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30주기 기념 시전집
기형도 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03월 07일
껍질
공중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 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차창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대리석보다 차가운/ 내 환영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세월을 살았고/ 나와 동갑이었다.
감싸 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포도(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귀가
당신이 세수하신 물에선/ 항상 짠 냄새가 나요/ 가끔은 몇 개씩/ 조개껍질이 둥둥 떠 있어요/ 고양이 털이 가늘게 부드러워/ 새벽에 흘린 코피가 아직까지 젖어 있고/ 집은 멀기만 한데/ 신발 끈이 자꾸만 풀어져요./ 당신을 잊고 있는 밤이면, 어머니/ 우주비행사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우리 집 꽃밭에 소리 없이/ 별똥처럼 내려앉을 것입니다.
수채화
가느다란 새의 다리가/ 어항 속에 잠겨있다.
하얀 살에서/ 말갛게 비치는 / 푸른 정맥
투명한 물 위엔/ 어떤 붕어가 잃고 간/ 아가미 한 쪽.
빨간 장미를 보여주세요/ 빨간 장미.
깃털처럼/ 흰 화폭에/ 파도가 잘게 배어 나온다.
희망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눈물 흘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진
어떤 강물도 그의 성역을 범람하진 못했으리라/ 한세상 뜬구름만 잡으려 길을 떠난 아버지는/ 뜬구름으로 돌아와 사각 빤닥종이 위에 복고풍으로 앉아/ 은화 같은 웃음만 철철 흘리고 계셨다/ 대리석으로 기둥을 댄 그의 신전 밑둥에서/ 일찍이 사금파리 따위로 손가락을 베어내는/ 못생긴 재주만을 익힌 나의 남국의 방에서/ 나는 출발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성역에선/ 날감자 냄새 유츙의 알같이 모여있는 햇빛의 등속/ 평화란 그런 것이니라. 세상의 끝 간데는 한 가닥/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밤이 들어 새앙쥐들이 물고/ 뜯는 더러운 달빛이나 풀벌레들의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어떤 강물도 나의 성역을 범람하지 못했던 까닭은/ 내가 때로는 혼탁한 강물로 먼저 흐르고 비가 되기 전에/ 먹구름 속으로 물총새처럼 파묻혔던 것을. 아들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냐 너의 파닥거리는경험 이전에/ 나는 이미 너의 중심을 잡는 늑골이 되어 있느니라/ 해바라기 커다란 청둥잎새 지는 가을 날 뜨락/ 오랜 시간의 질곡은 언제난 습한 순풍으로 후대의/ 피를 덥혀주고 우리가 사람에 힘입고 무럭무럭 자라날 때/ 어떠한 평야를 살찌우지 못하랴 어느 광야를 잠재우지 못하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평화란 이름으로 되살아 흘러내릴 강물/ 속으로/ 아버지의 다리에 구겨진 칼날 같은 흔적조차 미더운 전설임에랴.
풀
나는/ 맹장을 달고도/ 초식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동물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정맥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신호/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내 아름다운 혼인 것이냐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맑은 날 바람이 불어/ 멍든 배를 쓸고 지나면/ 가슴을 울쿼 솟구친/ 네가 된 나의 노래는/ 떼 지어 서걱이며/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꽃
나/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교환수
요일을 알 수 없는 하루/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면/ 바람 없이 우수수 이파리를 터는/ 슬픈 노인의 초상이 우뚝 섰다.
우리는 눈물 한 항아리 가슴에 싣고/ 흔들이는 영아(嬰兒)로 달려와/ 방울바울 남을 주며, 버리며/ 남김없이 가슴을 비우고/ 흔들리는 고목으로 달려간다.
처음부터 우리는/ 손바닥에 손금을 새기듯/ 각기 노인의 초상 하나를 키우며/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꽃이 피고,/ 바람을 섬기는 아동 하나/ 세월을 건네주는 교환수의 헝클어진 얼굴을 하고/ 요일없이 돌아가는 거울 속에 주저앉는다.
