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유하 열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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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내공과 검법을 논하던 그가 아니고, 도시의 뒷골목을 재기발랄하게 휘젓던 그가 아니고,
그래, 이건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이어져 나온 길.
이 사람은 나이가 몇인가? 청춘의 해가 지고, 막 산그늘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어스름 속에서 지나 온 길을 보는 자의
시선.
길을 지나 온 사람답게 그만한 통찰, 나도 알고있는, 혹은 나는 영 모르겠는...
바람에게 경배하라
바람이 분다
땅 위에 선 자들아
오월 강가에 선
이 저녁의 그리움들아
바람에게 경배하라
장미는 향기를 타고
장미에게로 가고
나무는 씨앗을 타고 나무에게 간다
저 바람 속으로
은빛 실을 풀어놓는 거미들
거미는 그 허공의 비단길을 걸어서
그리운 거미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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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
빗방울, 툭
나무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숲의 노래를 듣는다
바람이 숲의 울대를 간지럽히며 지나는 순간
나뭇잎이 후두둑 소리를 낸다
나뭇잎이 소리를 내기 전까지
빗방울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몰랐다
숲이 온 몸으로 운다
숲의 육체가 없었다면 나는
바람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으리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 하나
텅 빈 강당처럼 나를 울린다
비바람 불어와
나의 내부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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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서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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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낳는 새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가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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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달팽이의 사랑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 먼 사랑에 당도하지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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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비바람 몰아치고
들판의 느티나무, 뇌우 속에서
낮은 소리로 혼자 울고 있다
그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나
비를 긋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지금 벼락을 맞고 싶은 것이다
온 머리채를 흔들며
낙뢰를 부르는 느티나무
수십 만 볼트의 전류가 언제
내 몸을 뚫고 갔는 지 나는 모른다
시의 유배지여, 기억하는가
난 벼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찰나의 낙뢰 속에서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는
나여, 그 섬광의 희열 밖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바람 불고, 느티나무 아래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내 전 생애가 운다, 벼락이여 오라
한 순간 그대가 보여주는 섬광의 길을 따라
나 또 한 번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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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킬 수 없는 노래
시크리드라는 이름이 물고기는
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
새끼들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자신의 입을 택한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미소처럼 머금은
시크리드 물고기
사람들아, 응시하라
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는 이들이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
이슬을 머금은 풀잎
봄비를 머금은 나무
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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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의 선택
한 때 인간들과 함께 지상을 거닐며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던 돌고래들,
어느 날 그들은 육지에서의 삶을 놔둔 채
다시 바다로 되돌아갔다
언젠가 하늘을 날아가는 물떼새를 바라보다
땅을 딛고 있는 내 두 발이 슬퍼진 적이 있다
날지 못하는 포유류의 슬픔에게
물어보라, 돌고래들의 선택은 최선이었다
그들은 날개없이 날 수 있는 세상으로 가기 위해
돌 같은 단호함으로 이 땅을 버린 것이다
바다에는 돌고래들의 푸른 언어가 있다
돌고래들은 미세한 물결의 파장을 일으켜
편지를 쓴다, 바다의 정어리떼만큼
풍부한 뉘앙스의 물결언어를 갖기 위해
날개없이 날 수 있는 세상과
펜의 언어 밖에서 씌여지는 시,
나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슈퍼마켓에 간다
그 곳엔 죽은 정어리떼의 통조림들이 진열돼 있다
돌고래는 그 서글서글한 눈으로 내게 속삭인다
도구를 가진 자들의 무덤이 그 안에 있다고
조련사는 언제나 자기 손의 높이 만큼 뛰어오르는
돌고래의 묘기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돌고래는 이미 수만 년 전에
집과 옷과 먹이와 상상력의 슈퍼마켓인
바다의 행복에 대해 깊이 사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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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빈자리
미류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류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 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 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류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 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 낮을 이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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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 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쓸쓸한 행복과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오직 자기 내부로의 산책으로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 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 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 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 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 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로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 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의 흐름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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