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저 |
실천문학사 |
너
네가 와서 인기척 낼 때
비로서 나는 나인지 몰라
얼음 풀려
네가 물이면
내가 물소리가 된다
다음 날 내가 물이면
네가 물소리가 된다
세월의 퀭한 한 모퉁이 돌아
누구와 옷을 바꿔입고 싶은 날
천 년인들
오직 나만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더냐
가는 데마다
너, 너, 너, 너로 하여 이다지 오래된 나인지 몰라
들길
입은 옷 그대로도 왜 그런지 새롭습니다
사람에게는 10년 20년의 가파른 단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반쯤 혹은 다 물 속에 잠겨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의 울음을 만나러 나섭니다
어찌 그것을 내가 손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난스레 서쪽으로 드넓게 트인 날
아침이슬이 풀 속 깊이 박혀
풀 끝에 맺힌 그것이 스러진 뒤에도
간난아기의 숨은 넋으로 반짝거리며
잘 젖어버리는 들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들길이 이따금 있어야 합니다
늘 하는 일 밖에 모르다가도
수시로 있다가 없어지는 구름 아래
까닭없이 나서는 들길
그러다가 먼 데 가있는 사람이듯
무엇인가 그리워할
들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 오다가다 하늘 속인가 땅 속인가 모르게
누구의 울음소리와 만나야 합니다
문득
아주 옛 시절의 노래로
아주 옛 시절의 이야기로
한 번 돌아가 볼 텐가?
휘영청 달밤이면
그저
달도 밝구나
그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볼 텐가?
문득 혹은 곰곰히 혹은 이따금씩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너무 멀리 떠내려와
여기저기 현란히 허우적거리는 건 아닌지 몰라
나 자신과의 만남
11월 하순의 성깃한 숲
그렇게 잃어버려라
하늘 아래
모든 나머지들 잠재우려고
입 다문 소나무와 잣나무들만
제 바늘 잎새의 푸르름에 묻혀있다
그렇게 잃어버려라
다른 나무들은 다 함께
몇 개의 마른 잎새를 가까스로 달고있다
새가 숨을 곳이 별로 없어서인지
제 터럭 하나를 떨어뜨리며
저쪽으로 날아간다
그 가난의 순간 나는 뜻밖에 해골을 밟았다
어느 노동자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애꾸눈인 그는
벽돌 한 판을 찍어내는데
30분이 걸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인가 다시 찍었다
잠바 입은 사장이 내쫓았다
그는 혼자 벽돌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 벽돌은 잘 팔렸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벽돌 한 장 쌓는데
10분이 걸렸다
쌓은 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
다시 쌓았다
십장이 내쫓았다
쫓겨간 그는
집 한 채를 짓고 죽었다
소원성취
오랫동안 탈나지 않는 집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못을 박았다
박은 뒤
영영 빠져나오지 않도록 또 박았다
장도리가 아주 흥이 났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었다
겨울 폭포
정선 가리왕산 골짜기에 들어왔다
산모퉁이 돌아서 빈 손이었다
깨달음이란 얼마나 뒤늦게 부질없는가
그대로 눈썹처럼 정직하였다
누가 누구에게 줄 거짓조차 없이
하늘은 쩡! 하고 푸르렀고
하늘 아래 온통 눈 쌓여서
산과 산 아래가 서로 의좋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만 돌아서야 하였다
하얀 입김조차 송구스러워
그때였다
저 쪽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놀랐으나
저 쪽의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오래 전의 나였다
더 깊숙히 들어가거라
그래야
네가 만나야 할 폭포가
산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리라
지금은 폭포소리도 없어진 채
네 육친의 얼음덩어리 고드름 덩어리로
잔뜩 기다리고 있는 폭포가 나타나리라
환각인가 나비 한 마리 훨
누군가가 외따로 꿈꾸는 마음 속 폭포소리가
곧 나타나리라
그 일대의 다른 것들도 모두 나타나리라
아직 봄이 아닌데
꽃숭어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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