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기쁨-황동규 문학과지성 시인선422
그리움의 끄트머리는 부교(浮橋)이니
바다로 가는 갈대의 물결 어둑해지고
성긴 눈 날린다.
눈이 몰리는 저 부교!
그대 생각이 바다로 들어가다 걸음 멈추고
쓸쓸히 침착히 눈을 맞고 있다.
어제도 그랬다.
물새 하나가 막 잠에 빠지는 듯 꾸벅꾸벅 울었다.
바다가 납빛으로 가라앉고
민박집 라디오가 고요해졌다.
갈대들을 지나
발밑에서 누군가 반 발짝씩 앞서 소곤소곤대는
눈 가늘게 덮인 조가비 밭을 건너
부교로 간다.
새가 잠투정하듯 몇 마디 울다 만다.
검고 투박한 부교 판자에
바로 여기냐는 듯 흰 깃들이 날라와 앉는다.
눈 이불에 깃들이 덧입혀진다.
새로 여며지는 이불깃
잔바람에 힘없이 벗겨지기도 한다.
뭘 하지?
히스토리 채널 고대 중국 무기 재현이 끝나며
깜박 들던 잠이 깬다.
왕대로 만든 포신이 제대로 대포알을 뱉어냈던가?
수백 촉 화살이 불꽃들을 해 달고 적진으로 날았던가?
열 시.
언제부터인가 창을 도닥이는 가을비.
내일부턴 산책길에 쑥부쟁이들 기 꺾이고
낙엽들 소리 없이 굴러다니고
역새들은 흰머리를 날리겠지.
또 남미산 미라의 신원 찾기가 시작되는구나.
채널을 바꾸려다 그만 끈다.
신산한 가을비 소리.
이제 뭘 하지?
뭘 하긴!
우산 쓰고 나가
빗소리 억양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골목들을 지나
대문 지붕이 검은 빗물 흘리는 알전구 켜진 문들을 지나
어둠의 바닥에 몸을 튕기는 빗발들을 빛의 원뿔로 만드는
가로등이 지키고 선
관운장 모신 문 닫은 남묘(南廟)에 올라
환한 원뿔 빗소리 속에 들어가
이제 뭘 하지? 산다는 게 도대체 뭐람? 같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물음들을 비우고
찬비에 몸속까지 식는 새들이 서로 괜찮지? 괜찮지? 주고받는
부리를 서로의 깃 속에 파묻는
조그만 꾸국꾸국 소리를 담고 내려오지.
사는 기쁨
5.
바위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불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성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함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사자산(獅子山)일지
2008년 11월 8일, 더할 나위 없이 날씨 좋은 날, 감기 재직 중.
20년 만에 다시 사자산 찾아가는 길.
길 너르고 곧게 뚫려
마을들이 길의 곡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자산 길 같지 않은 사자산 가는 길
아직 멀었지 싶은데 티라노사우르스 등뼈 능선이
이른 낙엽 날리는 차창에 나타났다.
절 아래서 얼근한 해물짬뽕으로 감기 달래고
새로 돌 박아 만든 길과 층계를 타고
한창 물든 단풍나무 붉나무 당단풍나무를 차례로 지나
적멸보궁에 올랐다.
하늘은 무얼 덧칠하거나 벗길 게 없는 바로 그 쪽빛
떡갈나무 누른 잎들은 전처럼 얼굴을 접고 있었고
골짜기 건너 낙엽송들은
금빛 새 트렌치코트로 갈아입었다.
추억 속에 사라졌던 새들이
시간의 더께를 들치고 나와 맑게 울었다.
하늘과 땅이 황당하게 투명해진 이 가을날,
머리 위의 빨간 단풍잎들을
이파리 생김생김 하나하나 역광으로 살리면서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쏟아지지 않는
환한 빛 덩이,
바람결에 산들대며 감기조차 환하게 만드는
밝음마저 벗겨진 밝음!
겨울을 향하여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짚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생각한다.
내 핏줄에도 얼음이 서걱대지는 않나?
텔레비전 켜논 채 깜빡깜빡 조는 초저녁에
잠 깨어 손가락 관절 하나 꿈쩍하기도 싫은 새벽에
그리고 이 술병, 마저 비울까 말까 저울질하는 바로 지금!
생각을 조금 흔든다.
그래,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낡은 혈관 녹 긁으며 흐르면
시원치 않겠나?
