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운 삶을 향하여-정현종 산문집

바다가는길 2016. 3. 22. 19:38

두터운 삶을 향하여정현종 저. 문학과 지성사.

 

 

 

 

...인간이 가치나 아름다움에서 으뜸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비유 중 대표적인 것 두 개를 들라고 한다면 당연 '빛'과 '꽃'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빛'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그 소리와 단어는 즉시 그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듯하고, '꽃'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즉시 향내가 나는 듯하니 그 말들은 거의 실물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몸을 살리기 위해 먹을 것을 자연에서 퍼오는 건 물론이고 정신을 활동시키는 비유나 이미지도 자연에서 퍼온다.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은 몸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마음을 생성하는 원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비상하는 힘을 샘솟게 하는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공기와 새들이며 땅에 붙박여 있으면서 상승의 꿈을 꾸게 하고 실제로 그런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무슨 깃대 같은 게 아니라 나무들이다...

 

'자연'을 나타내는 문학은 어디 있는가? 바람과 시내를 자기를 위해 말하도록 자기의 업무에 원용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그는 농부가 봄에 결빙으로 솟아오른 말뚝들을 두드려 박듯 말들을 그 원초의 의미들에 박았으며, 말들을 사용할 때마다 그 말들의 기원을 찾았다.---뿌리에 흙이 묻어있는 말들을 그의 책 페이지에 이식했던 것이다. 그들의 말은 너무도 참되고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봄이 올 때 솟아나는 싹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이 보였다.

 -소로우 'walking'.

 



.. 그러나저러나 이 화창한 봄날, 생존을 위한 소음과 돌진과 맹목의 바다에 돌 하나를 던지듯 해봤자, 세상의 무슨 털끝에도 닿지 않을 얘기를 하느라고 끙끙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봄 속으로 나가봐야겠다. 참됨과 신선함과 자연스러움의 동의어인 '자연'에 값하는 마음으로 노래한 시인 네루다의 그야말로 '자연'이 말하고 있는 [봄]이라는 작품을 적어놓고.

 

새가 왔다.

탄생하라고 빛을 가지고

그 모든 지저귐에서부터

물은 태어난다.

 

그리고 공기를 풀어놓는 물과 빛 사이에서

이제 봄이 새로 열리고

씨앗은 스스로가 자라는 걸 안다.

화관에서 뿌리는 모양을 갖추고

마침내 꽃가루의 눈썹은 떨린다.

 

이 모든 게 푸른 가지에 앉는

티 없는 한 마리 새에 의해 이루어진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맹인과 같다. 그건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은유적으로도 그렇다. 햇빛이 만물을 드러내 보여주듯이 영혼의 빛은 정신의 보석과 그 무한을 열어 보여준다. 또 햇빛이 만물을 키우듯이 어떤 영혼이 발하는 빛은 우리의 정신을 키운다...


...새벽은 빛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빛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만물을 태어나게 하니... "떠오르는 해는 다가오는 새날의 결백이며. 세계는 새롭게 일어난다. 새벽이란 그러므로 일어나는 우리 존재의 전신감각이다"(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빛의 덩어리는 어떤 외부 물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꿈꾸는 우리의 상상력 바로 그 중심에서 태어난다...(야콥 뵈메)


...우리의 모든 괴로움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한때라도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하는 모양이니, 별수 없이 시간을 사랑하는 수밖에...

...우리가 흔히 말하면서도 그게 그다지도 굉장한 상태, 눈부신 상태를 가리키는 줄 모르고 쓰는 말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라는 말이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뭔가를 하는 동안 우리는 빛인 것이다.

시적 순간이라는 게 있다. 그 순간에 벌어지는 일 중에 하나가 이미지라는 광원이 새벽을 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싹트는 무한이다.


...새벽빛이나 떠오르는 태양의 광휘는 아주 실질적인 일을 하는데, 영혼을 새벽빛으로 물들이면서 마음의 새벽을 열고 우리의 마음이 해돋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광원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무시간적인 상태, 상상적 비전, 모든 싹트는 힘과 그 파장, 창조적 처음과 그 신선함 같은 것들의 비유가 되며, 그 비유가 육화된 것인 한 그 말을 읽거나 듣는 사람이 그 비유의 모태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가 불멸의 존재, 상태, 가치 같은 것들을 말할 때는 한결같이 빛으로 꾸민다. 아니 꾸민다기보다는 그들이 빛을 발하니 그걸 보고 느낄 수 있는 영혼들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거나 노래할 뿐...




