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도시소설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다
"잘 잤어? 컨디션은 어때? 뿌리 내리기 좋으라고 2센티미터 정도만 남기고 물을 다 빼두긴 했지. 아직 여기가 낯설지? 모판에서 자랄 때와는 많이 다를 거야. 278종의 친구들과 함께 가을까지 무럭무럭 자라야 해. 다 같은 논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바람도, 햇볕도, 벌레소리도, 물의 온도도 제각각이라서 불편한 점도 있을 거야.
너희랑 이 논에서 지내는 동안 내 원칙은 간단해. 편애하지 않을게. 골고루 살피고 돌볼게. 너희가 자라고 열매 맺을 때까지, 내가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전체가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를 제외하곤 말이지. 극심한 가뭄이 든다거나 큰바람이 불어 목숨이 위태로울 땐 너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올게. 최악의 상황을 제외하곤 너희는 너희답게 자라면 돼. 내 눈치 볼 필요 전혀 없어. 우린 대등해. 너희는 논 사람이고, 난 그냥 사람! 새벽마다 올 테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
잎혀를 검지로 쓸며 기다렸다. 그리고 연인의 속삭임을 듣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내는 잎몸과 잎집을 번갈아 만지며 말했다.
"그렇겠네. 불편하겠지. 모끼리만 자라왔는데, 논엔 다른 생물들이 꽤 많으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흙과 친해지렴.이미 만났겠지만 흙 속엔 참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거든. 사람들이 흔히 토양이라고 일컫는 흙은 지구에만 있는 거란다. 바위가 잘게 부서진다고 전부 흙이 되지는 않아. 식물들이 살다 죽어 썩고, 또 살다 죽어 썩어 차곡차곡 쌓이고 섞인 뒤에야 비로소 흙이 되는 거니까. 식물이 없는 행성에선 토양도 없지.
물도 마찬가지야. 논에서 자라는 곡물과 밭에서 자라는 곡물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물을 방해꾼으로 여기는 곡물은 밭으로 가고, 도움꾼으로 여기는 곡물은 논에 머무는 거지.
논 사람인 너희는 물에서도 썩지 않아. 수중 생물들과 같이 사귀며 자라왔지. 재미난 이름을 지닌 녀석들이 많아. 갑각류로는 풍년새우라든가 털줄뾰족코조개벌레라든가 가시시모물벼룩이라든가 땅달보투명씨벌레라든가 톱니꼬리검물벼룩이라든가 새뱅이라든가 갈색말거머리까지! 패류로는 왼돌이물달팽이라든가 좀주름다슬기라든가 삼각삭골조개라든가 귀이빨대칭이까지! 흙과 물 그리고 그 속 생물들과 친하게 지내렴! 알겠지?"
사내는 허리를 펴려다가 양손을 동시에 논으로 넣었다. 주먹을 한 웅큼 쥔 채 올린 후 천천히 폈다. 왕우렁이가 양 손바닥에 각각 놓였다. 친구를 소개시키기라도 하듯, 벼들을 향해 손바닥을 기울였다가 수평을 유지했다. 왕우렁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희도 잘 잤고? 논물이 차갑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해가 곧 뜰 테니까 조금만 참아. 어디 보자- 8그램쯤 되겠구나. 밤에 배는 좀 채웠어? 제초제를 전혀 치지 않을 테니까, 너희랑 나랑 힘을 합쳐 잡초를 없애야 해. 쉽진 않을 거야. 초벌매기부터 피사리하러 부지런히 올게. 너희도 즐겁게 이 논에서 살아가렴, 고맙다."
백구들과 모와 왕우렁이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 날이 밝았다. 햇살이 비치자 논두렁과 논의 경계가 더욱 분명해졌다. 줄지어 서서 빛과 바람을 느끼는 모들의 미세한 떨림이 시시각각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어리지만 열망이 높고 작지만 꿈이 큰 아이를 닮았다.
이 책을 뽑아든 건 우선, 전에 몇 편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었던 탁월한 이야기꾼인 김탁환이 저자라는 것 , 또 한 가지는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 제목에 끌려서였다.
