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장석남 시

바다가는길 2006. 1. 31. 20:35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창비시선 204 

 

 

아, 이 이쁜 녀석, 앙증맞은 녀석, 안쓰러운 녀석.

뒷통수 잡고 한바탕 볼이라도 한 번 부벼주고 싶다.

 

 

 

 

 

 

바위 위에 팥배나무 하얀 꽃잎들이 앉아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 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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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 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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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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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배를 매다

 

 

마당에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 별

연필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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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가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하늘이라고나 해야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라고나 해야하겠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가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이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하늘이라고나 해야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