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 꽃
나는 포복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외부에서
고통처럼 몸부림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여름은 죽을런지도 몰랐기 때문에
여름은 나의 팔꿈치에서
복숭아 껍질처럼 벗겨졌다, 왜냐하면
포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은 나의 팔꿈치에서
부스럼 딱지처럼 갈라졌다. 왜냐하면
포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은 나의 팔꿈치에서
곪고 있었다. 그리고 砂利가 파먹은 지면처럼
여름은 나의 팔꿈치를 파먹어 울퉁불퉁했다. 왜냐하면
나는 포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름은
나의 내부에서 몸부림치며
나의 상처에서 피고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죽는 법과 죽이는 법을 교육받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군인이었다
때문에 여름은 굶주리고 목말라했다
그래서 향수병도 없고 절망도 없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왜냐하면 세계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피곤했었다, 그리고 졸리웠다
때문에 태양도 하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포복이었기 때문에, 포복 그 자체였기 때문에
포복하면서 한 송이 도라지꽃을 보았다
본 건 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언젠가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군인이고, 나의 여름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와 말 없이 헤어졌다.
헤어진 것은 한 사람의 군인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나
죽지 않는 그녀의 여름, 전쟁이 없는 여름
그녀의 태양, 그녀의 하늘을 갖고 있는 것은 나였다.
군인이 아닌 나였다.
외부
나는 아름다운 '때'의
칼날을 위한
한 개의 연필
그리고 또
짝 지어 떨어지는
연필의 심
때문에
쭈빗한 나에게서
어떤 공백이 메워져 간다
깎여 작아지는 나에게서
잃어져 가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간다 언제나
가느다란 나의 흔적이 나에게
존재의 이유를 부여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골라 낸
한 개의 언어, 한 개의 이미지 속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수수께끼가 있다면
그것을 알아맞히는 도구다
그러나 이 나는
누군가에게 사용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의 솜씨를 향해
짧아져 가는 것일까.
새
끝날 때 쯤의 영화관
짚이 비어져 나온 걸상 위에서
엉덩이가 아플 때 쯤
갑자기 스크린에
커다란 새의 그림자가 나타나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막 가는 자들의
탄성이 터진다
휘파람 소리가 난다
그런데도 그 새를
의식한 사람은 없다
거기에도 없고
바다 위에도 없다
국경을 넘어 한 마리 새가
지금 어딘가를 날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아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새가
아주 쓸쓸한 공간을 날고 있다
우주의 벼랑을 향하여
끝날 때 쯤의 영화관에서 보았다
3편 동시상영의 그 영화제목은 잊었지만
초라한 여인의
클리이맥스 도중
필름이 끊겨지는 순간에 나타난
커다란 새의 그림자를 잊을 수 없다
국경을 넘어서
모든 체온을 거절하고 한 마리 새가
지금 어딘가를 날고 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새가
아주 추운 공간을 날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의 속도로 날고 있다
오늘 또다시 나는
끝날 때 쯤의 영화관 한 구석에서 혼자
사람의 마음을 져버린 새의 행방을
비오는 영상 저쪽으로
일념으로 쫓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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