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 마루야마 겐지.
얼마 전 우연히 마루야마 겐지의 신간, '파랑새의 밤'이 눈에 띄어 읽으면서, '마루야마 겐지, 살아있네...^^' 하며 새삼 그라는 작가의 존재를 기억해냈었다.
그의 소설, 에세이들, '물의 가족'이니 '달에 울다'니 '산자의 길'이니를 한창 읽은 후 그를 잊은지 오래다.
파랑새의 밤을 읽고 그간 그의 어떤 책들이 있었나 궁금해 검색해보다가 제목에 반해 읽게 된 책.
'그렇지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와!, 읽어주자.
이야기는 정원사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의 북알프스라 불리는 아름다운 산골에서 350여평의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이야기.
희안하게도 그의 글은 문체는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한데 반해 내용은 두터운 물감을 턱턱 이겨붙이는 유화처럼 강렬했었는데, (파랑새의 밤도 여지없이 그의 그런 특징들이 살아있었고..) 이건 에세이라서인지 아름다운 문체는 여전하지만 강하고 자극적이라기보다 자연에 경도된 한 인간의 보다 열린, 너그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이 에세이집이 출간된 게, 후기를 쓴 년도를 보니 2010년, 검색해보니 그는 1943년생, 현재 74세, 그러니 60대 중반을 넘어서며 쓴 책.
어느덧 그도 노년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이듦의 자조에 빠져있을 그가 아니다.
정원가꾸기와 소설쓰기라는, 육체와 영혼을 양손에 쥘 수 있는 수단을 지닌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여기며 패기있게 낭비없는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일본의 북알프스라 불리는 아름다운 곳에 거주함도 부럽고, 계절에 따라 바뀌며 감동을 주는 정원의 풍경(단순히 시각적인 풍경이 아니라 동식물들의 삶의 풍경)묘사도 너무 아름답지만, 그냥 읽고 지나치기 아까운 인생, 삶에 대한 통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는 사람의 일상적인 내면을 불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내겐 없는 그의 에너지, 힘, 성실함.
예뻐보이는 남의 깃털, 또 몇 개 뽑아 모아본다.
그런데 어째서 석양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거였지? 읽다가 어디를 놓쳤나?
그가 말하는 석양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책을 읽을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차 별처럼 찬란한 만 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동식물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정면충돌은 필수 조건이며, 그것이야말로 삶의 증거일 수밖에 없다. 시련과 정면충돌을 빼고 진정한 행복감에 직결되는 생명의 빛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서재에서 매우 밀도 높은 충실한 세 시간을 보낸 후, 제설 작업을 하러 문밖으로 나온다. 정원 일을 할 때와는 다른 근육을 쓰는 단조로운 작업이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목욕을 한 후 따뜻한 밥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 나에게는 이 삶밖에 없다고 그렇게 재확인한다.
...머리속은 만개의 한순간으로 가득하고 올해 정원의 만듦새를 점치는 데 영혼을 통째로 빼앗기게 된다. 그러면 소설은 둘째 문제가 되고 정원이 최우선 과제가 돼 작업의 순서만을 생각한다... 정원을 위해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분명히 느끼면서 인생의 뜻과 의의는 이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언제부터인가 소설쓰기와 정원 일은 내 안에서 나누기 힘든 양대 요소가 되었고, 둘 다 내 인생의 위대한 소일거리로서 지위를 차지했다.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교묘히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것으로 여겨져 이외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인간의 최후는 어차피 비참한 것으로 정해져 있겠지만, 소설과 정원을 만난 것으로 그 비참함을 상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지금의 심경이다.
나는 500년 이상이어야 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깊고 무한에 가까운,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감동을 끊임없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위한 창작 행위이며, 그것을 위한 인생이고 싶은 것이다.
