마시는 망탈로(얼음 물에 탄 박하시럽) 큰 잔 하나를 주문한다. 초록색 유리컵 속에 냉동되어 있던 시간이 느리게 녹기 시작한다. 이 고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빛과 그늘의 반점 사이로 미풍처럼 흔들리다가 고이고 고였다가는 흐르는 우리의 저마다의 삶의 순간과 순간이다. 그 위에 내려앉는 짧은 여름빛, 그 덧없음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닐까. 나비의 날개처럼 가늘게 떨리는 그 빛 위에 마음을 고즈넉하게 부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기뻐하라.

마을 성문 위 벽면에 새겨진 해시계와 그 이마에 각인된 이 마을 사람들의 좌우명이 소리 없는 웅변이 되어 그 상념에 화답한다. "J'abonde dans l'instant."(나는 순간 속에 풍부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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