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그리고 기억함

지리산 바래봉

바다가는길 2006. 3. 28. 18:04

여행의 테마는 바래봉 철쭉.

하지만 꽃을 보고 싶었던 건 아냐.

내가 만나고 싶었던 건 산.

거기 산이 있었지.

졸린 머리를 차창에 부딪치며 밤길을 달려간 거기, 아직 해도 뜨기 전, 아직 안개도 걷히기 전, 열두겹 치마처럼 켜켜히 겹쳐져 부염히 내 앞에 드러나 있는 5월의 산등성이들.

정령치고개에서 만난, 처음 만난 지리산.

나를 씨앗처럼 품어주는 겹겹의 너른 산.

턱이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도 저절로 터져나오는 웃음 참을 수 없었다.

너는 이런 얼굴이었구나... 가슴이 탁 트이게 시원한 얼굴.

 

시멘트 길을 터덜터덜 걸어, 혹은 지나는 차를 얻어타기도 하고, 잠깐 가파른 숲길을 더덕향기 맡으며 올라 이른 세걸평원.

후덕하게 넓직이 펼쳐진 능선 곳곳엔 꽃무더기.

하지만 거기서도 내 눈을 사로잡는 건 꽃보다도, 저 멀리 부연 구름 위로 둥실 떠오른 산마루.

내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 거대하게 떠있는 산은 그 뿌리가 땅에 닿아 있으리라고 상상되지 않았다.

그냥 구름 위에 그렇게, 하늘 한 가운데 그렇게 세워진, 이 세상이 아닌 세계같아 보였다.

산을 보며,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신선의 세계를 만들어냈는지 알만 하다는 느낌.

바람이 그 먼 세상으로부터 불어왔다.

더없이 고고하고, 한없이 고요해보이던 그 높은 산마루.

거기도 사람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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