책상머리에서 글만 쓰기 너무 답답해 전국을 답사하던 중, 지인들의 소개로 밥을 먹으러 간 곳이 밥카페 '반하다', 그 밥이 너무 맛있는 바람에 주인장을 부르게되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너무나 공감해 그의 삶의 이력을 따지게 되고, 그 이야기를 글로 기록해 책까지 냈다.
요즘 세상이 험악하다. 험할 뿐더러 악하다.
뉴스를 끊어야 하나,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걸 들어야 하니...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사람에게 질리는 마음을 달래주는, 부드럽게 풀어주는,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 제목처럼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김탁환이 반한 주인공, 이동현.
전남 고흥 시골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칠남매 중 막둥이. 어릴 적부터 부모의 농사를 도우며 땅과 자연과 친화하고, 순천대 농생물학과 입학, 시위의 날들을 보내다 교수 추천으로 균병학 실험실에서 연구, 서울대 대학원 농생물학과 진학, 박사과정 중 실험동물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하는 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박사과정 자퇴, 순천으로 내려와 친환경 느타리버섯 농사 시작,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규슈대학 생물자원환경과학과 박사과정 입학, 응용유전해충방제제를 전공,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 한국과학재단 신진연구원과 순천대 한국지의류연구센터 특별연구원으로 근무, 파슨바이오 창업, 미생물로 병충해를 방제하는 신약 개발, 제품을 출시했으나 경영부족으로 시장에서의 성과 미비로 사업을 접고, 발아현미및 미곡으로 연구, 사업방향을 전환해 2005년 '미실란' 설립, 폐교가 된 곡성동초등학교로 이주, 연구와 농사를 해오다 2015년 밥카페 '飯하다'를 열었다.
'반하다'는 들녁을 바라보며 발아현미 밥과 제철채소를 즐기는, 농촌진흥청 지정 곡성1호 농가맛집이란다.
그곳에선 봄 가을로 음악회가 열리고, 전시회가 열린다.
이동현은 미실란 강의실과 전국을 다니며 농촌의 현실과 친환경농법, 발아현미에 대해 매해 100회 이상의 강의를 하고 있다.
농부과학자 이동현의 희망은, 지방 농촌이 소멸되는 것을 막고, 지속 가능한 친환경 벼농사를 마을 농부들과 함께 짓는 것. 쌀로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들을 하는 것.
그는 쌀학교를 세워 유치원, 초,중,고 학생, 귀농인, 농업 관련 각종 단체의 직원들에게 강의와 교육을 하고 체험학습을 진행한다.
(농촌과 벼농사와 쌀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교육장에서 강의를 들은 후, 들녘으로 곧장 가서 벼를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다. 그 논에서 나온 쌀로 지은 따듯한 밥 한 공기를 먹는 것이다.)
쌀연구소에서 쌀의 생산, 유통, 미곡 가공법, 상품화를 연구하고, 쌀박물관에서 벼농사의 역사 벼농사의 세계문화들을 교감하고 쌀과 벼농사를 중심에 둔 다양한 예술활동을 하고자한다.
그는 어떻게 그많은 일들을 다할까 싶게 산다.
여기까지 온 그의 길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항상 난관을 만나고 그럴 때마다 그는 소처럼 우직하게 최선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장애를 돌파하고 나아갔다.
미실란은 아름다움이 열매 맺고 꽃 핀다는 뜻이란다.
발아현미 생산과정을 완전자동화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사람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일부러 사람의 몫의 일을 남기는 사람. 그래서 미실란의 직원들은 스스로가 주인처럼 즐겁게 일하며 근무하더라.
곡성에서 나진 않았지만 초중고를 다닌 그의 두 아들은 한번의 사교육도 없이 오로지 학교만 다니며, '아이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는 마음씨 좋은(?)부모밑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더라. 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식물생명공학학부, 생명기술과학학부에 재학중이다.
뒷표지 추천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 미실란표 발아현미를 사지않곤 못배긴다고.
