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아틀리에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바다가는길 2022. 5. 25. 15:15

김상욱, 유지원 저 | 민음사 | 2020년 04월 20일

 

 

 

-책소개

물리학자 김상욱, 타이포그래퍼 유지원, 서로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만났다. 김상욱 교수는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이며, 유지원 교수는 물리학회까지 참석하며 과학에 열정을 보이는 디자이너다. 두 저자는 무엇보다도 “관계 맺고 소통하기”를 지향한다. 그 과정에서 관찰과 사색, 수학적 사고와 창작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 본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스러움, 복잡함, 감각, 가치, 상전이, 유머 등 모두 26개의 키워드를 놓고 과학자와 예술가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 낸다. -

 

 

 

 

 

라파엘 로자노해머의 '결정의숲' 전시.
펼쳐진 책에는 영국의 수학자 찰스 베비지가 1837년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거주하는 지구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남기는 영구적인 각인' 중 한 대목이 담겼다..
인간의 말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킨다. 이렇게 발생된 공기의 파동은 전 지구의 육지와 바다를 돌아다닌다. 인간의 말소리가 바꾸는 공기의 움직임을 지구상 대기의 모든 원자가 받아들이는데에 걸리는 시간은 스무 시간이 채 안된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이었다. 지구 위에서 생존해 온 인류의 모든 개체들이 남긴 소리의 숨결은 그렇게 공기 입자의 움직임 속에 영원히 기록된다는 것이다. 찰스 베비지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의 공기 자체가 전 인류의 태곳적 행적부터 기록된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책자 속 논문의 이 내용을 관객은 호흡하고 소화한다.
작가 로자노해머는 책자의 내용을 아주 조그마한 금분 조각에 나노 인쇄했다. 유리병 속 금분 하나 하나가 베비지의 논문을 새긴 '팸플릿'이다. 이 금분 조각은 200만개에 이른다. 작가는 그 중 25만개를 미술관의 공기중에 뿌렸다고 한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이 금분 조각을 관객들이 들이마신다.


작품 '고동치는 밤'에서는 나의 심장박동이 센서를 통해 커다란 방 전체에 빛과 소리로 울린다. 인간은 단지 숨을 쉬고 심장의 고동을 울리는 것 만으로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고 지구 전체의 대기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무관하고 분리된 개체라고만 여겼던 타인들이 새삼 새로운 네트워크 속에서 다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생체에너지의 작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의 모든 호흡 하나, 말 한 마디가 지구의 대기에 영구적인 각인을 축적한다.

 

 

 

 

생의 모든 순간에 충만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유 넘치는 이 원숙함과 화창함을 보면 마음이 인류애와 평온함으로 가득해진다. 나는 이런 인간미에 유머가 깃든다고 느낀다.
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를 갖고 주위를 넓게 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이다. 한 발 물러서면 시야가 넓어진다.그렇게 넓혀놓은 공간에 경직도니 당위를 해체하는 합리적인 정신도 들어서고 근시안적으로 보면 엉뚱해 보일지 모를 해결책을 찾아내는 창의성도 들어선다. 여유는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개인들이 애써 확보해야 할 공간이다. 그 여유 공간 속에서 날 선 감정들은 희석된다. 그리고 그 안에 유머가 채워진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중.

 

 

 

 

예술에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도 있지만, 순수형식주의적이고 작가적인 가치라는 것이 있다. 세상을 보는 확장적인 방식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생생하게 대면하게 해 준다. 인식의 구속과 오류로부터 자유를 탐색하고, 왜곡되었을지 모를 구태의연한 시선에 대해 보다 나은 방식을 제안하려는 질문을 던진다.

 

 

 

 

종이책을 기준으로, 이 바로 앞 문장 끝에 찍힌조그만 마침표 하나의 지름(재어보니 0.416밀리미터다)에 늘어선 탄소 원자만도 200만개에 이른다. 이 마침표와 저 마침표는 똑같아 보이지만, 마침표마다 원자의 수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마침표는 평면 위의 2차원 같지만 종이에도 미세한 두께가 있어 잉크가 스며든 모습을 크게 확대해 보면 실제로는 3차원 입체이다.

 

 

 

"주거 건축의 벽에 붙어 있는 큰 가구들은 대개 직각의 육면체입니다. 그런데 책장에서 의자, 의자에서 주전자, 주전자에서 찻잔 등 벽에서 멀어져 인간에게 다가올수록 점점 둥글어지죠"- '무인양품'의 일본 본사 디자이너가 강연에서 들려준 인상적인 통찰.

