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연

바다가는길 2006. 2. 17. 01:51

그 옛날, 여자가 자기만의 삶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시절, 모든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며 불꽃처럼 살았던 이들이 있다.
나혜석이 그렇고, 전혜린이 그렇고, 한국, 아니 조선 최초의 민간여류비행사였던 영화의 주인공 박경원이 그렇다.
1901년생. 지금도 여자가 조종사가 된다는 것은 쉽지않은, 평범치 않은 일인데, 거의 100년 전 그때 비행기 조종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기어이 그 꿈을 이뤄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친일혐의가 있다고 하고, 아마도 그것이 사실인가 보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삶에 열정적이고 충실했단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에서 조선으로의 횡단비행 도중 비행기 사고로 33살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보통사람이 80년 동안 사는 삶의 질량을 그녀는 33년 동안 다, 아니 더 많이 살아냈다는 생각.
영화는 상영시간이 2시간이 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새가 없었다.
굳이 강박적으로 일제시대의 시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려 애쓰지 않고 한 여자의 꿈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모처럼 과장없는 이야기전개와 영상에 그 여자의 삶을 따라 몰두했던 시간...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날아올라 푸른 창공과 빛나는 태양을 대면하던 그 절정의, 일순 정적의 장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박경원(1901∼1933).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다. 1917년 신명여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기예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에는 동경 가마다자동차학교를, 이듬해에는 가마다비행학교를 졸업해 3등비행사자격증을 받아 조선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이름을 올렸다. 1928년 동경 요요기연병장 고도경기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하며 2등비행사자격증을 취득한 그녀는 1933년 만주국 방문비행 중 고국인 조선을 경유할 계획이었으나, 시즈오카현 겐가쿠산 근처에서 짙은 안개로 인해 푸른 제비라는 이름의 애기(愛機) ‘청연(靑燕)’과 더불어 추락사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박경원은 1916년 장로교계 신명여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녀가 입학한 학기부터 신명여학교는 무료 교육에서 월사금을 내야하는 학교로 바뀌어 부득이하게 중퇴를 하게 되었다.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는 게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박경원도 이 대열에 동참했는데, 그녀가 바라는 바는 돈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픈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경원은 첫 번째 유학 생활을 요코하마 기예학교에서 마치고 귀국한 후 대구 자혜의원 간호과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 당시만 해도 그녀의 장래 희망은 간호사였다. 그러나 1922년 12월10일, 용산 연병장에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조선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시범비행을 본 후 그녀의 꿈은 비행사로 바뀌게 된다. 하늘을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1924년 12월 두 번째 일본 유학에 나선 박경원은 당시 비행사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던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을 위해 가마다자동차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비행사가 되기 위한 그녀의 유학을 완강하게 반대한 부모로부터 학비 조달이 끊어져 박경원의 일본 생활은 궁핍하게 전락했다. 그러나 힘든 생활고도 그녀가 갈망하는 비상(飛上)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자동차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가마다비행학교에 입학한 박경원. 당시 비행학교의 입학생 중 여자는 3명이었는데, 그 중 2명이 한국인으로 박경원과 이정희였다. 그러나 이정희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고, 때문에 박경원에게 쏠리는 세간의 이목과 화제는 더욱 커져갔다. 1926년 12월28일, 마침내 박경원은 가마다비행학교 졸업과 동시에 3등비행사자격증을 얻는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에 대한 논란에서 박경원보다 1년 9개월 정도 앞서 중국 운남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자 장교로 임관했던 권기옥을 내세우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권기옥은 중국 군인의 신분으로 훈련 과정 중 하나인 비행과목을 마친 것이기에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보다는 한국인 최초의 공군 여장교로 기록되는 것이 더 올바르다 하겠다.

3등비행사자격증을 받고 1년 6개월이 지난 후 2등비행사자격을 추가로 취득한 박경원은 자신의 공식적인 장거리 비행에 나서게 된다. ‘일·만(日滿) 친선 황군(皇軍) 위문 일반 연락 비행’이라 정해진 이 비행은 일제에 의한 정치적 선동 행사의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명칭부터가 제국비행협회에서 지어낸 것으로 비행의 후원도 조선총독부와 관동군, 협화회 등이 맡았다. 박경원의 당초 비행 계획은 태평양 횡단이었지만, 당시 일본의 기술로는 태평양을 횡단할 만한 항속거리와 속력을 지닌 비행기를 생산할 수 없었고, 박경원 역시 태평양 횡단을 위한 높은 수준의 비행술을 아직 겸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구미비행에 대한 전초전 성격으로 일만비행을 선택한 박경원은 비행사자격 취득 후 고향 비행에 나서는 당시 비행사들의 관례에 따라 만주국으로 가기 전 고국인 조선 경유를 일정에 추가하게 된다.