겨울이 주는 피해가 상상했던 것보다 적은 것에 안도하면서 각 식물에 맞는 가지치기를 정성스럽게 마치고, 가을 끝 무렵 생겨난 잡초도 열심히 뽑아냈다. 거름을 주고, 첫 번째 농약도 뿌린다. 창끝 같은 옥잠화 싹이 새침하게 땅을 뚫고 나오고, 갈란투스나 아네모네 등이 활짝 피고 새 지저귐도 늘어 가는 사이, 경운기 엔진 소리가 퍼지는 계절이 된다. 따뜻한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점점 생기로 충만해지고, 정원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다. 뜰에 나갈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소일거리와 만난 운명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이것이 인생이란 것이다.”라고 두 번, 세 번 중얼거리게 된다.
새벽 어스름에 깨어나 어둠이 급속히 사라져 가는 정원을 살금살금 배회하면서 하룻밤 동안 얼마나 꽃이 많이 피었는지 확인할 때, 나의 영혼은 어느새 육체를 떠나 어스레한 공중을 활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해져 새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고, 개울 물소리조차 정적의 일부가 된다. 초록 계곡을 산책하는 것도 같고 한적한 느낌 좋은 시골 마을 한구석을 거닐고 있는 것도 같은 기분에 젖고, 마음이 무한히 뻗어 나갈 곳이 존재하는 것 같은, 아주 풍족한 착각에 빠진다.
동쪽 능선에 금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곧 해가 솟아오른다. 아침 해의 힘이 무수한 꽃봉오리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 풍경을 보는 사이에 마음속엔 절로 사랑이 움튼다. 꽃 하나하나가 나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어필하며 결국 한순간에 불과한 행복을 마치 진정한 행복인 양 믿게 하는데, 나도 그것을 그대로 믿어 버린다....
비스듬했던 빛이 점차 강해져 평면적이던 뜰을 관능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간다. 곧 종류에 따라미묘하게 다른 장미 향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올드 로즈와 와일드 로즈, 잉글리시 로즈가 서로에게 호감을 전한다. 싱싱한 생기를 회전시키며 이 세상은 살 만하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정원의 통일감을 어지럽히는 일 없이 인생의 부정적인 부분을 모조리 제거해 간다.
권력과 권위에 극한 증오심을 불태우는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해낼 수 없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고 그래도 해내려는 한결같은 바보인 나도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가이자 정원사, 아나키스트적인 낭만파에 온갖 것을 비관하는 자, 꽃들의 지배자이면서 초목의 노에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남는 것은 장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자, 내키는 대로 살고 있는 탓에 극심한 가난뱅이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자,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는 것을 싫어하고 무뢰배처럼 걸핏하면 싸우려 드는 성격을 가진,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에 깊이 마음이 흔들리는 단순하고 복잡한 남자다. 소설가에서도 원예가에서도 탈피한 내가 장미 향기가 밴 미풍에 실려 떠돌고 있다...
죽기 직전에 바라는 일이 하나 있다면, 직접 가꾼 이 공간과 함께 저세상으로 떠나는 것이리라... 나로서는 이 정원이 세계의 모든 것이고, 나의 전부이기도 하니까.
단비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비가 며칠간 계속 내리고, 햇볕도 충분히 내리쬐는, 좋기만 한 날씨가 계속돼 하루하루 만개의 순간이 다가온다. 장미들이 일제히 피어나 나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 정도의 아뜩한 이야기가 색의 언어와 향의 언어와 형태의 언어로 나를 어루만질 때, 도취와 황홀에 의해 정원과 세간의 일이 명확히 나뉘며, 나의 등에 매달려 있던 허무의 그림자가 깨끗이 사라진다. 정원에 나갈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혼자 승리한 심정이 된다. 우주를 지휘하는 실권자라도 된 듯한 착각을 즐기며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벗 삼아 살아가는 다른 이들을 비웃는다. 그렇게 오만한 나의 옆을 거짓 없는 진짜 삶이 스쳐간다. 와해되기 시작했던 영혼이 다시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를 짊어진 마음이 엽록소에 녹아들거나 알찬 양분이 되어 모근에 흡수돼 간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두 손을 비비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늙은 나의 뺨은 느슨해지고, 정신은 편하게 휴식을 취한다. 정원은 “장미를 따라 계속!”이라고 기쁜 듯이 외치고 있다. 보랏빛을 띤 북알프스 봉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빌려 온 풍경의 저력을 충분히 발산하고 있다...