시인1
나의 혼은 주인 없는 바다에서 일만 갈래/ 물살로 흘렀다. 일천 갈래는 고기 떼로 표류/ 하였다. 그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물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 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혼은/ 구만리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아이야 어디서 너는
아이야, 어디서 너는 온몸 가득 비를 적시고/ 왔느냐. 네 알몸 위로 수천의 강물이 흐른다. 찬/ 가슴팍 위로 저 세상을 향한 강이 흐른다.
갈밭을 헤치고 왔니.네 머리카락에 걸린 하얀 갈꽃이/ 누운 채로 젖어 있다. 그 갈꽃 무너지는 서산(西山)을 아비는/ 네 몸만큼의 짠 빗물을 뿌리며 넘어갔더란다.아이야/ 아비의 그 구름을 먹고 왔느냐.
호롱을 켜려무나. 뿌옇게 몰려오는 소나기를 가득 담고/ 어둠 속을 흐르는, 네 눈을 켜려무나. 하늘에 실노을이/ 서행(西行)하고 어른거리는 불빛은 꽃을 쫓는다.
닦아도닦아도 흐르는 꽃술(花酒)같은 네 강물./ 갈꽃은 붉게붉게 익어가는데, 아이야 네 눈 가득/ 아비가 젖어 있구나.
고독의 깊이
한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중량으로 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그 깊은 강을 따라 내 식사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운무 가득한 가슴이여/ 내 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약속
아이는 살았을 때 한 가지 꿈이 있었다./ 아무도 그 꿈을 몰랐다.
죽을 때 그는 뜬 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이 졌다고......
겨울, 우리들의 도시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젠 쓸모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 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무형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찬 황량한 도시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세상./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도시 앞에 서서/ 버릴 것 없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각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이해(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넣느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서 나는!
거리에서
우리가 오늘 거둔 수확은 무엇일까 그대여 하고 물으면/ 갑자기 지상엔 어둠, 거리를 질주하는 바람기둥./ 그대여, 우리는 지금 출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도화지 위에 서 있다./ 제각기 하루의 스위치를 내리고/ 웅성이며 사람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면/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아픈 다리를 데리고 걸으면서/ 우리는 누구도 시간을 묻지 않았다. 문득/ 우리의 궤적으로 그어진 꺾은선 그래프에 허리를 찔리우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기에 어둠이 달려왔다./ 어둠이여 그러나 숨길 그 무엇이 있어 너를 부르겠는가/ 빌딩 너머 몇 점 노을로도 갑자기 수척해지는 거리를 보며/ 우리는 말 없이 서 있을 뿐이다./ 전신으로 서 있을 뿐이다 어둠이여
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상자 속에 툭/툭 채집되어야 했을까/ 팽팽하게 얼어붙는 한 장 바람의 형상이 되어/ 우우 어디로 가서 기댈까/ 우리가 활활 소멸할 수 있는 미지의 불은 어디?/ 우리는 도시의 끝, 그 바람만 줄달음치는 역사(驛舍)를 배회하였다./ 그러나 여객 운임표로 할당되는 가난한 우리의 생./ 갈 곳은 황량한 도시뿐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낯선 도시 한 켠에 주저앉아 휘파람 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까./ 그 믿음을 무엇이라 부를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늘 시간이 정지해 있는 도시./ 푯말 없이 오늘도 캄캄하게 버티고 선/ 아아, 잎 뚝뚝 떨어지는 우리들의 도시./ 급류처럼 참혹하게 살고 싶었다, 우리/ 현재는 언제나 삶의 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벽에서 뒤돌아보는/ 우리의 조용한 행적은?