골짜기 가득 눈꽃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피어
보여줄 게 있다고 아슴아슴 눈짓하고 있는 설경 속으로
몸 여기저기 수정구슬 쟁그랑쟁그랑 소리 나는
반투명 음악이 되어 들어가보자.
첫눈
새벽녘에 잠시 날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친 눈
제대로 한 번 맞아보기나 했을까?
허나 나무들 표정이 모두 달라졌다.
옆에 다가가도 알은척을 않는다.
솔가리 다 내려 보내고 엉성해진 소나무들
각기 제 생각에 잠겨 있고
돌돌 말린 잎 가득 달고 있는 단풍나무들
우울증에 한 방 맞은 것처럼 표정이 없고
황토색 물들인 카키 옷 단정히 입은 낙엽송들
어깨 내린 채 딴청부리고 있다.
마침 드는 햇빛에
서리 친 꽃받침들을 쳐들고 모여 서 있는 쑥부쟁이들
그중 앞에 앉아 있는 네발나비,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위험 거리 안으로 다가가도 꼼짝 않는다.
'이때는 좁은 생각도 무거워요.'
사방에서 눈 시리게 튀던 형상들
하루아침 어둑한 몰골들이 되어 바투 둘러서면
햇빛 반사하는 하얀 서리 꽃받침에 올려논
조그맣고 얇은 발바닥들이
박하(薄荷)에 올려논 혀들처럼 환하겠지.
밤꽃 피는 고성(古城)
하지 며칠 전
누런 보리들이 들 한가운데 밀집대형으로 버티고 서 있고
파릇한 모 자라는 무논들이 보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 너머론
바다인지 호수인지 물비늘 반짝이는 넓다란 물.
밤꽃 냄새가 사방에
투명 안개처럼 끼어 있다.
하늘의 다락 같은 문수암에 올라보면 아래 물들이 살아 있다.
물속에 머물고 있는 섬들에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이름을 붙여주다가
조그만 외톨이 섬 하나
그가 무어라 하나 귀 기울이면 가까이서
부리 헐렁한 딱따구리가 따다닥 답한다.
밤꽃 냄새가 투명 안개처럼 흐른다.
이 초여름 천지에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되든지
밤꽃 냄새가 되든지
따다닥 소리가 되든지
몸이 헐렁해진 나도 무언가 몸으로 되고 싶어
고성 명품 하모 횟집 앞에서 서성대다 문득 고개를 든다
따끈한 해가 떠 있고
나지막한 산 하나 동그란 구름 한 장 뛰우고 있는
푸른 파스텔 톤으로 한없이 한없이 비어 있는 하늘......
생각 같은 것 다 치아라!
하모 하모.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화왕산 억새들은
환한 중에도 환한 소리로 서걱대고 있으리.
온몸으로 서걱대다 저도 모르게
속까지 다 꺼내놓고
다 같이 귀 가늘게 멀어 서걱대고 있으리.
걷다 보면 낮달이 계속 뒤따라오고
마른 개울 언저리에
허투루 핀 꽃 없고
새소리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바람 소리
누군가 억새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내려가다 처음 만나는 집에 들러
물 한 잔 청해 달게 마시고 한 번 달게 웃고
금세 바투 몰려드는 무적(霧笛) 같은 어스름 속
무서리 깔리는 산길을
마른 바위에 물 구르듯 내려가리.
'즐거운 편지'를 쓰던 맹랑한 소년이 어느 새 팔십을 바라보는 노시인이 됐다.
시인이면 시인이지 젊은 시인 노시인이 따로 있진 않지만, 그의 시의 계절은 이제 가을이고 겨울이다.
늘 그렇듯 그의 시는 풍경시이자 여행시.
그의 시를 통해 소개 받은 것, 곳들도 참 많았는데, 이번 시집을 보니 시를 읽고 정말 가보고 싶던 곳, 몰운대는 채 가보기도 전에 예전 몰운대가 아니게 돼버렸구나.
어떻게 지내시는지 사소한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들.
항상 그렇듯 그 사소함들 속에 삶에 대한 통찰이 있다.
몸은 점점 노화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씩 먼저 그를 떠나고...
꽉 움켜쥐고 놓고싶지 않을 만큼 삶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이 간지르는 걸 막을 순 없는 마음.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그래, 그 조그만 기쁨들이 삶을 지속시킴을 새삼 깨닫게 하며 또 하나의 조그만 기쁨들이 되어 준 시들.
앞으로도 오래 새 기쁨들을 만들어주셨으면...
찬 하늘에 뜬 해는 아직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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