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기억함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설악산

바다가는길 2021. 4. 23. 15:31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조용히 뇌이면 어디선가 갑자기 살랑, 바람결이 느껴지는 문구.

어릴 땐 아마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에 방점이 찍혔었겠지만 이젠 '식탁을 털고'에 더 무게중심이 쏠리지 않을지.

일상이란 쳇바퀴 돌리기.

돌려도 돌려도 끝이 나지 않는 일, 어디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제자리 뱅뱅.

바퀴를 돌릴수록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도저히 못참겠다! 답답해!, 할 때 늘 떠오르는 장소가 동해 바다, 설악산, 혹은 제주였는데..

사실 뭐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어디 해외로 한 두어달 장기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혹은 이틀 사흘, 잠깐 식탁을 털고 일어난다는 일은.

 

생각해보니 설악산을 오른 지 참 오래 됐다.

한 때는 일년에 적어도 한 번, 아니면 두 번은 설악산엘 갔었는데...

늘 발치께만 서성이다 돌아와도 설악의 여름에, 혹은 겨울에 잠시 푹 잠겨 있던 기억과 에너지로 나머지 시간을 살곤 했었지.

작년 초 동해 바다를 간 김에 정말 정말 오랜만에 권금성을 올랐었지만 잠깐 아, 하고 반가웠을 뿐 마음에 기별도 안 가 늘 그 산이 생각났었다.

언제 다시 와야지, 하다가 핑계거리를 하나 만들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드디어 일어 나선다.

 

설악산의 관문은 속초 바다.

얘까지 와서 목적지가 산이라고 바다에 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한없이 펼쳐진 너른 바다와 너른 하늘, 그 탁트인 무한공간이 나를 숨 쉬게 한다.

해가 기우는 시간, 바닷 바람이 너무 거세 초겨울처럼 몸이 오싹 춥다.

이 센 바람 속에 게다가 서로 띄엄 띄엄 있으면서도 다들 마스크를 꼭꼭 쓰고 있다. 아휴, 착한 우리 국민들.

사람들 멀리 있을 때 살짝 마스크 벗고 바다를 호흡, 아 이 공기, 이 냄새..

게으름 탓에 놀멘 놀멘 길을 떠나 어차피 오늘은 산을 오르기엔 늦었으니 바닷바람도 쐬고 그네의자에 앉아 흔들 흔들 멍도 때리고...

 

지난 번 왔을 때 한창 공사중이더니 이걸 만드려고 그랬나 봐.

 

 

숙소는 켄싱턴 호텔. 이유는 단 하나, 설악산 입구라는 것.  한 5분 걸으면 바로 설악산이다.

후기들을 보니 다들 괜찮다 하네.

와보니 정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객실 침구니 욕실도 정갈하고, 직원들 기본 애티튜드도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이 없었다.

객실층 복도에 유명스포츠인들의 기념 부스들이 있다. 하나 하나 구경했어도 재미있었을 걸 생각해보니 그냥 휙 지나치고 말았다. 아기자기 놓인 여러 소품들이 공간을 다정하고 아늑하게 만든다.

 

9층의 애비로드. 비틀즈의 기념품들로 장식돼있고 블랙의 인테리어도 꽤 그럴싸했다. 하지만 커피는 너무 맛없어.

애비로드의 백미는 테라스. 이 뷰, 어쩔!

벚꽃 필 무렵엔 설악산에 왔던 적이 없나 봐. 설악동 들어오는 길도 그렇고 처음 보는 벚꽃 만발한 풍경에 탄성, 탄성.

