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은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
아, 이 이쁜 녀석, 앙증맞은 녀석, 안쓰러운 녀석.
뒷통수 잡고 한바탕 볼이라도 한 번 부벼주고 싶다.
길
바위 위에 팥배나무 하얀 꽃잎들이 앉아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 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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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 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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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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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배를 매다
마당에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 별
연필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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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가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하늘이라고나 해야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라고나 해야하겠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가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이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하늘이라고나 해야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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