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 세계사시인선 104 |
무슨 말을 할까.
가만히, 천천히, 그의 시를 읽는 수 밖에...
새벽
오경의 하늘 속에서 산이
천천히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닭이 울었다
닭울음은 마을 너머 동트는 곳보다 먼
곳에서 들려왔다
나의 호흡
나의 생명은
내 곁에 있다
그러나 산은 산너머에서 오고
나도 나 너머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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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달의 여인숙이다
바람의 본가이다
거기 들르면 달보다 작은
동자 스님이
차를 끓여 내놓는다
허공을 걸어서 오지 않은 사람은
이 암자에 신발을 벗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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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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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에 닿아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 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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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스칠 때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산 안개가 나무를 밟고 계곡을 밟고 나를 밟아
가이 없는 그 발길로 내 가슴을 스칠 때
당신의 시는 이끼처럼
내 눈동자를 닦았습니다
오래 된 기와지붕에 닿은 하늘빛처럼
우물 속에 깃들인 깊은 소리처럼
저녁 들을 밟고 내려오는 산그림자의 무량한 봄빛
당신 앞에 나의 시간은 신비였습니다
돌담 샘물에 떨어진 배꽃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새벽 산에서 옷을 벗는 새벽빛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길을 이렇게 오십니다
산사로 향한 따뜻한 길처럼
하늘에 새 날려보내고 서 있는 나무처럼
내 앞에 당신은 그렇게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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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아나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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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 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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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 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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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좌선하던
한 사람이 풀잎 끝으로 걸어나가
나비가 되었다
하늘 속으로 나비가
날아가던 밤
해당화 꽃 위로 지구가
달보다 더 조용히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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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설악
달 하나가 마음의 고랑으로 내려간다
산을 들으러 가는
느릿느릿한 걸음이
시처럼 아름답다
억새풀과 쑥대로 덮인 새와 구름의 집, 영시암
골짜기가 다 들어가 자는 물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스런 얼굴로
노승이 문 열고 나와
하늘 쪽을 살피다가 들어간다
노루나 산양 새끼의 눈빛도
떨어져 꽃이 되는 밤
가랑잎 하나가 산을 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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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가는 길
길 따라 굽이 흐르는 물 백 개의 연못에 백 번 얼굴을 비추고 백 번 마음을 고쳐야 열리는 산문, 귓가에 넘치는 물소리가 모두 법문이고 가지의 바람소리가 오도송이며 우거진 쑥대풀과 억새꽃이 다 시다
골짜기로 밤에 쏟아지는 별들이 물 속에 빠져 꽃잎처럼 떠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는 이가 영원히 거기서 길을 잃고 나오기 싫어한다
단풍사이로 난 좁다란 길에 노랗고 빨간 잎사귀가 떨어지고 그 곁에 찍힌 사람 발자국이 깨끗하다, 고라니 발자국 같아서 먼저 간 사슴 발자국 같아서 일찍 깬 새벽공기가 입을 대고 냄새 맡고 바람이 와서 손으로 만져 본다. 사람 자취가 여기서 처음 신성하다
산 전체가 구름 옷을 벗고 있다. 산이 깨어나는 소리 듣는다. 산이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사이 빗물 머금은 산빛과 산 내음이 물소리에 실려 세상 아래로 떠간다. 구름이 산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길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내가 있다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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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을 가며
수렴동 대피소 구석에 꼬부려 잠을 자다가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아무 것도 덮지 않았구나
걷어 찬 홑이불처럼 물소리가 발치에 널려있다
그걸 끌어당겨 덮고 더 자다가 선 잠에 일어난다
먼저 깬 산봉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겨서
옷자락 하얀 안개가 나무 사이로 달아난다
그 모습이 꼭 가사자락 날리며
부지런히 산길을 가는 스님 같다
흔적없는 삶은 저렇게 소리가 없다
산봉들은 일찍 하늘로 올라가 대화를 나누고
아직 거기 오르지 못한 길 따라 내 발이 든다
길 옆 얼굴 작은 풀꽃에 붙었던 이슬들
내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물소리가 갑자기 귓 속으로 길을 내어 들어오고
하늘에 매달렸던 산들이
내 눈 안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오르지 못한 길 하나가 나를 품고 산으로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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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시
구름은 허공이 집이지만 허공엔 그의 집이 없고
나무는 구름이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다
바람에 쓸리지만 구름은 바람을 사랑하고
하늘에 살면서도 마을 샛강에 얼굴 묻고 웃는다
구름은 그의 말을 종이에 쓰지 않는다
꺾여 흔들리는 갈대 잎새에 볼 대어 눈물 짓고
낙엽 진 가지 뒤에 기도하듯 산책하지만
그이 유일한 말은 침묵
몸짓은 비어 있음
비어서 그는 그리운 사람에게 간다
신성한 강에 쓰고 나비 등에 쓰고
아침 들꽃의 이마에 말을 새긴다
구름이 밟을수록 땅은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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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꽃
밤하늘은 온통 전쟁중이다
그 아래 피난처 같은
강원도 정선의 너와집 같은......
들어가 일박하고 죽어버리고 싶은
쇠잔한 내 몸을 꽃잎이 잘 싸 오므렸다가 달빛 아래서만 혼자 활짝 펴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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