나도 그 쌀맛이 너무 궁금해 책을 읽다말고 홈피를 찾아들어가 현미랑, 누룽지, 쌀로 만든 후레이크랑 종류별로 사서 먹어봤다.
그렇게 정성으로 지은 쌀이고 그 쌀로 만든 제품들이니 당연히 맛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발아현미밥은 불리거나 씻지않아도 돼 바로 밥을 하는 편리함에, 꼭꼭 씹으면 달큰 고소하니 맛있었고, 누룽지는 눌은 밥으로 끓여먹을 새도 없이 과자처럼 오도독거리며 다 먹어버렸고, 후레이크는 평소 잘 먹지도 않는 걸 이걸 먹어보느라 우유를 사, 우유에 타서 먹어도 맛있고 그냥 과자처럼 먹어도 맛있었고..), 책을 통해 아는 그 과정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 바이지만, 아, 너무 비싸, 그냥 가끔씩만 사 먹는 걸로..
너무너무 사람답고 현명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였고, 역시 김탁환의 글 맛은 미실란의 발아현미만큼이나 맛있었다.
더이상의 어떤 어려움도 없이 이 공동체가 승승장구하며 커져가길 바랄 뿐.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죠."
벼의 마음, 대나무의 마음, 참새의 마음, 물뱀의 마음 그리고 흙의 마음, 바람의 마음, 구름의 마음을 이 대표는 받았고, 또 거기에 제 마음을 얹어 건네기도 했다. 벼의 마음을 대나무에게 이야기하고, 대나무의 마음을 참새에게 이야기하고, 참새의 마음을 구름에게 이야기했다...
단번에 세상을 바꾸려 한 혁명가는 많고, 그 꿈을 실현한 혁명가는 매우 적다. 농부는 단번에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는다. 해마다 모자라는 부분을 고쳐가며 조금씩 더 나은 농사를 지으려 한다.... 추수한 들판에 서서 내년 봄 더 나은 농사를 상상하는 이가 바로 농부다.
소멸에 맞서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단번에 획기적인 변모를 꾀하지 않으며, 꿈이 완성될 날을 미리 정하지도 않는다. 올해가 안 되면 내년에 하면 되고, 내가 하다가 안 되면 아들 세대나 손자 세대가 하면 된다. 옳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당장 성과가 나지 않더라고 실패는 아닌 것이다.
지방이 사라지고 있고, 지방 중에서도 농촌 인구가 큰 폭으로 줄면서 젊은이들을 보기 어려워졌다. 농사 중에서도 경제성이 떨어진다며 벼농사 면적이 해마다 줄고 있으며, 함께 모여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도 많이 없어졌다.
소멸은 따로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엮여 있다. 하나가 넘어지면 그 방향으로 잇달아 쓰러진다. 소멸의 도미노, 소멸의 파도에 맞서 버티기란 쉽지 않다. 대다수가 인정하는 방향을 혼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고 버티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평가하는 부분은 무엇이며 아쉽고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대목은 어디인가. 올해까지 해마다 반복해서 땀 흘려 일하며 거둔 성과물을 펼쳐두고 이 질문들을 되짚으며 내년의 파종을 상상한다. 더 낫고 더 아름다운 반복을!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파국을 맞겠지요. 우리가 이 겨울부터 준비를 하면 봄에 농사를 시작할 게고, 낙담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봄이 와도 농사를 못 짓습니다. 견딘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다. 돈이나 명예는 수단이며 더 중요한 가치는 행복인 것이다.
함께 고개를 넘을 벗
다르게 아름답고 다르게 진실할 때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것.
내 노동이 담겨 만든 풍경인 것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풍경 이상이다. 땀과 숨과 발길과 손길이 스민, 내 안의 바깥, 확장된 나인 것이다.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의 좋고 나쁨을 두고두고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따지는 곳에 희망이 드리우는 법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충실하다'는 말이 떠돌지만, 농부를 비롯하여 생명을 키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테일에 충실하다. 차이를 악용하지 않고 선용하려 애쓴다. 내가 아닌 만인이 되고 만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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