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고은

바다가는길 2006. 3. 4. 20:38

속삭임 

고은 저 | 실천문학사

 

 

 

 

네가 와서 인기척 낼 때

비로서 나는 나인지 몰라

 

얼음 풀려

네가 물이면

내가 물소리가 된다

다음 날 내가 물이면

네가 물소리가 된다

 

세월의 퀭한 한 모퉁이 돌아

누구와 옷을 바꿔입고 싶은 날

천 년인들

오직 나만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더냐

가는 데마다

너, 너, 너, 너로  하여 이다지 오래된 나인지 몰라

 

 

 

 

들길

 

입은 옷 그대로도 왜 그런지 새롭습니다

사람에게는 10년 20년의 가파른 단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반쯤 혹은 다 물 속에 잠겨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의 울음을 만나러 나섭니다

어찌 그것을 내가 손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난스레 서쪽으로 드넓게 트인 날

아침이슬이 풀 속 깊이 박혀

풀 끝에 맺힌 그것이 스러진 뒤에도

간난아기의 숨은 넋으로 반짝거리며

잘 젖어버리는 들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들길이 이따금 있어야 합니다

늘 하는 일 밖에 모르다가도

수시로 있다가 없어지는 구름 아래

까닭없이 나서는 들길

그러다가 먼 데 가있는 사람이듯

무엇인가 그리워할

들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 오다가다 하늘 속인가 땅 속인가 모르게

누구의 울음소리와 만나야 합니다

 

 

 

 

문득

 

아주 옛 시절의 노래로

아주 옛 시절의 이야기로

한 번 돌아가 볼 텐가?

 

휘영청 달밤이면

그저

 

달도 밝구나

그 시절로

한 번 돌아가 볼 텐가?

 

문득 혹은 곰곰히 혹은 이따금씩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너무 멀리 떠내려와

여기저기 현란히 허우적거리는 건 아닌지 몰라

 

 

 

 

나 자신과의 만남

 

11월 하순의 성깃한 숲

그렇게 잃어버려라

하늘 아래

모든 나머지들 잠재우려고

입 다문 소나무와 잣나무들만

제 바늘 잎새의 푸르름에 묻혀있다

그렇게 잃어버려라

다른 나무들은 다 함께

몇 개의 마른 잎새를 가까스로 달고있다

새가 숨을 곳이 별로 없어서인지

제 터럭 하나를 떨어뜨리며

저쪽으로 날아간다

그 가난의 순간 나는 뜻밖에 해골을 밟았다

 

 

 

 

어느 노동자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애꾸눈인 그는

벽돌 한 판을 찍어내는데

30분이 걸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인가 다시 찍었다

잠바 입은 사장이 내쫓았다

그는 혼자 벽돌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 벽돌은 잘 팔렸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벽돌 한 장 쌓는데

10분이 걸렸다

쌓은 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

다시 쌓았다

십장이 내쫓았다

쫓겨간 그는

집 한 채를 짓고 죽었다

소원성취

오랫동안 탈나지 않는 집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못을 박았다

박은 뒤

영영 빠져나오지 않도록 또 박았다

장도리가 아주 흥이 났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었다

 

 

 

 

겨울 폭포

 

정선 가리왕산 골짜기에 들어왔다

산모퉁이 돌아서 빈 손이었다

깨달음이란 얼마나 뒤늦게 부질없는가

그대로 눈썹처럼 정직하였다

누가 누구에게 줄 거짓조차 없이

하늘은 쩡! 하고 푸르렀고

하늘 아래 온통 눈 쌓여서

산과 산 아래가 서로 의좋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만 돌아서야 하였다

하얀 입김조차 송구스러워

그때였다

저 쪽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놀랐으나

저 쪽의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오래 전의 나였다

 

더 깊숙히 들어가거라

그래야

네가 만나야 할 폭포가

산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리라

지금은 폭포소리도 없어진 채

네 육친의 얼음덩어리 고드름 덩어리로

잔뜩 기다리고 있는 폭포가 나타나리라

 

환각인가 나비 한 마리 훨

누군가가 외따로 꿈꾸는 마음 속 폭포소리가

곧 나타나리라

그 일대의 다른 것들도 모두 나타나리라

아직 봄이 아닌데

꽃숭어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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