 

 

 

'검정'이란 뭘까? 빛(가시광선)이 없는 상태는 '어둠'이다. 한편 어둡지 않은 조건에서, 사물이 함유한 색조가 빛을 모두 흡수하여 '사물로부터 우리 눈에 반사해서 들어오는 빛'이 없는 상태가 '검정'이다. 빛을 100퍼센트 흡수하는 물질이라야  '검정의 이데아'가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지구상 가장 검은 물질인 '벤타블랙'의 빛 흡수율은 최대 99.965퍼센트다.
색은 빛의 물리적 속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눈과 뇌의 수용 및 인지와도 관계된다. 빛이 눈의 망막세포를 자극해서 그 전기 신호가 뇌에 전달되면 우리는 색을 판별한다. 함께 바라보는 저 검정물체에서, 내가 보는 검정과 네가 보는 검정이 같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같은 색도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르게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심지어 색들은 빛의 파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감정과도 반응한다.

우주는 검다. 그 광활함만큼이나 깊고 검은 기운으로 별빛을 압도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을 한데 모아 봐야 우주 전체 부피의 자(秭)분의 1의 공간에 모두 넣을 수 있다. 자는 1뒤에 0이 스물네 개 붙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우주의 공간이 하늘이라면 별은 하늘을 배회하는 갸냘픈 반딧불이만도 못하다. 이처럼 우주는 별빛이 아니라 검은 공간으로 충만하다. 검정은 우주의 색이다.
엄밀히 말해서 검정은 색이 아니다. 색은 빛이 가지는 진동수가 결정한다. 빛은 전자기파, 즉 전자기장의 파동이다. 전자기파가 1초에 450조번 진동하면 붉은 색이 된다. 색을 가지려면 적어도 빛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검정은 빛 자체, 즉 진동할 것조차 없는 것이다. 결국 검정은 색이 아니라 색을 정의할 빛이 없는 상태, 즉 빛의 부재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주에는 우주보다 검은 실체가 있다.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 강하여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천체다. 빛이 나오지 않으니 보일 리 만무하다. 블랙홀이 눈 앞에 있다면 진정 완벽한 검정을 보게 될까? 블랙홀 자체를 이루는 물질은 절대 그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지 않지만, 주위에 있는 물질은 눈에 보일 뿐 아니라 블랙홀이 갖는 엄청난 중력에 끌려 들어가며 짜부러지고 압축되며 빛을 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물을 '강착원반'이라 한다. 강착원반의 온도는 1억도에 달하며 엑스선, 감마선을 포함한 엄청난 에너지의 빛을 뿜어낸다. 이런 상태의 블랙홀을 퀘이사라고 부른다.
블랙홀이 주변의 물질을 다 먹어 치우면 강착원반도 사라진다. 그러면 이제 진정으로 검은 블랙홀을 볼 수 있을까? 스티븐 호킹에 따르면 블랙홀도 온도를 가지며, 온도를 갖는 물체는 빛을 낸다. 이를 흑체복사라 하는데, 흑체란 모든 진동수의 빛을, 즉 모든 종류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다. 그렇다고 블랙홀은 아니다. 빛을 흡수한 물체는 반드시 빛을 내놓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는 특별한 종류의 빛을 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흑체의 예다. 동굴로 들어간 빛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동굴 내부 여기저기를 수없이 반사하며 모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형태를 바꿀 뿐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빛도 에너지를 갖는다. 동굴이 빛을 흡수하기만 한다면 결국 동굴이 가진 에너지가 무한히 커질 것이다. 동굴은 흡수한 빛을 내놓는데 이를 흑체복사라 한다. 흑체복사로 나오는 빛의 색은 물체의 온도가 결정한다. 태양이 흑체복사로 내놓는 빛은 주로 노란색이다. 태양이 노랗게 보이는 이유다.
흑체복사는 블랙홀이 검지 않다고 말해 주는 동시에 완벽한 검은 색을 만들 방법도 알려 준다. 빛이 들어갔을 때, 수없이 많은 반사를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 구조가 있으면 된다. 반사를 할 때 언제나 빛이 조금씩 흡수되기 때문이다. 무수한 반사가 일어나 빛이 모두 흡수되어 버리면 들어간 빛은 사실상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런 물체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빛은 모두 흡수하고 보이지 않는 빛만 흑체복사로 내놓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완벽한 검정의 예가 벤타블랙이다. 여기서 빛은 수직 방향으로 서 있는 나노튜브라는 미세구조물들과 무수히 부딪히며 모조리 흡수된다.
애니쉬 카푸어는 '클라우드 게이트'를 벤타블랙으로 칠했다. 원래 스테인레스강으로 되어 거울과 같이 빛을 반사하던 물체를 빛을 흡수하도록 탈바꿈시킨 것이다. 애니쉬 카푸어는 벤타블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특허권을 구매하여 자기 이외에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종이나 캔버스등의 바닥재에 원하는 색을 내려면 재료를 그 위에 옮기고 잘 붙어 있게 해야 한다.. 그러니 색채의 재료들은 일종의 접착제가 되어야 한다.
색을 내는 아주 미세한 알갱이들이 서로를 붙들려면 색 알갱이를 들러싸서 그들을 연결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을 '미디엄'이라고 한다. 물감마다 색을 내는 재료는 대동소이하나, 이 '미디엄'이 수채화, 유화, 아크릴 등 그 '성질'을 결정한다.
템페라의 단점을 개선하고자 기름을 섞어본 얀 반 에이크는 유화의 길을 열고, 19세기 초반 프랑스 화학자들은 천연색료의 단가를 낮추고 내구력을 높인 합성색료를 개발해 인상주의 화가들이 야외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20세기 중반엔 공업용 합성수지를 미디엄으로 쓴 아크릴 물감이 등장한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와 자연 속 물질과 그 작용의 아름다움을 규명해왔다면, 화학자들은 이를 일상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했다.
화가는 적절한 미디엄이 섞인 색알갱이들을 붓으로 날라 종이나 캔버스에 결합하게끔 해서 작품을 만든다. 공기 속의 성분, 수분, 온도, 햇빛과 바람의 강도...... 이 모든 것이 화학 작용을 한다. 작품들은 이렇게 재료들의 결속으로 특정 환경 속에서 탄생한다. 그렇게 결합된 생을 힘껏 버텨 내며 다가와, 마주 보는 우리에게 감정의 작용을 일으킨다.

