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기억함

실상사, 뱀사골, 함양상림

바다가는길 2024. 6. 8. 17:59

--실상사의 역사 개관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826년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실상사는 규모가 작아 금방 다 볼거에요... 가이드가 계속 얘기하던 대로, 워낙 시간이 없기도 해 휘리릭 한 바퀴 돌고 말았지만, 돌아와 검색해보니 의외로 홈페이지가 너무 알차게 꾸며져있어 뒤늦게 실상사에 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규모도 작고 전들도 낡아(보광전을 비롯해 지금 중창불사 중인가 보더라. 그런데 중건시 36채나 됐다는 전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유명한 이름에 비해 쇠락해있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그건 겉모습일 뿐, 구산선문의 최초 사찰답게 선풍을 잃지않고 스님들의 교육기관, 대중을 위한 학교, 친환경 농장, 지역주민을 위한 공동체 사업, 템플스테이등 내실있는 사업들을 이어가고 있다. 곳곳에 불전함이 놓여있던 여느 절과 달리 꾸밈없고 소박하던 모습. 

홈페이지에서 보니 도법스님이 회주스님이시네.

오며 가시는 스님들 얼굴이 참 맑아 역시 선풍이 살아있는 모양이다 생각했었다.

 

절 입구에 펼쳐진 연지와 갓 심은 모들이 신통한 논. 평화롭고 다정한 모습. 연꽃 필때쯤,  벼가 자라  초록이 한창일 때 더 이쁘겠다.

1996-2005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들을 모아 탑을 쌓았다.

실상사의 역사를 보니 개창된 이래 여러번 화재로, 전쟁으로 무너지고 재건되길 반복했던데, 천년에 이르는 기간, 각기 다른 시대의 절의 기와 하나라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탑을 쌓았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보광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불교신자가 아닌 나에게 절은 그저 관광지라 보광전도 들어가보지도 않고 문 안으로 기웃, 불상과 일본지도가 그려져있다는 종을 보고 댓돌 위에 섰는데, 어디서 풍경소리가 댕그랑, 처마를 올려다보니 금빛 물고기 풍경이 양쪽에서, 오른쪽에서 댕그랑 하면 또 왼쪽에서 댕그랑.. 단청이 없는 정갈한 처마며 그 뒤 녹음 우거진 나무 바라보고 있자면 왼쪽에서 댕그랑, 맑은 소리, 화답하듯이 오른 쪽에서 또 댕그랑.. 저 멀리 어디선가 뻐꾸기는 뻐꾹뻐꾹, 아름다운 풍경소리 들으며 살풋 부는 바람 맞으며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있는 그 시간,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지어지던 시간.

 

 

뱀사골.

 

뱀사골을 갔다왔다 말해도 될까? 계곡 내려가 물소리들으며 멍때리며, 놀멘놀멘 가느라 요룡대까지도 못갔는데? 40분 코스라고? 난 한 시간 반을 갔어도 거길 못갔는데..

뱀사골은 입구에서 한 30분 거리까지 무장애길이라고 장애인도 휠체어로 갈 수 있는 데크길이 조성돼있어 편히 길을 걸을 수 있다. 비록 발치께까지밖에 못갔지만 녹음이 천정을 이룬 숲을 물소리 곁에 두고 걷는 길은 너무 좋았다.

계곡 물 맑게 남아있어 너무 다행. 

그런데 벌써 너무 더워.

 

 

 

 

 

강을 따라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숲이 이어져있고, 숲 안에 여러 산책길, 강둑위로도 산책로, 지압보도, 함양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단다, 그래서 항일 유적비들이 세워져있고.. 숲 밖으론 마치 연꽃 연구소같이 각종류의 연꽃 표지판이 꽂힌 너른 연지들, 한쪽으론 또다른 각종의 꽃이 만발한 정원, 곳곳에 벤치가 놓인 잔디밭, 또 한쪽으로 인공폭포, 야외음악당,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롤러를 타고 농구를 하고..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잘 정돈된 여유가 넘치는 공원. 모두 모두 즐거운 사람들. 

아직은 때가 일러 연꽃은 거의 피어있지않다. 연지들이 각종의 연꽃으로 덮히면 너무 예쁘겠더라. 

해바라기도 쨍쨍.

 

그리고 돌아오는 길의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