1933년 8월7일, 여의도가 바라보이는 한강 둔치는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조종하는 비행기 청연을 보기 위한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하지만 박경원은 청연을 이륙시킨 하코네 비행장에서 오른손에 일장기를 든 채 기념 촬영에 임했고, 청연의 기체에는 제국비행협회, 육군대신, 척무대신, 체신대신, 동경 시장 등 일본의 거물급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가 가득 실려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했다.

오전 10시35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박경원은 하꼬네 상공을 통과한 11시경 이후부터 종적이 묘연해진다.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모는 비행기와 그녀의 모습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쉬움을 남기며 하나 둘 씩 자리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경성에는 충격적인 비보 한 통이 전해진다. 박경원이 일본 현악산에 추락했으며, 그녀의 시신과 함께 두 동강난 청연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추락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된 박경원의 손목시계는 1933년 8월7일 오전 11시25분에 정지되어 있었고 그녀의 인생도 서른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서 영원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박경원의 장례는 제국비행협회 비행관에서 일본비행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박경원은 ‘하코네의 여신’으로 칭송되었고, 그녀가 추락한 곳에는 ‘1933년 박경원 양 조난위비’라는 비석까지 세워졌다. 또 일본비행학교 출판부에 의해 <故 2등 비행기 조종사 박경원 양 추모록>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문화정치를 통해 식민지 융화를 꾀하려는 일제의 선전책으로 이용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견지에서 박경원을 친일 인사로 분류하는 견해가 적지 않은 것은 혼자 힘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그녀에게 부유한 일본인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일본 체신대신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인데, 그는 현재 일본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조부이기도 하다.

고이즈미 대신은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 소유였던 비행기 ‘살무손(청연)’을 박경원의 명의로 항공국에 등록시켜주기까지 했고, 박경원은 그와 함께 신사참배를 다녔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일만비행 역시 일제를 위한 선전 비행이었기에 박경원에게 꽂히는 친일행각의 비난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사항이라 하겠다. 그러나 동경 시내를 걷다 ‘조센징’이라는 말만 들어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그녀에 관한 일화는 박경원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사항이라 하겠다.

하지만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박경원의 의지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 그녀의 유고집인 <푸른 하늘 예찬>에서 “새떼는 참으로 자유롭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구나! 자, 친구야 감탄은 그만 하자. 나는 거다, 나는 거야”라고 적을 만큼 비상에 대한 박경원의 열망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파출부, 자동차 정비, 대리 운전 등 육체적으로 고된 잡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하늘을 날기 위한 그녀의 단호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솥뚜껑 같이 큰손에 힘도 남달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박경원은 전형적인 여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165cm·56kg의 신체조건이 말해주듯 100여 년 전의 한국 여성치곤 상당한 거구를 지닌 그녀였다. 당당한 체격 조건에 강인한 체력, 명석한 두뇌, 비행에 대한 강한 집념과 뜨거운 열정까지 겸비한 그녀는 가마다비행학교 재학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뭇 남성들의 청혼도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비행뿐이었다.

20세기 초반 시대와 역사를 앞서 맹렬히 질주한 한국의 신여성들은 여럿 있다. 윤심덕, 최승희, 나혜석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유복한 가정환경 덕에 순조로운 엘리트 교육과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박경원은 명문 가문도 아니고, 부모의 도움을 통해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도 아니다. 자신이 소망하는 꿈의 실현을 위해 고통과 난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간 열정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녀의 꿈은 좁은 땅덩어리가 아닌 끝없이 광활한 하늘에서 펼쳐지는 것이었기에 더욱 찬연히 빛난다 하겠다. 창공을 향해 비상하던 그녀의 애기 청연처럼 말이다.-
www.1983.co.kr에서

 

 

영화볼 때마다 항상 안타까운 거지만 내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왜 스틸로 나오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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