 

안료의 색을 내기 위해 무수한 물질이 사용되었다. 붉은 색은 연지벌레, 노란 색은 치자나무, 보라색은 조개.. 고대 로마 시대 '티리언 퍼플'이라 불린 보라색은 '무렉스 브란다리스'와 '푸르푸라 하이마스토마'라는 조개의 체액에서 얻을 수 있었다. 조개 수천 개에서 겨우 1그램을 얻을 수 있었기에 엄청나게 귀해 당시 보라색은 황제만이 쓸 수 있었다.
1856년 영국의 생화학자 윌리엄 퍼킨은 석탄에서 나온 콜타르에서 추출한 물질로 '아닐린 '퍼플'이라는 보라색 안료를 만들어 대유행을 시킨다.
석탄에서 나온 물질이 어떻게 조개에서 나온 체액과 같을 수 있을까.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우주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면, 그 재료는 원자다. 석탄도 원자로 되어 있고 조개도 원자로 되어 있다. 석탄을 이루는 탄소와 조개를 이루는 탄소는 완전히 똑같다.
빅뱅으로 우주에 생긴 원자는 수소와 헬륨이다. 이들이 핵융합으로 합쳐지면서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들이다. 이 다섯 원자가 태양계 원자의 99.95퍼센트를 이룬다. 지구상 생명체의 경우 몸의 99퍼센트는 탄소, 질소, 산소, 수소로 되어 있다. 결국 생명의 원자는 우주에서 흔한 것들로 되어 있다. 아이들이 주변의 아무것이나 집어다가 아무 데나 그림을 그리듯이, 지구상의 생명도 그냥 주변의 아무 것이나 집어다가 조립하여 만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갖 종류의 것들이 보이지만 이들은 잘해야 10여종의 원자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되지만, 인간과 흙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원자 수준에서 보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다양한 것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도가 달라지면 열의 양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온도는 속도와 관계가 있다. 분자의 움직임이 빠르고 활발해진다. 분자들의 배열과 거리가 달라지면서, 어느 순간 얼음이 물이 되듯,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들은 그대로지만, 상태가 달라져서 성질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현상을 '상전이(phase transition)'라고 한다.
나아가 온도와 분자들의 속도라는 물리량의 변화는 우리의 정서와 기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17-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곡을 쓸 때 감정을 먼저 설정한 후에 그 감정을 속도에 실었다. '알레그로'는 본래 '유쾌하게'나 '밝게'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의 일상용어다. 이 '감정 표시'가 빠른 속도에 실리며 지금은 '템포 표시'가 된 것이다. 속도는 단순한 시간 차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속도의 국면이 달라짐에 따라 특정 속도만의 감흥을 가진다.
이런 양상은 폰트에서도 나타난다. 글자 무게에 따라 웨이트별로 고유한 성격이 달라진다. 폰트는 2차원 평면조형이지만, '웨이트'라는 용어를 쓴다. 즉 획의 두께 아닌 글자의 무게로 구분한다.
폰트는 주로 라이트, 레귤러, 볼드 등 세 가지 웨이트로 구성된다. 폰트가 모여 가족을 구성한 것을 'typeface'라고 부른다.
볼드는 라이트에 비해 단순히 굵어지거나 무거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트는 라이트다운 고유한 특성이 있고, 볼드에는 볼드만의 특성이 있다. 볼드보다 무거워지면, 폰트의 성격에 따라 'heavy', 'black', 'fat'등으로 간다.

