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일기

바다가는길 2022. 6. 9. 17:48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김탁환 저 | 해냄 | 2022년 04월 25일

 

 

 

 

-책소개

 

초보 농부이자 초보 마을소설가 김탁환이
글과 생명이 태어나는 곳, 섬진강 옆 집필실에서
느리지만 성실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하루하루-

 

 

친지의 추천으로 우연히 들러 먹은 맛있는 밥 한 끼에 반해 미실란과 그를 만든 사람을 추적하던 그가 그들에 반해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실란의 2층에 아예 집필실을 마련하고 깃들어 살기 시작한다.
1층엔 미실란의 철학을 펼칠 생태책방도 열고.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의 그 삶의 기록.
거기서 만나는 하루 하루의 소소한 일상들을 적었다.
알고보니 농민신문에 연재됐던 칼럼들을 모은 글들이네. 글들이 쉽고 편하다.
소설을 집필 중인 모양인데, 그 진행 상황이 그닥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랫녘 그곳에서 펼쳐지고있는 아름다움들을 알게 되어 좋았다.
가령, 구례엔 일반인이 가꿔 개방한 '천 개의 향나무 숲'이 있고, 한 번 가보고 싶었고, 구례의 쌀빵 전문 빵집 이름은 '느긋한 쌀빵, 느긋한 점빵', 이름에서부터 벌써 여유가 느껴져 좋았고.
광주의 한 초등학교엔 생태동아리가 있어 미실란으로 강의를 들으러 오고,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농사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학교에서 고무 양동이에 직접 쌀을 키워 수확하기도 하고, 비 몹시 오던 날, 양동이 속 새우랑 우렁이가 넘치는 물에 양동이 밖으로 떨어질까 어떤 아이는 자기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 양동이에 우산을 씌우며 지키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키우는 벼 이름, 홍진주, 녹미, 서시1호, 세종 찰벼, 평안도 용천, 벼들이 이런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구나 알고.
이 이쁜 아이들이 자라 누구는 훌륭한 전문 농업인이 되고, 누구는 생태학자가 되고, 누구는 환경전문가가 되어 세상을 지킬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릴 적 그 경험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기쁜 경험이 되어줄지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너무 기특했었고..
학교에 학원에 과외에, 또 돈이건 권력이건을 최대한 이용해서라도 스펙을 쌓으려 애쓰는 요즘 세태에 곡성으로 농촌유학을 온 아이들은 한 번 집 밖에 나가면 신나게 노느라 집에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는 얘기, 그런 건강한 삶을 아이들에게 주는 정말 훌륭한 부모들에 감탄하고, 그런 부모들이 있음에 안도하고...

진주 '진주문고', 괴산 '숲속 작은 책방'', 순천 '서성이다' ,광주 '숨'', 제주 '디어마이블루', 통영 '봄날의 책방', 전주 '잘 익은 언어들'..
이렇게 이쁜 이름의 작은 서점들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되고..

빽빽한 건물 숲, 빽빽한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남기 위해 전쟁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는 여기와 달리 사방에 펼쳐진 논, 들, 하늘, 강, 자연을 마주하며 자기 기준을 갖고 자기 중심을 잡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가, 그런 사람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다.

 

책 중간 중간의 삽화가 참 예뻤다.
단정하고 소소하며 다정한 그림들.
베짱이 도서관 박소영 관장님이 그린 그림.

 

-그 해에 그 철에 그날에 맞는 마음을 살피는 일이 귀하다. 세상의 기미와 함께 내가 끌리는 대상에게 어린아이처럼 다가가는 마음,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마음..-


서문에 적힌 이 구절에 벌써 부러운 마음이 들던 책.

 

 


내가 좋아하고 알고 싶은 세계로 삶을 옮긴 것이다..

 

엄마가 전화하셨다.
"저 멀리 진해 바다가 유난히 반짝거리는구나. 저렇게 빛나는 걸 뭘라고 한댔지?"
'윤슬입니다.'

 

자연이 수천, 수만 년 동안 만들어놓은 생태계를 인간은 불과 몇 달 혹은 몇 년만에 부수고 지운다.
갖가지 명분을 대지만 새만금갯벌의 소멸과 맞바꿀 명분이 무엇일까.

 

상상을 현실로 옮겨보려고 힘 모아 덤벼드는 나날만큼 근사한 때가 있을까.

 

적어도 일주일 에 한 번은 로드킬을 당한 동물 사체를 만난다. 고라니, 고양이, 개, 뱀, 개구리, 참새, 꿩, 두꺼비, 까치, 제비.. 직접성의 충격은 매우 강력하다.

 

저녁에 연잎밥을 만들었다. 둠벙에서 연잎 열 장을 거두고, 텃밭에서 가지와 토마토와 바질을 땄다. 전기밥솥에 발아오색미를 안친 다음 연잎과 가지들을 깨끗이 씻었다. 가지에 칼집을 내어 굽고 마른 대추를 돌려 깎았다. 밤도 깎았다. 밥이 되자 연잎을 펴고 밥 한 공기를 가운데 넣었다. 그 위에 밤과 대추와 잣과 해바라기씨를 얹고, 연잎을 네모로 접어 싼 뒤 쪘다. 어두운 앞마당을 다섯 바퀴 돌고 와선 연잎을 펴고 가지구이를 곁들여 먹었다.

 

다음엔 셋이서 구례구역을 출발해서 하동 화개장터까지 걷기로 했다. 강을 따라 걸을 길이 있고, 걷자고 약속할 벗이 있으니 좋다.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며


농부과학자 이동현과 마을소설가 김탁환은 202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50회가 넘는 강연을 했다. 김탁환이 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이 계기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며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006년 5월, 남근숙 이동현 부부가 전라남도 곡성군 섬진강로 2584에 세운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은 지방 소멸, 농촌 소멸, 벼농사 소멸, 공동체 소멸에 맞서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위기도 닥쳤지만 버티며 살아남았다.
강연을 오가는 길 위에서 이동현과 김탁환은 인생의 꿈을 각자 그렸다가 찢고 또 그렸다. 그림이 점점 닮아갔다. 생태책방은 그 꿈의 첫 결실이다.
책방의 핵심 주제를 '생태'로 정했다. 21세기에 대두된 기후위기와 전염병은 지구 전체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인류에게 있다. 세상엔 좋은 책이 많겠지만, 생태와 이어진 책들을 우선 골라 갖췄다. 정치, 과학, 역사, 문학 등이 서로 곁을 내주며 놓였다. 지금까지의 상식이나 분류법이나 속력에 의존하지 않고, 섬진강 들녘에서 대대로 살아온 농부와 동식물의 몸짓에 어울리는 책을 모았다.
생태책방의 이름은 '들녘의 마음'이다. 들녘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러 책방으로 들어오는 당신과 책방을 나가 느릿느릿 들녘을 걸으며 책을 읽는 당신! 들녘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간 온갖 생물들을, 책과 함께 떠올려주었으면 좋겠다. 흙의 마음과 강의 마음과 산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겼다. 책을 읽는 마음과 농사를 짓는 마음이 이토록 가까우니, 서로의 입김이 닿아 섬진강 물안개를 만들고도 남겠다.
책방 문을 밀고 들어가 스스로 고른 책을 사서 품에 안고 나왔던 날을 기억하는가. 섬진강 들녘에서도 그 기뿜을 선물하기 위해, 작은 책방 하나를 오늘 가만히 연다.


2021 12월 18일, 김탁환과 이동현이 함께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