신흥사쪽으로 들어서기 전 계곡구경부터. 햇살에 부서지는 물빛이 싱그럽다.
단청 벗겨진 신흥사 일주문, 고색창연하다.
목련꽃도 이렇게 흐드러지고..
비선대 가는 길은 동네 산책로처럼 정비가 돼서 한 2,30분쯤은 거의 포장도로를 걷는다. 움직임이 불편한 분들, 휠체어들도 쉽게 어느 정도 산 깊이까지 들어와 산을 즐길 수 있으니 좋지만 산 자체의 자연스런 맛이 떨어지는 건 좀 섭섭하다. 평탄한 포장길 옆으로 얕은 언덕들이 펼쳐지고 계곡은 보이지않는데 계속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 물소리 찾아 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 곳곳에 산수유, 진달래.
잠시 나무가지를 헤치며 물소리를 따라가니 어느 순간 이런 풍경이, 와! 저 물 색 뭐냐?
설악산은 정말 오랜만이야. 물 이렇게 맑게 남아있어줘서 너무 고맙다. 투명하고 영롱하기 이를 데 없어 한 줌 떠서 굳혀 간직하고싶은 보석같은 물. 햇빛에 반짝이는 물빛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길을 벗어나 꽤 들어온 언덕 밑이라 아무도 모르는 계곡을 독차지, 물소리 한참 듣다, 물 한참 들여다보다, 죽 풍경을 두르며 영상 찍다 또 한참 물 바라보다... 갈 길이 멀지.. 정신차리고 겨우 떠나온 비밀계곡.
아무렇게나 뒹구는 돌멩이들, 맑은 물 돌돌 흐르는 계곡, 연두빛 잎 틔우며 숲을 이룬 나무들, 오르지도 못할 저 멀리 아스라한 산등성이, 이 공기, 이 소리, 이 공간.. 마치 오랜만에 집에 온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느 정도 산으로 들어오면 드디어 길이 계곡과 함께 간다. 옆눈으로 에메랄드빛 물이 계속 보이는 바람에 수시로 멈춰 물색에 감동, 물소리에 감동하느라 산행이 진도가 안나간다. 쨍한 햇빛에 휴대폰 화면이 새까매져 앵글에 뭐가 들어오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채로 대충 내가 보는 그 방향을 향해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나중에 집에 가서라도 듣고싶어 물소리도 한참 녹음하고.
드디어 산길 같은 산길 시작.
수시로 내 발걸음을 잡는 계곡들. 어디든 너무나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물빛.
눈 끝에 흘깃 걸린 꼬꼬마 들꽃.
이 정도 각도는 나와줘야 비로서 산을 오르는 것 같지. 그냥 자연스러운 산길인 것 같지만 저 디딤돌들 누군가가 사람들 딛기 편하게 정리한 길이다. 등산로 곳곳에 그런 정비의 흔적이 보여 땀 뻘뻘 흘리며 무거운 돌들 들었다 놨다했을 그분들의 수고를 생각했었다.
주변을 맴돌며 자꾸 따라오던 다람쥐 녀석. 아마 먹이라도 줄줄 알고 그랬을테데, 줄만한 게 하나도 없어서 미안. 야생동물한테 먹이 주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잣이나 호두 몇 알쯤 챙겨가 혹시 만나면 줘도 괜찮지않을까?
아름다운 산봉우리. 거대한 설악산 전체를 보면 여긴 비록 발치 께밖에 안되겠지만 설악산은 정말 수려하다.
아이스크림 구름 동동.
여기 비선대. 오래 전부터 아름다운 풍광에 유람코스가 됐었겠지. 바위에 무수히 새겨진 이름들. 지금으로 치면 왔다간다는 인증 낙서고 분명 자연훼손인데 그리 보기싫진 않다.
과연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을 법한 소. 들여다보면 안쪽은 꽤나 깊다.
아름다운 소, 소들이 이어져 있는 비선대 계곡. 물은 얼마나 예쁘고 바람은 어찌나 시원 청량하던지.
원래는 비선대 지나 금강굴까지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산불예방기간이었나, 금강굴 길은 입산금지. 아쉽게 돌아선다.
등산로가 이렇게 잘 정비돼있다. 내려가는 길에 아쉬워 뒤돌아 또 한 컷.
전생에 내가 저 산등성이를 올랐던가? 먼 산등성이를 보는데 왜 그렇게 그리운 마음이지?

 

 

먼저 들리면 힘 빠질까봐 미뤘던 신흥사 구경을 하산길에. 길게 이어진 높은 담장길이 고즈넉하다.
절 앞에 서있던 장한 나무 한 그루. 무슨 나무지? 처음 보는 솔방울 모양에 한 컷.
절마당에서 저렇게 장엄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신흥사는 신라 때부터 있던 절이라니 그 땐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들어왔어야 할 심심산중의 절이었겠지.
석양에 계곡 옆 찻집이 더욱 그림 같네. 코로나때문에 어디건 마스크 벗는 곳은 피하게 돼 차 한잔 마시지를 못했다.
장한 소나무길. 여기 옛날엔 그냥 흙길이었던 것 같은데...

 

전날 설악동 들어오는 길에 본 벚꽃 터널이 계속 눈에 밟혔다. 아직 날 어둡지 않았으니 바다도 좀 보고 들어오는 길에 일부러 차에서 내려 벚꽃구경 삼매경. 나무 밑에 서면 황홀. 휙휙 지나는 차들에 꽃잎들 눈처럼 날리고.