 

 


디자인은 기계의 복제를 통해 대량생산을 하는 조형예술 분야다. 따라서 산업혁명 시대 이후 세계사에 전면 등장한 디자인의 역사는 곧 기계 발달사에 응답해 온 아름다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뭔가 재미난 것을 읽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책이 없는 때가 있다.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서 신간코너를, 아무도 건드리지않은 싱싱한 수백권의 책을 둘러보아도 아무 것에도 손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이 수백 권의 책 중 어떻게 읽고 싶은 게 하나도 없지? 오히려 어이가 없어진다.

뭔가 하나 챙겨가긴 해야하는데...

그럴 땐 그냥 느낌에 몸을 맡기고 발길 가는 대로 아무 쪽 서가에나 들어선다.

그리고 제목을 훑는다. 내 눈이 알아서 뭔가를 찾아내길, 어떤 책이든 나를 끌어들이길.. 하며.

이 책은 그렇게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다.

무심히 서가를 훑다 '뉴턴의 아틀리에'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뉴턴과 아틀리에?

책을 뽑아보니, 저자가 방송으로 이미 익숙해진 김상욱 교수와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타이포그래퍼다. 괜찮겠는데?

책은 키워드를 정하고 각자 그 키워드를 주제로 한 편씩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이다.

글쎄, 사전에 서로 이야기의 방향을 정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다르면서도 묘하게 이야기들이 연결되고 얽힌다.

아마 다시 한 번 읽으면 또 다른 내용에 맘이 꽃힐지도 모르겠는데, 책을 읽으며 가장 아하! 싶었던 건 검정.

전에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를 보면서, 고작 한 1,2M정도 깊이의 공간이 거의 무한처럼 느껴지는 완벽한 어둠을 표현하는 걸 보면서 도대체 무슨 안료를 쓴 걸지가 그렇지않아도 너무 궁금했었는데 책을 보니 그 비밀은 벤타블랙. 빛의 99.965%를 흡수한단다. 아니쉬 카푸어는 이 안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독점권을 사들여 다른 누구도 사용할 수 없게 했다니 그런 게 가능한가 싶기도 했고.

세상의 온 별을 다 모아도 우주 공간의 자분의 일을 차지할 뿐이라고.

무릇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에는 수천억개의 별이 존재하고 또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가 수천 억개가 있다는데, 그 별을 다 모아도 우주의 자분의 일일 뿐이라고?

무한하고 무한하고 무한한 우주라는 공간을 다시 상상하며 놀라고, 그런 공간을 인식하고 탐구하는 인간에 또 새삼 놀라고.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무한한 우주에 무한히 다양한 존재들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두가 원자 단위에서는 몇 개의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별다르지 않은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

색료는 같되 그 매개제에 따라 그렇게 다양한 안료들이 되는 것 하며, 빠르기를 나타내는 악상기호가 사실은 원래 정서의 표현이었다는 얘기..

하나의 글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재미있었고, 점, 2차원의 공간에 찍혔있지만 아무리 얇은 종이도 부피를 가지므로 원자 단위로 보면 점도 3차원 입체라는 것도 참 새로운 관점이었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실질적인 1,2차원은 존재할 수 없네, 하는 생각도 들고.

공기를 흔든 소리의 진동이 무한히 우주로 퍼져나가는 것과, 그 개념을 표현한 전시가 있었다는 것.

알아도 쓸데없는 이런 것들이 왜 이리 흥미로울까, 알아야 될 것들은 그렇게 지루한데 말야, 하는 생각을 되뇌이며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김상욱 교수, 유지원 타이포 그래퍼 두 분 다 세상이 궁금하고 흥미로워 어쩔 줄 모르겠는 초롱초롱한 마음들이 느껴지는 이야기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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