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마주친 것들

첫 눈

바다가는길 2020. 12. 13. 22:04

첫 눈이 왔다.

다른 곳에 이미 첫 눈이 왔다지만 내게는 오늘이 첫 눈.

이유가 있어 기분이 나쁘고, 이유없이도 기분이 나쁜 나날들.

오늘 아침은 왠지 기분이 괜찮네... 하며 커튼을 열었더니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느껴낸 눈.

아침 길을 나서니, 이미 새하얘진 세상, 폭신 폭신 발 밑으로 느껴지는 눈의 감촉, 받쳐든 우산 위로 싸르락 싸르락 눈 내리는 소리,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일없이 버스를 한 대, 두 대를 그냥 보내며 허공을 가득 채운 눈, 한 송이 한 송이 내리면서 그 한 송이 한 송이씩 만큼의 공간을 중첩시키며 무한히 확장하는 눈세상을 한참 바라보았다.

 

종일 내릴 듯하던 눈은 금새 그치고 그다지 춥지않은 날씨에 그마저 어느 새 다 녹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 누군가 만들었던 눈사람, 이미 바닥에도 눈자취 없고, 형태도 허물어져 가는 중.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지만, 한때 누군가의 까르르한 웃음으로 생기와 사랑으로 빚어졌던 몸,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을 몸, 곧 사라진다해도 존재했었음이 나쁘지않을 것.

하얀 눈 세상 속에 털모자에 벙어리 장갑으로 중무장한 볼 빨간 아이가, 어쩌면 아빠와 함께, 어쩌면 엄마와 함께 종알종알, 까르르대며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귀하게 거기 세워 둔 맑은 풍경이 하나 떠올라 나까지도 므흣했다.

 

눈 그치고, 그 자취마저 지워지니 기분은 다시 나빠졌지만 남겨진 사진을 보며 당분간 눈 내렸던 오늘 하루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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