어둠이 정적의 보자기를 펄럭여 세상을 덮고/ 온통 바람만 이삭처럼 툭툭 굴러다니는 도시에/ 페이지를 넘기면 막 가을이구나./ 그대여, 추수하기에 너무도 우리의 생은 이르다./ 그러나 우리가 적막으로 폐허가 된 뜨락에 부끄럽게 설 때/ 오, 그래도 당당하게 드러나는/ 몇 웅큼 퇴비로 변한 우리들의 사랑/ 가자, 얼굴을 감춘 그대여/ 개인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세상/ 함깨 가자, 어디에든 노을은 피고 바람 속에서 새벽은 오는 것/ 이제는 일생을 걸어야 할 때, 지친 하루를 파묻고 일어서면/ 캄캄한 어느 골목에선가 휘파람처럼 폭풍처럼/ 아아, 화강암 같은 시간의 호각 소리가 우릴 부르고 있네
어느 날
그대도 알 거야/ 노을이나 눈(雪)욕설/ 바람 부는 것/ 엘리어트 시집 한 권 값/ 예리한 나이프로 잘려 나간/ 몇 장 기억 같은 것/ 물론 그대도 알 거야/ 거리 곳곳에 포스터처럼 발려 있는/ 선명한 면도 자국 같은/ 알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광막한 시대의/ 얼음의 원리. 나이테 측정법 같은/ 1시, 2시, 1시 30분까지도/ 그대 역시 알 거야/ 알겠지, 빠짐없어....../ ?/ 가만,....../ 그런데?
이 쓸쓸함은......
누구였을까/ 직선의 슬픔같이 짧은 밤 간이역 호각 소리같이/ 한 사나이가 비밀처럼 지나갔다./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평범한 가을/ 목 쉰 불빛 몇 점/ 구겨진 마른 수건처럼 씁쓸한 얼굴/ 내가 그를 지나쳤다/ 불빛 가운데 새하얀 생선 가시/ 몇 개로 떠 있는 나무/ 군복의 외로운 각짐./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평범한 가을/ 쿵,쿵,쿵,쿵/ 그런데 누구였을까/ 외투도 없이 얼핏/ 쉼표처럼 막막한 이 쓸쓸함은......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슬프구나/ 벌레 먹은 햇빛은 너무도 쇠잔하여/ 마른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이제 한 도막 볏짚만큼 짧은 가을도 숨죽여 지나가고/ 적막한 벌판에 허수아비 하나 남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가을의 임종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하여 앙상한 빈 들엔 시간이 가파르게 이동하고/ 이치를 아는 바람의 무리만이/ 생각난 듯 희뜩희뜩 떠다닐 것이다./ 곧 밤이 되리니 겹쳐 꾸는 꿈속에서/ 암초에 걸린 맨 발로/ 핼쓱한 하얀 달 하나 떠오르고/ 기진한 덩굴손 같은 달빛 몇 줄기로/ 단단히 동여맨 가을의 시체를 끌고 이리저리 떠돌다/ 새벽이면 세상 빈자리마다/ 얼어붙은 땀을 쏘며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여, 그러나 언제 우리가/ 너를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상식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디 있으며 새롭게 소멸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 지폐처럼 흩날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숱한 겨울과 싸워 이겨왔던 것이냐, 보아라/ 필생의 사랑을 껴안고 엉켜 쓰러지는 일년초의 아름다움이여./ 불어라, 바람아 우리가 가을을 잃은부족(部族)으로 헤매이다/ 힘차게 튕겨지는 씨앗의 형상으로/ 우리는 견고하게 되살아나/ 불어라 바람아, 우리 몸이 가장 냉혹한 처형의 창고에 던져지고/ 바람아 불어라, 우리 목숨이 식은 노을 퍼붓는 거리에서/ 한 장 얼음으로 결박될지라도/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다가와/ 창날같이 부릅뜬 우리의 눈빛을 거두겠는가/ 죽었는가, 장엄한 우리여, 누가 우리를 죽음이라 부르겠는가
얼음의 빛-겨울 판화
겨울 풀장 밑바닥에 피난민처럼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어요?
오늘도 순은으로 잘린 햇빛의 무수한손목들은 어디로 가요?
