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 봐라 법정 스님의 사유 노트와 미발표 원고

바다가는길 2018. 10. 26. 15:05

간다, 봐라

 간다, 봐라 법정 스님의 사유 노트와 미발표 원고

                                     법정 저/리경 | 김영사 | 2018년 05월 10일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산 중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 달 건져 가시오

 

-한 낮에는 무덥고 밤에는 시원하고 맑은 달.

오늘은 참으로 고마운 날이다. 오랜만에 청명한 달밤을 맞이하다. 달빛이 좋아 잠옷 바람으로 뜰에 나가 후박나무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참을 보냈다.

앞산에 떠오른 열이레 달이 가을달처럼 맑고 투명했다. 달빛을 베고 후박나무도 잠이 든 듯 미풍도 하지 않다가 이따금 모로 돌아눕듯 한 줄기 맑은 바람이 스치면 잎새들이 조용히 살랑거린다. 하늘에는 달빛에 가려 별이 희미하게 듬덩듬성 돋아 있다. 아까부터 쏙독 쏙독 쏙독 쏙독새가 이슥한 밤을 울어예고 있다.

달과 나무와 맑고 서늘한 밤공기 속에 나는 산신령처럼 묵묵히 앉아 맑고 조촐한 복을 누렸다. 홀로이기 때문에 이런 복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법정스님 돌아가신지 벌써 9년째가 되나보다.

스님의 저서는 유언으로 절판돼 중고책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얘기를 가끔 듣기도 했는데, 분명 본인 사후에 저작권이니 판권이니 인세니를 갖고 이런 저런 싸움이 일게 뻔해 아예 분쟁의 소지를 없애신 게 아닌가 싶지만, 스님의 책들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었다.

그런 참에 새로운 스님의 글들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글들은 위와 같이 스님의 소소한 하루 하루의 얘기와 생각들이 펼쳐져 있어 아, 이렇게 지내셨었구나, 하고 그 일상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다가 깊은 산속 청량한 공기 한 모금을 마시는 듯해서, 한 번 읽고, 마치 처음인듯 또 읽고...

 

글을 엮은 이의 후기에 이 글 묶음이 나오게 된 배경이 소개돼있다.

"스님, 아궁이에 무얼 또 그렇게 태우십니까?"

"방편을 태울 뿐입니다."

"아궁이가 방편을 먹으면 도를 이룰 수 있습니까?"

"보살님, 그럼 내가 이 뭉텅이를 드리면 공부에 더 깊이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 후로 태워질 원고뭉치가 엮은 이에게 왔다고.

이 책은 그 중 2008년도에 버려진 원고들이고.

2010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시기 바로 전의 원고들인 셈.

 

스님, 그 때 돌아가시길 잘했어요.. 하는 생각.

세상은 정말 따라잡기 힘들 게 날로 험악해져가니, 예전 같으면 생각속에 떠올리지도 못할 일들이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스님, 그 칼칼한 성격에 어떻게 참아내셨을지...

 

;간다, 봐라' 라는 책 제목은 스님의 임종게이다.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 온 것이 그것이니라. 간다, 봐라,"

분별하지 말라.

1초도 멈출 수 없는 분별심때문에 마음이 온통 시끄러운 평범한 사람하고는 다르셨겠네.

 

책 속의 시들, 가만히 되뇌이면 그 적적한 풍경이 마음을 고요케 하니 적어놓고 가끔 읽으려고...

이 책은 유고의 일부분일테니 또 다른 새 글을 기다린다.

 

 

先有此庵 (선유차암)  먼저 이 암자 있은 뒤에
方有世界 (방유세계)  비로소 세계가 있었으니
世界壞時 (세계괴시)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此庵不壞 (차암불괴)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庵中主人 (암중주인)  암자 안의 주인이야
無在不在 (무재부재)  있고 없고 관계없이
月照長空 (월조장공)  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風生萬籟 (풍생만뢰)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노라
-호주 하무산에 계신 석옥 청공이 1347년 태고암가에 붙인 글-


-고려 말 태고 보우선사가 중국에 가서 석옥 청공을 만나 태고암가를 보여주니, 석옥 청공스님이 "참으로 공겁이전의 소식을 얻으 것으로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노라" 하며 위와 같은 발문을 지어 노래에 화답하였다고 함.

 

 

 

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掬水月在手 弄花香滿衣  (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
물을 움켜뜨니 달이 손 안에 있고, 꽃을 만지니 향기가 옷깃에 스민다.

 

 

 

是是非非都佛關  (시시비비도부관)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山山水水任自閑  (산산수수임자한)  산이건물이건 그대로 두라
莫問西天安養國  (막문서천안양국)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라
白雲斷處有靑山  (백운단처유청산)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임제 의현

 

 

 

風靜花猶落  (풍정화유락)  바람 고요한데 꽃은 지고
鳥鳴山更幽  (조명산갱유) 새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
天共白雲曉  (천공백운효)  하늘은 흰구름 함께 밝아오고
水和明月流  (수화명월류)  시냇물은 밝은 달 따라 흘러간다


-휴정 선사

 

 

 

吾有一言    (오유일언)     내가 한마디 하고자 하노니
絶慮忘緣    (절려망언)     생각 끊고 반연 쉬고
兀然無事坐  (올연무사좌)  일없이 우뚝 앉아 있으니
春來草自靑   (춘래초자청)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선가귀감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천 길 낚싯줄을 곧바로 드리우다
一波纔動萬波隨 (일파재동만파수)   한 물결 일렁이니 수만 물결 따라 인다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불식)   밤 고요하고 물 차가워 고기 물지 않아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빈 배에 가득 달만 싣고 돌아간다


-덕성 선사

 


山自靑 水自綠 (산자청 수자록 )  산 절로 흐르고 물 절로 흐른다
淸風拂 白雲歸 (청풍불 백운귀)   맑은 바람 불고 흰 구름 간다
盡日遊 盤石上 (진일유 반석상)  온 종일 하릴없이 반석 위에 노니나니
我捨世 更何希 (아사세 갱하희)   나는 세상을 버렸는데 다시 무얼 바라나


-경허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짐을 조금 들고 가야 한다. 아주 높이 올라 가려면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

 

단순소박하게,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달과 별들도 아름다웠고, 시냇물과 강기슭, 숲과 바위, 염소와 풍뎅이, 꽃과 나비도 아름답게 보였다.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 활짝 열린 영혼으로, 걱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가를, 평상시에 철저하게 성찰하고 있어야 한다.


절제라는 미덕을 돋보니게 하기 위해서는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생활을 언제나 결핍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은, 그 자체가 감사를 느끼며 사는 지혜일 수도 있다.

 

청빈이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함께하면서 만물과 더불어 사는 일. 청빈이란 소유에 대한 욕망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일. 청빈이란 자신의 사상의 표현으로서 가장 간소한 삶의 선택.


소유를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정신활동을 자유롭게 한다.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면 인간적인 마음이 저해된다. 욕망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가지고는 자기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감지할 수 없다. 소유물을 최소화하여 스스로를 우주적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수단이 바로 청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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