 

 

이틑날. 밤새 살짝 비가 온 모양이다. 비로 대기는 촉촉한데 저기 산 꼭대기엔 눈이 쌓였다.
찻집 앞 벚나무, 오늘도 휘황하구나.
산 입구에서도 이렇게 준엄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다니..
언젠가 토왕성폭포 등산로가 새로 열렸다는 소식 들은 기억이 있다. 비선대는 입구에서 곧장 신흥사쪽으로 올라가지만 토왕성폭포길은 입구에서 왼편으로 들어서야 한다. 다리 위에서 보는 계곡. 살짝 구름 낀 하늘 아래 여기 물빛은 서늘한 옥빛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계곡을 내려가며 길이 이어진다. 이쪽 길은 처음 가보는 것 같애.

길은 한참이나 산책로처럼 평탄히 이어진다. 내 발소리도 시끄러워 잠시 멈춰서면 고요, 조용.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스스스스.. 소리, 비비배배 명랑한 새소리뿐. 그 고요함이 너무 좋아 사람 기척 들릴 때까지 길 가운데 서서 망중한. 새소리 너무 예뻐 한참 녹음해왔는데 와서 들어보니 그 소리가 아닐세.

한참을 산책로 같은 길을 걷다가 드디어 오르막길. 갓 돋는 아기잎들이 싱그럽다.
이 쪽 계곡은 비선대쪽보다 골이 좁고 깊은 느낌. 덜 꾸며져 더 산답다.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여기도 누군가가 참 수고했다 싶던 길. 자연의 맛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오르기 편하게 일일히 돌계단을 만들었다. 쇠난간도 길모양따라 이리저리 구부려놓았으니 그냥 일자로 연결하기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덕분에 산길의 맛이 살았다.
구름이 좀 낀 날씨에다가 골이 좁아 해가 들었다 금방 자취를 감추기 일쑤다. 골짜기에 해가 비치면 온 산이 즐거워 나를 반기는 듯하다가도 해가 사라지면 금방 어둑어둑 교교해진다. 이 길을 혼자 간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어둠 속에 홀로 이 길을 오르기도했을 누군가들이 떠오르네.
헉헉대며 산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니..

아찔한 다리와 바위벽에 붙은 계단들. 그냥 오르기만해도 발바닥이 간질거리는데 이걸 어떻게 설치한 거야? 이 산속까지 자재들은 어떻게 나르고? 편안한 산행을 위해 애썼을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다시 생각했다.

저 위로 토왕성폭포 가는 길이 이어지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체력도 체력이고 신발장에 박아뒀다 오랜만에 꺼내신은 등산화 밑창이 다 부서져 발밑이 불안하다.

육담폭포
오르면서 봤던 계곡, 내려오면서 봐도 또 예뻐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멀리 켄싱턴호텔.
아침에 산을 오를 땐 어둑하던 계곡이 화창하다.
떠나기 아쉬워 뒤돌아 서서 한 컷, 또 한 컷.
호텔에서 짐 챙겨 내려오며 아쉬워서 또 한 컷.

 

송지호 가는 길
어렵게 무거운 엉덩이 들어 떠나본 길, 돌아가는 버스 시간 최대로 늦추고 예전에 좋았던 기억의 송지호 해수욕장을 찾았다. 하지만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에 바닷가 너무 추워 채 10분을 못버티고 여전히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 한 줌 쥐어보는 걸로 끝.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금방 돌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 터미널 근처 영랑호로. 덕분에 멋진 노을 구경했다.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기억이 새롭다.

너무 덥기 전에 다시 한 번 가보자, 못 오른 토왕성폭포까지 가보자 했었는데 한 번 주저앉은 엉덩이는 또 무거워졌다.

인공의 것이라곤, 인공의 소리라곤 하나도 없는 그곳, 모든 것이 다 아름답기만 했던 그곳, 그립네.

온 몸을 옥죄던 족쇄가 다 풀린 듯, 덕지덕지 붙은 오래된 먼지 다 털린 듯 편안하고 시원했었는데.

사람 없을 때 마스크 벗고 들이쉬던 공기는 또 얼마나 달콤하고.

한 10m 전방에 한 팀, 또 한 10m 후방에 한 팀, 이렇게 띄엄띄엄인데도 거의 대부분 마스크들을 꼭꼭 쓰고들 산행을 했다. 얼마나 착한 우리 국민들인지.

가을쯤 다시 거길 가면 그 땐 마스크 벗고 맘껏 그 공기를 마실 수 있으려나?

이상한 시대를 사는 지금, 그런 공간과 시간을 누릴 여유가 잠시라도 내게 주어졌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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