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아마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에 방점이 찍혔었겠지만 이젠 '식탁을 털고'에 더 무게중심이 쏠리지 않을지.
일상이란 쳇바퀴 돌리기.
돌려도 돌려도 끝이 나지 않는 일, 어디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제자리 뱅뱅.
바퀴를 돌릴수록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도저히 못참겠다! 답답해!, 할 때 늘 떠오르는 장소가 동해 바다, 설악산, 혹은 제주였는데..
사실 뭐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어디 해외로 한 두어달 장기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혹은 이틀 사흘, 잠깐 식탁을 털고 일어난다는 일은.
생각해보니 설악산을 오른 지 참 오래 됐다.
한 때는 일년에 적어도 한 번, 아니면 두 번은 설악산엘 갔었는데...
늘 발치께만 서성이다 돌아와도 설악의 여름에, 혹은 겨울에 잠시 푹 잠겨 있던 기억과 에너지로 나머지 시간을 살곤 했었지.
작년 초 동해 바다를 간 김에 정말 정말 오랜만에 권금성을 올랐었지만 잠깐 아, 하고 반가웠을 뿐 마음에 기별도 안 가 늘 그 산이 생각났었다.
언제 다시 와야지, 하다가 핑계거리를 하나 만들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드디어 일어 나선다.
설악산의 관문은 속초 바다.
얘까지 와서 목적지가 산이라고 바다에 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한없이 펼쳐진 너른 바다와 너른 하늘, 그 탁트인 무한공간이 나를 숨 쉬게 한다.
해가 기우는 시간, 바닷 바람이 너무 거세 초겨울처럼 몸이 오싹 춥다.
이 센 바람 속에 게다가 서로 띄엄 띄엄 있으면서도 다들 마스크를 꼭꼭 쓰고 있다. 아휴, 착한 우리 국민들.
사람들 멀리 있을 때 살짝 마스크 벗고 바다를 호흡, 아 이 공기, 이 냄새..
게으름 탓에 놀멘 놀멘 길을 떠나 어차피 오늘은 산을 오르기엔 늦었으니 바닷바람도 쐬고 그네의자에 앉아 흔들 흔들 멍도 때리고...
숙소는 켄싱턴 호텔. 이유는 단 하나, 설악산 입구라는 것. 한 5분 걸으면 바로 설악산이다.
후기들을 보니 다들 괜찮다 하네.
와보니 정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객실 침구니 욕실도 정갈하고, 직원들 기본 애티튜드도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이 없었다.
객실층 복도에 유명스포츠인들의 기념 부스들이 있다. 하나 하나 구경했어도 재미있었을 걸 생각해보니 그냥 휙 지나치고 말았다. 아기자기 놓인 여러 소품들이 공간을 다정하고 아늑하게 만든다.
9층의 애비로드. 비틀즈의 기념품들로 장식돼있고 블랙의 인테리어도 꽤 그럴싸했다. 하지만 커피는 너무 맛없어.
애비로드의 백미는 테라스. 이 뷰, 어쩔!
벚꽃 필 무렵엔 설악산에 왔던 적이 없나 봐. 설악동 들어오는 길도 그렇고 처음 보는 벚꽃 만발한 풍경에 탄성, 탄성.
길은 한참이나 산책로처럼 평탄히 이어진다. 내 발소리도 시끄러워 잠시 멈춰서면 고요, 조용.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스스스스.. 소리, 비비배배 명랑한 새소리뿐. 그 고요함이 너무 좋아 사람 기척 들릴 때까지 길 가운데 서서 망중한. 새소리 너무 예뻐 한참 녹음해왔는데 와서 들어보니 그 소리가 아닐세.
아찔한 다리와 바위벽에 붙은 계단들. 그냥 오르기만해도 발바닥이 간질거리는데 이걸 어떻게 설치한 거야? 이 산속까지 자재들은 어떻게 나르고? 편안한 산행을 위해 애썼을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다시 생각했다.
저 위로 토왕성폭포 가는 길이 이어지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체력도 체력이고 신발장에 박아뒀다 오랜만에 꺼내신은 등산화 밑창이 다 부서져 발밑이 불안하다.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기억이 새롭다.
너무 덥기 전에 다시 한 번 가보자, 못 오른 토왕성폭포까지 가보자 했었는데 한 번 주저앉은 엉덩이는 또 무거워졌다.
인공의 것이라곤, 인공의 소리라곤 하나도 없는 그곳, 모든 것이 다 아름답기만 했던 그곳, 그립네.
온 몸을 옥죄던 족쇄가 다 풀린 듯, 덕지덕지 붙은 오래된 먼지 다 털린 듯 편안하고 시원했었는데.
사람 없을 때 마스크 벗고 들이쉬던 공기는 또 얼마나 달콤하고.
한 10m 전방에 한 팀, 또 한 10m 후방에 한 팀, 이렇게 띄엄띄엄인데도 거의 대부분 마스크들을 꼭꼭 쓰고들 산행을 했다. 얼마나 착한 우리 국민들인지.
가을쯤 다시 거길 가면 그 땐 마스크 벗고 맘껏 그 공기를 마실 수 있으려나?
이상한 시대를 사는 지금, 그런 공간과 시간을 누릴 여유가 잠시라도 내게 주어졌음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