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우연히 길을 지나다 안내판을 본 적이 있었다.
'장욱진 고택'
아니 여기 장욱진 고택이 있었어?
언제 한 번 가봐야겠네.. 마음먹고 있던 차, 마침 근처에서 한 두시간의 짬이 나길래 가보기로했다.
표지판을 안내 삼아 골목길을 올라 고택에 들어선다.
입장료가 이천원이라는데 매표소는 어디지?
잔돈을 바꾸려 들린 찻집에 관리인인듯 싶은 분이, 다 잠겨서 볼 게 없는데... 하신다.
그냥 건물이라도 보죠 뭐.
따로 매표소는 없고 찻집 담벼락에 놓인 아크릴함에 그냥 알아서 입장료를 집어넣으면 된다.
집 입구에 구조도랑 고택의 내력이 간략히 설명이 돼있어 편리했다.
집은 1844년 지어진 초가를 1986년 화백이 기와집으로 개조해, 돌아가시기 전 1990년까지 지내셨다.
고즈넉한 담장 옆 파라솔. 날 좋은 때 나와 앉아 차 한잔 마시면 운치있을 듯.
담장을 끼고 올라가면 그림속 집 그대로 지었다는 양옥과 낮으막한 언덕 위 정자 관어당이 나온다.
집 안 커다란 나무와 그 뒤 정자옆 나무에 까치들이 얼마나 모여들어 있는지, 아, 화백의 그림은 일상을 그대로 담는 사실화였구나 하는 걸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
들어서는 순간 왠지 마음이 편안히 여유로워지는 옛집. 흙마당하며 아담한 석등들, 잘 자란 소나무, 소박한 마당이 좋다.
언제 비가 왔던가? 처마에서 떨어진 낙수가 바닥에 길을 만들었다.
그래도 화백이 살았던 고택이니 뭔가 살아 생전의 모습을 볼 수있는, 뭐 아크릴 칸막이 안이라도, 아니면 유리로 막혀있더라도, 진짜가 아니고 복제품으로라도 화실이나 생활의 모습이 재현돼있을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집마다 방마다 커다란 자물쇠가 꽁꽁 채워져있었다.
구조도에 전시실이라고 표시된 곳도 그렇고 언덕 위 양옥도 마찬가지.
문마다 다 잠겨있어 작은 마당을 한바퀴 휘 돌고 언덕위 정자로. 정자에서 보이는 집안 풍경.
낙엽이 가득 담긴 물확. 이 나무로 저 나무로 끼리끼리 날아다니기 바쁘던 까치 한 마리, 목이 말랐던지 물확에 앉아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며 물을 마신다. 바로 옆의 나는 안보이는지 신경도 안쓰고 목울대를 꼴록여대며 한 모금 물 마시고 오른쪽을 살피고 또 한 모금 물마시고 왼쪽을 살피고.
사진을 찍고싶었지만 까치가 놀랄까봐 꼼짝도 못하고 녀석이 물 다 마시길 기다렸다. 여기 까치는 왠지 작고 귀여워 앵무새 같다. 마치 그림속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던.
정자는 초가로 지붕을 이었다. 크기도 자그마하고 정감있는 모습. 처마끝에 달린 풍경이 딩, 댕, 둔탁하게 울리고, 어디선가 또다른 풍경이 맑은 소리로 땡그랑 쟁그랑댄다. 나중에 보니 사랑채 처마에도 풍경이 달려있더라.
정자에 앉으니 맑은 하늘에 햇빛이 어찌나 좋던지.
지지배배, 깍깍대며 옆을 날아다니는 참새며 박새며 까치며, 이름 모를 새들의 뒤를 한참 눈으로 쫓다가 제법 부는 바람에 동그마한 앞산 나무잎들 화르르 화르르 반짝이는 거 한참 보다가 푸른 하늘을 모였다 흩어졌다, 희게 때론 무지개빛으로 빛나며 바삐 몰려가는 구름 한참 보다가.
아, 여기 집 채 채마다 자물쇠로 꽁꽁 잠겨있어 볼 게 없어도 아무도 없는 이 공간, 멍 때리기 참 좋구나...
한참을 멍 때리다 시간이 되어 아쉬운 엉덩이를 털고 뒤란쪽으로 내려온다.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 자그마한 텃밭도 있고. 아마 화백이 사셨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지 않을까.
집콕하고 있느라 밖의 날씨도 제대로 모른 채 지냈는데 요즘 꽤 추웠나보다. 응달의 물확에 제법 두꺼운 얼음이 얼었다.
집을 개조할 때 지붕만 기와로 바꾸고 틀은 그대로 둔 걸까? 아니면 새로 지으면서도 일부러 그랬을까? 집의 모든 기둥들이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그 곡선들이 오히려 자유롭고 여유롭다.
관람객을 위해 열어 둔 문. 오래된 문짝이 센 바람에 삐걱이다 때론 쾅 닫히기도 하고.. 사람이 살지않는 빈 집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몸과도 같아 을씨년스럽다.
대추차가 맛있다는 소문. 밖에 오래 있었더니 제법 춥네. 카페에서 따끈한 대추차를 사들고 굳이 다시 사랑채로. 예쁜 도자기잔이 맘에 든다. 대추차도 달달하니 맛있었고.
맛있는 대추차 마시며 2차 멍 때리기. 설명문에 의하면 화백이 살던 예전엔 이 툇마루에서 앞산이며 그 밑을 흐르던 냇물을 볼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꽉 찬 건물들로 시야가 다 가려졌다. 그대신 마당의 소나무들이 어찌나 장하던지.
조경을 위해 새로 심은 건지, 아니면 혹시 화백이 살 때 어린 소나무 몇 그루 심은 게 지금 이렇게 잘 자란 걸까?
찻잔 돌려주러 갔다가 잠시 카페 안을 구경했다. 말로는 카페겸 아트샵이지만 기념품은 하나도 없고 화집 몇권, 책 몇 권뿐.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돼있는 카페는 오래된 마루가 따뜻하니 편안한 분위기다. 이렇게 포스터 몇 걸려있고.
그래도 재단이 있어 고택이 보존이 된 게 어디랴. 하지만 이왕이면 여기에 오면 생전의 화백의 자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더 좋겠지. 아마 아직은 재단의 여력이 못미치는 거겠지.
덕분에 관람객으로 북적이는 대신 호젓이 그림 속 풍경을 떠올리며, 수십년 전 화백도 나처럼 여기에 앉아 저 산, 저 하늘 봤겠네, 하며 홀로 그 공간을 누릴 수 있어 좋았지만, 언젠가 이 호젓한 시간을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게 아쉬워질 정도로 이 공간이 활성화되길 또한편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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