...새는 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는 대상이지만, 릴케가...편지에서 칭송한 새는 인류를 비롯한 동물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 그 유래가 없을 만큼 깊고 섬세하게 보고 들은 것이어서 그 감동의 파장에는 '무한'이라는 말 밖에 없는 그런 것입니다.


'새는 외계에 특별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창조물입니다. 마치 그가 그(외계의) 가장 깊은 신비와 하나임을 알고 있는 듯이. 그는 그 속에서 마치 자신의 깊이 속에서 노래하듯이 노래하는 것이며, 우리가 새소리를 우리 자신의 깊이 속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그런 데 있지요.. 참으로 그건 전 세계를 잠시 내적 공간으로 만드는데, 왜냐하면 새는 그의 가슴과 세상의 그것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에 나오는 새는 릴케라는 시인이 창조한 새인데, 그 새가 날고 지저귀는 외계 역시 릴케에 의해서 이 세상에 처음 창조된 공간입니다. 그러니 물과 꽃과 외계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새를 창조한 시인들의 내적 무한을 또 어쩔 것인지......

...세상의 가슴과 자기의 가슴을 구별하지 않는 영혼에 의해 사물은 새로 태어나고 가치는 샘솟으며 그리하여 드문 기쁨을 맛보게 하는데, 이러한 것이 현대 세계에서 시가 하는 일일 거예요..




...시인은 그 모든 생명 현상에 도취하고 동화되어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에 합류하는데, 찬탄하고 화창하는 꿈의 생리에 따라 마악 태어나는 것들과 더불어 태어나지만, 또한 그것들은 시인의 꿈이라는 모태를 빌려 새로 태어난다... 사물은 한층 존중되고 사랑받으며 다른 질서 속에 있게 된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얼마나 기분 좋게 하는지, 감정의 풍선을 부풀리고 상상력을 가동시키는지...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날아라 버스야.전문 




여름 날의 저 

천지 밑 빠지게 우르릉대는 천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 마음과 몸을

씻었겠느냐

씻어

참 서늘하게는 씻어

문득 가볍기는 허공과 같고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왼통 새벽빛으로 물들었겠느냐


천둥이여

이 소리의 탯줄은

우리를 모두 신생아로 싱글거리게 한다

땅 위의 어떤 것도 일찍이

네 소리의 맑은 피와

네 소리의 드높은 음식을

우리한테 준 적이 없다

무슨 이념, 무슨 책도

무슨 승리, 무슨 도취

무슨 미주알고주알도

우주의 내장을 훑어내리는 네

소리의 근육이 점지하는

세상의 탄생을 막을 수 없고

네가 다니는 길의 눈부신

길 없음을 시비하지 못한다


-천둥을 기리는 노래 부분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

걸어간다 --- 이건 걸어가는 게 아니다.

이건 떠가는 것이다

나는 뜬다, 아득한 정신, 이런, 나는 뜬다, 

꽃잎들, 

땅 위에 깔린 하늘

벌써 땅은 떠 있다

(땅을 띄우는, 오 꽃잎들!)

꿈결인가

꽃잎은 지고

땅을 떠오른다

지는 꽆잎마다

하늘거리며 떠오르는 땅

꿈결인가

꽃잎들......


-꽃잎 전문


시는 하늘하늘 내려오는 꽃잎, 내려오면서 거꾸로 땅을 떠오르게 하는 꽃잎이며, 땅을 덮어 그 위를 걷는 우리가 일거에 무거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꽃잎이다.

꿈의 생산성에 대한 인식은 확산되어야 하고 미적 관조는 나날의 공부가 되고 습관이 되어야 한다.




이전에 여러 곳에서 발표된 글들을 새로 모아 편집한 모양이다.

편집자가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반복되는 내용도 있고, 아무래도 산문은 그의 시보다는 못하지만 자유롭게 말해지는 시론들이 흥미로왔고, 좋은 시 몇 편 또 건졌다.

그가 말하듯 시인에게서 태어난 시를 통해 새로운 관점, 시야가 열린다.

마침 때는 봄, 새들이 노래하고, 조만간 꽃비가 내릴 것이고, 그 때 이 글들이 봄의 빛을 더욱 더 환하게 밝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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