...나는 무아의 경지에 포섭된다. 내 몸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잔혹한 겨울은 모조리 산산조각 나 버린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망각만 원하는, 정신 나간 낙천가, 자신의 불운을 한 번도 저주한 적 없는 생각 없는 몽상가, 아니, 화초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는 이단아가 된다.
...꽃들은 늦은 봄의 햇빛에 우아한 생명을 반사시키고, 온갖 사치스런 색깔로 스스로를 염색해 내 아름다운 채로 스러져 가는 생명체가 실재한다는 걸 증명한다...
천국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만개한 장미꽃은 휘어진 가지에 매달린 과일 같은 향기로움을 띤 채 지칠 줄 모르는 미를 계속 발산한다. 불쾌한 인상 등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이 잔혹한 세상을 향해 오로지 사랑의 말만 바친다...
끝없는 변화가 당연한 이 세계에서 꽃의 계절만을 돌아봐서는 안된다... 쾌락과 고통이 나뉘기 어려운 이 생애를 뚫고 나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코 한때의 더 나은 상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늘 현재에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자신을 다스리자고,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된 숙명이라고 끝을 맺는다.
매주 거르지 않는 약제 살포, 거의 매일 계속되는 김매기, 여름철 장미 가지치기, 아침저녁으로 물 주기, 덩굴식물 처내기...,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땀에 흠뻑 전 몸을 차가운 물로 씻어 내고, 포만감 있는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면 기분까지 개운해진다. 삶은 패배와는 전혀 관계없노라 큰소리도 친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말자. 대부분의 문제는 단칼에 해결해 버리자. 강인한 내가 되살아난다.
바람 없는 맑은 날 오후였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정원에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처음으로 땅에 적응해 길들여진 인간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매일매일의 마음고생, 사소한 것에 얽매이는 감정, 이렇게 저렇게 힘든 경험들, 깊어져만 가는 체념, 이러한 것이 전부 합쳐져 있는 세상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이 세상을 긍정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색감이 따뜻한 얼룩덜룩한 단풍 아래를 잠시 배회하다 홀로 명상에 몸을 맡기고, 한편으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노란 장미의 색이 깊어지고, 피어 있는 꽃들은 간직해 뒀던 미지의 향기를 풍긴다.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본래 자신의 모습이 되었을 때 드러나는 반짝임을 명확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절로 벤치에서 몸을 젖혀 하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장황한 푸념을 봉쇄하는 짙은 푸른색이, 속세의 모든 이해관계에 초연한 군청색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오래동안 추구해 온 것은... 실은 이러한 평온 그 자체인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정원은 가능한 색채를 모두 동원해, 조금 지쳐있던, 아니, 어쩌면 아사 직전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를 영혼을 금세 치유하고,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불길한 웅성거림에 파묻힌 바깥 세계와 나 사이에 경계선 하나가 깔끔하게 그어진 것 같은, 늘 봄인 아득히 먼 땅에 내던져진 것 같은, 무죄로 방면된 것 같은, 저승의 문 앞을 서성거린 것 같은... 황홀한 시선을 나뭇가지 끝에 두고 언제까지나 단풍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에 취해 있었다... 오랜만에 단풍의 열렬한 신봉자로 변한 나는 정원을 채색하고 있는 초목이 내 마음에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온 세상이 죄에 파묻히든, 인간이 생존 경쟁만을 수행하는 생명체로 있든, 지구란 행성이 호전적인 부자들이 다스리는 행성으로 있든, 우리의 미래를 옥죄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든,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확립이 망상과 같은 것이든,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가 영원하 수수께끼이든, 연약한 생명체가 모두 멸종되는 것이 자연의 대법칙이든 아니든 단풍이 선사한 도취의 하루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로써 훌륭한 생애는 아닐까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모든 노력이 무익한 것이었다 해도, 고통스러울 때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이 하나 없는, 기댈 곳 없는 신세였다 해도, 수많은 미로에 빠지고 풍진 세상을 거침없이 누벼 정토인지 뭔지에 도달할 수 없다 해도, 한 번 단풍의 향기에 감싸인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흙으로 돌아가는 숙명 따위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듯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유종의 미, 시적인 정서, 부활의 상징으로 단풍은 물직적 번영에 오염된 마음을 순화하고, 지적 혼란을 가라앉힌다. 