제대병
위병소를 내려오다 문득 뒤돌아본 1982년/ 8월27일의 부대의 진입로. 무엇이 따라오며/ 내 낡은 군복 뒤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었을까/ 부르느냐 잡으면 탄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사계/ 여름을 살면서 가을을 불시착하고/ 때로는 하찮은 슬픔 따위로 더러운 그리움으로/ 거꾸로 돌아가기도 했던 헝클어진 시침(時針)의 사열
떠나야 하리라/ 단호히 수입포 가득 음숩한 시간의 녹 닦아내며/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많은 기다림의 직립과 살아 있지 않음들 또한 땅에 묻히리라/ 잊혀지리라 가끔씩 낯선 시간 속에서 뒤늦게 폭발하는/ 불발탄의 기억에 매운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생을 낙오하는 조준선 위로 떠오르는/ 몇 소절 군가의 후렴에 눈살 찌푸리며 따라 일어설/ 추억들이란 간직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먼 먼 훗날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을/ 살아가다가 거리에서 문득 마주치는/ 군용 트럭 가득가득 실린 젊음의 중량 스쳐가며/ 마지못해 쓸쓸히 웃겠지만/ 그때까지 무엇이 살아 있어 내 젊은 날 눈시울 촉촉히 적셔주던/ 흙길의 군화 자국 위에서 숫구쳐 올라/ 굳은 땅 그득히 흘려줄 내부의 눈물 간직할 건가
잘 있거라 돌아보면 여전히 서 있는 슬픔/ 또한 조그맣게 잘리며 아스라히 사거리(射距離)를 벗어나는/ 표적지처럼 멀어지거늘/ 이제 나는 어두운 생의 경계에 서서/ 밤낮으로 시간의 능선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 소리 하나하나 생포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 서야 하는 초병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잘 있거라 내 젊은 날 언제나 가득히/ 그 자리 고여 있을 여름, 그 처연한 호각 소리여/ 훈련이란 우리들 행군간의 뒤돌아보지 않는연습의 투사일진대/ 오,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하늘/ 입간판을 돌아설 때 한꺼번에 충을 겨누는 사계/ 뒤돌아보면 쏜다. 그리하여 두 손 들고 내려오면 위병소/ 그 질척한 세월의 습곡(濕谷) 아아, 사나이로 태어나서
기형도 사후 30주년 기념시집.
그가 29살로 세상을 떠난지 30년, 지금도 그는 여전히 29세이고, 그 후로 나는 30년을 더 살아 그를 그, 혹은 너라고 불러도 아무렇지 않을 나이가 됐다.
어쩌면 그는 그때 그렇게 떠나길 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입 속의 검은 잎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 후의 그 쓰디씀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어?
다시 읽는 얄팍한 한 줌의 시집이 500페이지짜리 소설처럼 깊고 진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며 반납, 재대출, 반납, 재대출을 반복하며, 어라, 왜 예약하는 사람이 없지? 의아해하며, 한편으론 잘됐다, 생각하며 맘껏 지니고서 오래 오래 읽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이미 그의 시집이 있었어... 당연히.
서가 귀퉁이에서 시집을 찾아 꺼내 먼지를 털며,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그렇게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하며, 오래 잊고 있었다..., 새삼 깨달았다.
다시 읽는 그의 시는 여전히 새롭다.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어떻게 이런 표현이... 하며 몇 번이고 되풀이 읽는 구절들 많고, 클리세 없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다만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어쩜 그렇게 모두 외롭고 어둡고 쓰디 쓴지...
그는 젊음의 양면 중 한 면만을 파들어 가고, 그의 영혼은 해를 등지고 항상 그늘속만을 서성였나보다.
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젊은 나이, 스물 아홉.
하지만 그 스스로는 아마, 나는 젊은 적이 없었다, 느꼈을지도.
기형도 후 30년 동안 무수한 시인들이 나오고 무수한 시들이 쏟아졌고 난 그 시들을 무수히 읽었지만 다시 읽는 그의 시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여기 나머지 그의 시들을 적으며 나도 그의 30주기를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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