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548
황동규 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26일
불빛 한 점
한창때 그대의 시는
그대의 앞길 밝혀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
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
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표지판들이
일 없인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
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
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어느 배에선가 나도! 하고 불이 하나 켜진다. 반갑다.
끄지 마시라.
진한 노을
태안 앞바다를 꽉 채운 노을,
진하고 진하다.
몸 놀리고 싶어 하는 섬들과 일렁이려는 바다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진하다.
배 한 척 검은색으로 지나가고
물새 몇 펄럭이며 흰색으로 빠져나온다.
노을의 절창,
생애의 마지막 화면 가득 노을을 칠하던 마크 로스코가
이제 더 할 게 없어! 붓 던지고
손목동맥에 면도날 올려놓는 순간이다.
잠깐, 아직 손목 긋지 마시게.
그 화면 속엔 내 노을도 들어 있네.
이제 더 할 말 없어! 붓 꺾으려는 나의 마음을
몇 번이고 고쳐먹게 한 진한 노을이네.
맨땅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어이없지 않다.
해가 뜨거나 비가 오거나
아닌 밤중에 싸락눈 사락사락 내리거나
네 삶의 마지막 토막은 결국
맨땅이 되지않겠나.
눈비 번갈아 맞고 땡볕 따갑게 쪼여대
기쁨 성냄 미움 아픔 같은 거 다 증발하고
채 비우지 못한 마음마저 증발하고
목에 걸려 남아 있던 말들도 먼지 되어 날리는
금 쩍쩍 갈라지는 맨땅,
태어날 때 거꾸로 매달려
엉덩이 맞고 시작한 눈물은
대충 말려 갖고 가겠네.
눈물 자국은, 글쎄
제풀에 희미해지도록 놔두시게.
손 놓기 2
비 막 그친 공기 속으로
다리 얽힐 듯 질주하는 몇 마리 말,
목덜미 뒤로 갈기들이 펄럭인다.
추억의 곳간에서 또 기억 몇이 도주하는군.
눈에 밟히는 녀석도 끼어 있겠지.
멀어져 가는 말들,
어느 날 고개 숙이고 다시 나타나지들은 마라!
가만, 그쪽은 절벽.
하늘이 일순 위아래로 확 벗겨지는 곳,
말들이 번개의 뒷맛처럼 사라지고 나면
구름 한 점 없이 벗겨진 저녁 하늘,
너르고 환하다.
같이 뛰어내리려다 멈칫했는가, 나무 하나
어깨에 둥지 하나 달고 절벽 위에 서 있다.
가지엔 주인 새가 외로울 때 움켜잡던
발톱 자국 남아 있겠지,
한뎃 새들이 와 놀다 간 자국이면 또 어떠리.
강원도 정선
들어오려거든 높은 재를 넘게.
숨 꼴깍대는 버스를 승객들과 함께 마음으로 밀며
비포장도로 꼬불꼬불 비행기재 넘어 처음 들어가 본 곳.
소월의 삼수갑산보다는 그래도 이 덜 시리겠지만
다음번 들어간 만항재 쪽은 더 험했어.
사람 냄새 묻지 않은 바람 소리 물소리
저녁이면 손바닥 두 개 하늘 빼곡 노래하던 별들
그리고 쑥 태우는 모깃불과 말 놓고 지내다
튕겨 나오곤 했지.
터널 뚫리고 길 포장되자 되레 발 더뎌져
몇 년 전 눈병으로 차를 버린 탓도 있지만
간다 간다 하면서 10년을 못 간 곳.
이마를 찡그렸다 폈다 하는 아우라지 물소리와
몰운대 뜬구름만 마음에 드나들던 곳.
오늘 텔레비로 읍내 오일장을 보게 되었어.
기분 좋게 떠들썩한 장터도 좋았지만
스치듯이 보여준
타고 내리는 사람 없이 기차 서는 간이역과
역사 앞에
몰래 울다 마음 확 벗었는지 끼끗한 부용 몇 송이가
와락 마음을 부여잡았지.
언젠가 기쁨, 아픔, 영글다 만 꿈 같은 거 죄 털리고
반딧불보다도 가벼운 혼불 될 때
슬쩍 들러붙어 하얗게 탈 빈집 처마 같은 걸 찾다가
내가 왜 이러지? 홀연히 꺼지기 딱 좋은 곳.
오늘은 날이 갰다
며칠 동안 하늘과 마음을 가득 덮었던 먹구름
검은 비 몇 번 뿌리고,
오늘은 하늘에 온통 비늘구름
훤히 날이 갰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는
오랜만에 연락 닿아 만나는 네 얼굴도 갰다.
네 뒤에서 비치는 저녁 햇빛 새삼 눈부셔
안경을 벗으니
순간 아무 것도 뵈지 않다가
나타나는 네 얼굴에 슬그머니 겹쳐 보이는,
무교동 청진동을 횡보하던 한창 때의 얼굴,
우리의 얼굴!
우리 둘이 청진동 해장국집에 시계 맡기고 나오며
같이 불렀던 <스탠카 라진>의 여운도 들어 있는.
맡긴 시계들이 들으라고 목청 높이 불렀던가.
그때 콘크리트 덩이에 넘어져 생긴 네 턱의 상처
이제 뵈지 않는구나.
그래 웃자.
오늘을 날이 갰고 우린 만났다.
어쩌다 저세상 가서도 서로 연락이 닿으면
오늘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뜬 날 만나자.
황동규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
2016년 '연옥의 밤' 이후 4년만의 시집인가보다.
의리! 황동규시인의 새 책이 나왔으니 안 읽을 수 없다.
시인은 연혁을 보니 1938년생, 올해 83세이려나.
'즐거운 편지'를 쓰던 당돌한 고딩이 어느 새 팔순의 나이가 됐다.
시들은 그 노년을 겪는, 사는, 혹은 견디는 기록이다.
'로봇처럼' 굳어져가는 몸, 매해 중력의 추가 점점 무거워지고, 기억은 갈기 날리며 사라져가고,
'텔레비에서 말들이 날아오다 방바닥에 떨어지'고, '감각은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맨땅에서도 자꾸 넘어지고, 눈과 귀가 흐려진다.
부고가 늘고, 하나 둘 지인들이 떠나간다.
어이가 없다, 아니 '어이없지 않다'.
그럴수록 작은 것들, 땅을 쪼는 작은 새, 발에 밟힐 뻔한 구석쟁이의 이름 모를 잡초, 애써 꽃 핀 그 잡초 위에 내려앉은 무당벌레, 일찍 낙엽지는 어린 나무, 둥치가 잘린 소나무에서 떨어져내린 솔방울...
그 작고 여리고 가여운 것들에게 시선이 머문다.
시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말처럼, 예전의 와! 하는 느낌은 줄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풍경을 선연히 떠오르게 하는 묘사들.
내 부모님 일 같기도 하고, 언젠가 나도 겪게 될 그런 시간들이기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자꾸 떠날 일을 생각하시네...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다운 나뭇잎' 처럼, 앞으로도 결사적으로 아름다운 글 많이 써주시길.
...극서정시...연극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 시적 자아를 변모시키는, 종교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거듭나게 하는, 시를 쓰려 했다...
... 극서정시가 마련해주는 조그만 '거듭남'들을 통해 시인과 독자 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의 짐을 별빛 무게만큼이라도 덜어주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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