행복이 순간적인 찰나인 것은 당연하며, 순간이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타이르고는 길고 깊은 침묵에 잠긴다. 그러면 나는 난폭한 유물론과 타고난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 어둠 속에 떠 있는 단풍에서 불멸의 철학을 느끼며 정원을 떠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체를 통해 현실을 계속 접하는 자세다... 체험과 경험이 밑받침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사람은, 경솔하게 산 사람보다도 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현실은 모든 생명체에게 끊임없는 투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아찔한 자유의 문은 현실과 투쟁하는 것을 기피한 자 앞에서 닫혀 버릴 것이다. 투쟁은 현실 안에만 숨겨져 있는 진정한 보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유일무이한 길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 불쾌한 것투성이, 지긋지긋한 것투성이,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이 재미있다고 발상을 전환하는 데 성공하지 않으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 같은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척추동물로서 당연히 흘려야 하는 땀과, 꾀죄죄한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겨우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아 고민에 휩싸였던 것은 아닐까...
... 인간도 엄연히 동물의 일원이다. 그런 만큼 육체를 충분히 사용해 현실의 큰 덩어리로서 자연계와 타협하고 최종적으로는 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삶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장엄하고 가혹한 대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그 자연의 풍요로움과 엄격함이 육체와 정신에 계속 큰 영향을 미치고, 잔혹한 이 세상에서 사는 의미를 영혼에 단단히 새겨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정원은 사계절 내내 고귀하고 명확한 삶의 방식을 제안해 주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생각을 이끌어 준다...
재생과 부활을 거듭하는 초목은 하찮은 존재인 나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생기가 바닥나는 것을 막아 준다. 또한 때로는 감미로운 평화와 영혼의 환희를 가져다주고, 죽음의 시기와 형태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 준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은 열정이고 희망이며, 사랑이고 도취다... 이 쓰라린 세상이 단순히 우연과 인연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혹은 망각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혹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지옥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좋아하는 장미 한 송이를 생각해 보자. 때와 장소에 엄격히 제약받는 그 장미가 어떻게 가혹한 바람을 견디며 꽃을 피우는지를...
찬바람 부는 광야를 홀로 걷는 것 같은 깊은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명은 어차피 타다 남은 나무토막 같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닫아 버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마음의 눈을 뜨고 주위를 샅샅이 보면 마른 풀에 몸을 숨기고 개화의 계절을 기다리는 들장미의 다부지고 씩씩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의지라는 것이 과연 정신의 어디쯤에 존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본래의 힘을 믿고 역경을 물리치며 그 힘을 발휘하려는 사람의 반짝거림은 장미의 그것보다 훨씬 멋지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길을 걷는 것이리라.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오만 가지 목숨이 반짝반짝 빛날 다음 봄을 기다리며, 새로운 정원과 새로운 소설에 대한 마음은 더욱 활기를 더해 간다. 남의 눈에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는 날들이 작지만 튼튼하게 뿌리를 박은 행복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퍼덕이며, 현세에 살고 있는 자의 쾌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극락은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정원이야말고 천국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날이 발전하는 유일무이한 극락정토를 만들 수 있는 것은... 흔한 일상의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덧없는 생명의 실을 무서울 정도로 끊임없이 잣고 있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일개 살아 있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0) | 2021.01.22 |
---|---|
오늘 하루 만이라도 (0) | 2020.12.11 |
파랑새의 밤 (0) | 2019.10.16 |
보르헤스의 말 (0) | 2019.09.06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30주기 기념 시전집 (0) | 2019.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